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회: 흑요칠마 서율? -->
“대천산 천풍(大穿山 天風).”
수십 갈래로 뻗어 나온 검기를 필사적으로 피한 제갈 사혁은 구마준의 검파(劍波)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오행매화보를 극성으로 펼쳐 피한 뒤 빈틈을 노려 관자돌이를 후려쳤지만 허벅지가 순식간에 베였다.
“칫!”
이전까지와는 그 상처가 확실히 달랐다. 확실하게 베인 것이다. 자하신공이 아니었으면 필시 잘려나가고 말았을 그러한 종류의 상처였다. 도검불침이라 잘난척하고 있지만 날붙이에 베이지 않을 뿐 검기는 사정이 달랐다.
“돌겠네.”
검기를 제대로 구사하는 고수에게 입은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베고 난 후에도 상대의 기가 일정시간 남아있기 때문이다.
육합권법에 권기를 이용해 막아내려 했지만 검파의 난폭함은 육합검법의 견고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제갈 사혁의 육신을 찢었다. 하지만 그 틈을 타 구마준의 간격에 들어간 서백호는 조비절수(雕比絶手)를 펼쳐 구마준의 심장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심장을 죄여오자 구마준의 기파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오직 공격본능만이 충실한 제갈 사혁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서백호!”
두 손으로 서백호의 목을 잡은 뒤 제갈 사혁은 흡정마공을 발휘해 서백호의 내공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서백호를 제압하게 되는 결정적 한수였고 제갈 사혁도 승리를 확신했다.
“!”
하지만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틈나면 다른 무공과 연계하여 사용해온 흡정마공이지만 단 한 번도 자하신공과 연계해서 써본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 충돌반응이 일어나지 않아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연계를 했지만 그것은 크나 큰 실책으로 이어졌다.
“컥!”
전신의 기를 서서히 몸 밖으로 흘려보내 일시적으로 엄청난 육체적 능력을 발휘하는 자하신공은 기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흡정마공은 말 그대로 타인의 기를 몸 안으로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 두 무공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승리라는 목적만 쫓았던 제갈 사혁은 뜻하지 못한 암초(暗礁)를 만나 부딪쳤다.
무공의 이해가 빠른 제갈 사혁은 충돌반응이 무엇에 의해서인지 깨닫고 서둘러 자하신공을 거뒀다. 그러자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정말 억척스럽게 구마준이 제갈 사혁의 어깨를 베어냈다.
“이 아저씨는 끈질긴 사람이다. 얘들아!”
“그런 것 같수다. 염병할!”
힘겹게 어깨에 박힌 칼을 뽑아낸 제갈 사혁은 그와 중에도 서백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구마준의 복부에 장타를 때려 넣었다.
“쿨럭~ 자하신공은 내공을 모두 거둬드리는 부작용이 있지 않았나?”
구마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토혈하며 묻자 제갈 사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내공은 한순간이지만! 외공은 영원하리!”
“잘났다. 새꺄!”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갈 사혁의 등 뒤로 구마준의 칼이 날아와 등을 찔렀다.
“이기어검(以氣馭劍)?”
“이기어도(以氣馭刀)다. 이 무식한 화산 검종 놈아.”
“아저씨 무리하지 마쇼. 거 보니까. 이거 하는 법 최근에 깨달은 것 같은데 말이야.”
완벽한 이기어도라면 등을 한번만 찌를 게 아니라 수 십 번 베어내는 난도질을 해야 한다. 그런데 단 한 번만 찔러 넣었다는 건 그 이상은 공격할 여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를 악물고 등에서 칼을 뽑아낸 제갈 사혁은 천천히 구마준에게 다가가 구마준의 목을 움켜쥐었다.
“시간됐어. 아저씨.”
“더러운 인생 같으니 죽자고 수련했는데 결국 젊은 놈들한테 잡아 먹일 줄이야!”
회심의 어기어도도 실패한 이상 그에게는 더 이상 선택권이 없었다.
제갈 사혁은 이미 호흡만으로 흡정마공을 사용할 내공을 모은 상태였고 어기어도로 인해 내공을 꽤 사용했지만 구마준은 여전히 좋은 흡기대상이었다.
구마준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제갈 사혁의 전신에서 녹색의 기가 퍼지며 온몸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외공은 영원하지만 내공은 불멸이다.”
“내공은 한순간 아니었나?”
농담을 주고받는 듯 보이지만 서백호는 시간을 벌고 있었고 그것을 모를 제갈 사혁이 아니었다.
“기다려줄까? 한 두 시진? 알고 있잖아. 운기조식을 해도 그 몸으로는 못 이겨.”
설사 서백호가 운기조식을 무사히 끝마친다 하더라도 일대일 승부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상처 입은 몸으로는 더더욱.....
명백히 칼자루를 쥔 쪽은 제갈 사혁이었고 운기조식을 하게 내버려둘 의리도 인정도 없었다.
“끝을 보자 서백호.”
서백호에게 천천히 다가간 제갈 사혁은 구마준의 칼을 들어 서백호에게 겨눴다.
“그만 두세요!”
여인의 목소리가 제갈 사혁의 행동을 멈추게 한 그때였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이 서율의 목에 단도를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교 무사도 함께였다.
