<-- 68 회: 흑요칠마 서율? -->
제일 싼 음식을 시켜 아침을 때우는 동안 서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서율의 모습을 본 제갈 사혁은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쌀 밥 위에 있는 돼지고기를 서율에게 주었다.
“또 존댓말 할 것 같아서 주는 거야. 낯가리는 사람 딱 질색이니까.”
“고마...... 워.”
“직접 신체접촉을 하지 않아도 내공심법을 꿰뚫어볼 수 있지?”
“할 수는 있지만 확신은 못해. 직접 몸에 손을 대봐야 정확히 알 수 있어.”
“내공심법이 남들과 다른 다른 한 놈만 찾아내면 돼.”
어차피 마교의 내공심법은 한 뿌리를 두고 만들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니 정파인 청성파의 내공심법과는 확실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그걸 찾아낼 수만 있다면 서백호를 노리기 쉬워진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마교의 분타인 소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서백호와 싸우면 이길 수 있어?”
확실히 서율의 입장에서도 서백호란 살아 있는 전설과도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제갈 사혁이 떠오르는 신진고수라지만 서율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앞섰다.
“싸워봐야지. 맞아서 안 아플 놈 없고 때려서 멀쩡할 놈 없어.”
서백호에게 질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30대 초반이면 무림인으로서는 최전성기.
쉽게 생각해서 따낼 수 있는 감투가 아니기에 제갈 사혁은 최대한 성공률이 높은 쪽을 선택했다.
마교의 분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인지 산길이 험한 것은 섬서의 산악지역 못지않았다.
“조금만 쉬면 안 될까? 오늘 안에만 가면 되잖아?”
급할 건 없지만 명색이 금왕불문의 마지막 제자면서 경신법이 서툰 서율을 보며 제갈 사혁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응?”
어느 정도 산을 오르자 피 냄새가 역겨울 정도로 진동했다.
“서율!”
“자... 잠깐 무슨 짓이야!”
제갈 사혁은 서율의 허리를 한손으로 잡아 챈 뒤 서둘러 비류보를 펼쳤다.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저택 입구에는 시신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반쯤 작살이 난 대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간 제갈 사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하하! 역시 소문만큼 대단하구나. 소위!”
“선배야말로 소문만큼 대단하지 않구려.”
“난 건방진 후배를 좋아해. 그 콧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짓밟아 버리는 재미가 있거든!”
저택의 중앙에는 흰머리가 눈에 띄는 젊은 남자와 누더기 옷을 입고 머리는 산발을 한 거지같은 몰골의 남자가 손을 섞고 있었는데 거지꼴의 사내의 입에서 나온 소위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맞은편에 있는 이가 서백호였다.
“뭐야 서백호가 언놈인지 염탐할 필요도 없었잖아.”
“누구냐?”
소위를 공격하던 사내가 도(刀)를 거두자 소위와 사내의 시선이 제갈 사혁과 서율에게 닿았다.
“먼저 볼 일 보십시오. 기다릴 테니까.”
제갈 사혁이 바닥에 주저앉아 귀찮은 듯 손을 휘젓자 사내의 병장기는 제갈 사혁에게로 향했고 제갈 사혁은 손뼉을 쳐 날카로운 칼날을 막아냈다.
“제법 한 수가 있는 놈이구나.”
“선배 어딜 보는 것이오!”
뒤에서 서백호가 공격해오자 제갈 사혁은 일부러 칼날을 막아낸 손을 뺐고 사내의 칼날은 서백호를 향했다. 어차피 제갈 사혁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서백호의 신경을 긁어낼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나 생각났어.....”
갑자기 서율이 사내를 가리키며 말하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까딱 거리며 서율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세상에 칠객(七客) 구마준(九魔俊)이잖아. 저 사람!”
칠객이면 흑사련 최고수 중 일곱을 말하는 거지만 제갈 사혁에게는 별 흥미를 일으키지 못하는 자였다.
(뭐야 구마준이면 흑도섬하고 싸우다가 죽은 사람 아니야.)
흑사련 최강이라 불리는 흑도섬과의 대결로 목숨을 잃어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자가 바로 구마준이었다.
“구마준 얼굴도 알고 제법이네.”
“난 광동성 출신이야. 구마준은 광동성에 유명한 고수였고.”
한참 서백호와 싸우던 중 갑자기 구마준은 손을 뻗어 서백호를 제지했다.
고수들 간의 목숨이 걸린 대결에서는 참으로 어이없는 행동이지만 서백호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야. 꼬마.”
“누구 나? 이 노인네가 미쳤나? 내게 누군 줄 알고 동네 꼬마 부르듯 부르쇼?”
“너 혹시 제갈 사혁이냐?”
뜻밖에도 구마준의 입에서 제갈 사혁의 이름이 나오자 제갈 사혁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구마준이 제갈 사혁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럴 줄 알았어!”
반면 내공이 가미된 발차기에 나가떨어진 제갈 사혁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름을 밝히자마자 공격이라니 정파와 사파의 적대감이 만들어내는 달콤 쌉싸름한 마음의 결과라기엔 너무 부담스러웠다.
“니놈이 서백호를 잡으러 다닌다고 하도 중원 무림이 떠들썩해서 이 어르신이 몸소 네놈의 사지를 찢어주러 왔다. 꼬마야.”
입안에 고인 피를 뱉으며 제갈 사혁은 구마준을 노려봤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미친 그게 하필 지금이냐?”
무림맹과 흑사련에는 각각 하는 일이 같다. 산적도 토벌하고 무림공적도 잡아드린다. 하지만 이 두 단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었다. 바로 상대편의 고수를 잡는 일이다.
제갈 사혁이 마교의 서백호를 잡으러 왔듯 흑사련 소속인 구마준도 제갈 사혁을 잡으러 온 것이다.
“원래 나 같은 중요인물은 잡으러 오지 않는 게 이 업계의 관례 아니었나?”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바로 명문정파의 제자들은 그 표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문정파의 제자를 척살한다는 건 상대방의 전략하락이고 뭐고 없이 바로 전쟁을 뜻하기 때문이다.
“꼬마야. 난 흑사련이 시켜서 널 잡으러 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은 구마준이 단독으로 제갈 사혁을 잡으러 왔다는 뜻이었다.
“제멋대로구만 당신.”
“어린 나이에 너무 뛰어나면 이 아저씨가 질투해버리잖아. 안 그래 꼬마?”
“남자의 질투는 보기 추해!”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은 오히려 서백호를 노렸다.
“무슨 짓이냐!”
“서백호 이 고양이 자식아 난 원래 네놈 새끼 잡으러 왔다! 그러니 강 건너 불구경하면 곤란하지!”
“흐하하하! 꼬마들아 한번 놀아보자!”
구마준은 도를 버리더니 갑자기 제갈 사혁의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아저씬 빠져! 시대차이나잖아!”
“세대차이겠지 꼬마야!”
구마준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고 버텨낸 제갈 사혁은 구마준의 멱살을 잡은 뒤 서백호 쪽으로 밀었다.
“서백호에 구마준. 이거 오늘 이 제갈 사혁의 이름값이 폭등하겠는데!”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화산의 후계자군.”
“서백호든 화산파든 덤벼라!”
제갈 사혁은 오랜만에 온몸의 근육이 긴장상태에 돌입하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서백호 구마준 누구하나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죽고 싶은 놈부터 튀어나와!”
제갈 사혁의 건방진 도발에 구마준이 제일 먼저 반응했지만 서백호가 기습적으로 구마준의 멱살을 붙잡아 그대로 땅 바닥에 내친 뒤 배위에 올라타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저리 비켜!”
제갈 사혁은 서백호를 발로 차 구마준과 떨어트렸다. 그러자 이때가 기회라는 듯 구마준이 제갈 사혁의 머리카락 움켜쥐고 꺼꾸러트린 뒤 제갈 사혁의 가슴팍에 외공권을 찔러 넣었다.
도객이라지만 구마준의 권사로서의 재능도 더하면 더했지 두 사람에 비해 덜하지 않았다.
세 명이 붙어서 개처럼 싸우는 난전이다보니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했다.
변초가 화려한 서백호의 각법이 신경을 거슬리게 하자 무작정 뛰어든 제갈 사혁은 기어이 서백호의 오른발을 붙잡아 마당에 자리한 장독대로 던져버렸다.
“한눈팔지 마라!”
“누가 할 소리!”
소랑각(搔狼脚).
구마준의 강렬한 발차기에 제갈 사혁은 천지유벽세로 구마준을 날려버렸다. 이에 서백호는 깨진 장독대 파편을 던졌고 무의식적으로 장독대 파편을 피한 제갈 사혁은 순식간에 간격을 좁혀 들어온 서백호의 영춘권(詠春拳)에 맞아 살인적인 권격에 의해 내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주먹이 날아온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지만 도저히 피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밟고 있는 모래가 불고 있는 바람이 마치 자연이 서백호의 편을 드는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파강권!”
좀처럼 초식명을 외치지 않는 제갈 사혁이지만 소리라도 쳐서 주의를 끌어야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영춘권에 빨려 들어가 듯 얻어맞아야 했으니까.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들!”
마당에 있는 나무를 뽑아 휘두르는 구마준의 무식한 공격에 어이 없이 얻어맞은 제갈 사혁은 순간 머리가 멍했다.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 어떻게 쓰더라?)
너무 얻어맞아서 보법도 잊어버릴 정도로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 몸은 아직 팔팔하다!”
서백호의 귀를 붙잡아 그대로 박치기를 한 구마준은 서백호가 쓰러지지 않자 낭심을 후려차려 했고 반보로 이것을 피한 서백호는 쇄비천수장(碎碑千手掌)을 펼쳐 한순간 구마준의 혈액순환 방향을 역류시켰다.
“파!”
그틈을 타 흡정마공의 묘리를 이용해 서백호의 내공을 흩어지게 하려 했지만 허리를 기괴하게 꺾어 공격을 피한 서백호는 흑사장(黑沙掌)을 두 번 연속으로 펼친 뒤 그대로 제갈 사혁을 구마준에게 던졌고 구마준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제갈 사혁을 껴안은 뒤 그대로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환환미종보(幻環迷踪步).
순간순간 짧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보법과 함께 총 열 다섯 번의 주먹이 흉부를 가격하자 구마준은 처음으로 들릴 듯 말 듯 신음을 내뱉었다.
“네놈의 그러고도 화산파의 후계자냐?”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니겠수?”
그리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이 대수롭지 않게 등 뒤에서 구마준을 찔렀다. 그것도 구마준이 버려둔 구마준의 칼로 말이다.
“서백호 소위 드디어 둘만 있게 됐네.”
“..........”
“환환미종보? 짧고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공격형 보법의 모든 게 갖춰졌어. 이러니 무림맹에서 널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났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백호는 몸을 날려 제갈 사혁의 왼쪽 어깨를 발뒤꿈치로 내려찍었다. 하지만 자존심 덩어리인 제갈 사혁은 공격을 그대로 맞은 채 이를 악물고 주먹을 휘둘렀다.
“지곤이 숙부한테 안부 좀 전해달라더라!”
복호백열격.
복호백열격을 펼치자 서백호는 엄청난 기지를 발휘해 복호백열격을 흘려보냈다.
“!”
영춘권의 살인적인 속도를 봤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서백호의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복호백열격의 일권이 뻗어올 때마다 제갈 사혁보다 먼저 손을 뻗어 제갈 사혁의 손목을 쳐내 공격의 궤도를 바꿔서 흘려내는 완벽한 파훼.
“너 정말 죽여야겠다.”
이런 놈이 마교에 있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고 정파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긴장하는 게 좋아.”
검붉은 기운이 제갈 사혁의 전신에서 피어오르자 서백호는 기수식을 다시 잡았다.
“자하신공(紫霞神功)...... 상식을 뛰어 넘는군. 그 나이에 대성하다니.”
화산파의 그 모든 정수가 담긴 자하신공을 발현하자 서백호는 처음으로 약한 소리를 입 밖에 내뱉었고 제갈 사혁은 그런 서백호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자하신공이 대성했다는 걸 알아보는 그쪽이 더 놀라운데 뭔 재주로 이걸 알아봤나?”
서백호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한 그때 등 뒤에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져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자 검에서 뻗어 나온 검격이 제갈 사혁을 지나 서백호의 오른팔을 벴다.
“구마준!”
“주먹싸움에 장단 맞춰 줬더니 얕보였군.”
여태까지 먼지를 뒤집어쓰며 개처럼 싸웠던 구마준이 아니었다. 흑사련 최강의 칠객 구마준이었다.
“자하신공에 부끄럽지 않은 대접을 해주지.”
구마준의 병기를 감싼 기의 파동은 예사롭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