“인질과 서백호 누가 더 가치가 있을까?”
하지만 망설일 제갈 사혁이 아니었다.
“인질이 걱정되지 않습니까!”
“내공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당신.”
“그게 무슨?”
“무림인이 아니라는 뜻인데 그럼 살인을 한 번도 안 해봤다는 뜻도 돼. 사람 쉽게 죽일 수 있겠어?”
제갈 사혁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러자 마교의 무사가 여인에게서 단도를 빼앗았다.
“아가씨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여인의 단도를 마교의 무사가 넘겨받는 순간 제갈 사혁은 들고 있던 칼을 던져 마교 무사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이 개자식아!”
그러자 서백호는 처음으로 제갈 사혁에게 욕을 퍼부었고 그 순간 서율의 목에 단도를 들이대던 여인은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서율을 뒤에서 잡고 있을 땐 몰랐지만 지금 보니 어느 정도 배가 불러 있었다. 양심의 가책정도는 느끼지만 제갈 사혁은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사문을 배신한 이유가 여자 때문이었나. 응? 서백호 소위.”
여자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마교의 무사는 그녀를 아가씨라 불렀다. 아마도 이 마교 분타인 소월의 분타주는 저 여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객잔에서 잠깐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대충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마교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애.... 그리고 사문을 무단이탈? 대단하네. 서백호. 책임감 있는 남자야.”
“............”
“정파는 너의 목을 원한다. 서백호!”
제갈 사혁의 외침에는 증오가 서려 있었고 증오가 퍼져나가며 비를 불렀다.
“하지만 너의 사문은 다르다. 가르침을 거두는 것으로 너를 용서하려 한다. 단전을 폐하라.”
단전을 폐한다는 건 죽음을 뜻했다. 강자군림의 원칙의 마교에서는 더더욱.
“차라리 내 목을.....”
“닥쳐라! 서백호. 네 목을 치게 된다면 나는 필시 너의 부인과 뱃속의 아이까지도 죽인다. 나는 은원의 잔재를 남기는 어리석은 짓 따위 하지 않는다.”
구마준처럼 제갈 사혁의 명성을 듣고 제갈 사혁을 죽이고 싶은 놈들은 강호 어딘가에 존재하겠지만 제갈 사혁에게 갚아야 할 원한이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절대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다. 시험해보아도 좋다.”
그래. 자신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목숨을 거둬야 한다면 한 번을 생각하지 않고 두 번을 망설이지 않는다.
“사문의 배려다. 평범하게 살 기회를 주겠다. 선택해라!”
지곤과의 약속이었다. 목을 베지도 근맥을 자르지 않고 단전만 폐해달라고 했다. 제갈 사혁이 서백호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부탁을 했다.
“서율.”
제갈 사혁은 윗옷을 벗어 서율에게 주었고 서율은 그것을 여인에게 덮어주었다.
“너의 두 팔은 가족을 안아주기 위해 있는 거다.”
“알겠다. 단 내 손으로 단전을 폐하고 싶다.”
“여보.......”
여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 선택에 경의를 표한다.”
무림인으로서는 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의무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서백호는 스스로 단전을 폐했고 스스로 단전을 폐함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제갈 사혁과 서율은 빈약한 저녁식사를 하며 허기를 달랬다.
“안타깝게 됐네. 금왕불문에 관한 서류는 없었어.”
“응......”
“어떻게 할 거야. 넌 이제?”
“모르겠어.”
“원하면 자리를 마련해줄 수도 있어. 상단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언제는 또 복수를 잊지 마라며.”
“아니 뭐 그거야 허세 좀 부린 거고 복수 같은 거 해봐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너.”
허세? 적어도 은원관계에 있어서 실없는 소리를 할 제갈 사혁이 아니었다. 서율도 그 자리에서 제갈 사혁이 한 말을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제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
서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런 서율을 보며 제갈 사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대신 복수를 해줄게.”
“어째서? 왜 그렇게까지 해주는데?”
“그냥 힘이 남아도니까.”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 제갈 사혁은 쉽게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보기 힘들 정도로 역겨웠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음 씀씀이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객잔에서 나온 후 갑자기 서율은 제갈 사혁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 무림인으로서도 정파인으로서도 최악이에요.”
서율은 다시 존댓말을 했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갈 사혁은 알 수 있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여자를 울리지 않으니까. 남자로서는 봐줄만 해요.”
그 말과 동시에 서율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제갈 사혁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고 빈틈을 보이자 서율이 제갈 사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녀의 그런 행동이 그녀로서는 최고로 용기를 짜낸 행동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살 수 있어요.”
“알고 있어.”
“난 괜찮아요.”
“알고 있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제갈 사혁과 떨어진 서율은 필사적으로 두 팔을 흔들며 제갈 사혁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서율을 보며 제갈 사혁은 곰방대를 물었다.
“울려버렸으니 이제 남자로서도 최악인가?”
묘한 설렘이 가슴을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연정(戀情)을 받은 이 느낌은 먼 훗날 되돌아보아도 분명 잊혀 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금왕불문 따윈 잊어 버려. 무림(武林)이라는 숲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야.”
제갈 사혁은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 서류에는 금왕불문이 마교의 은밀한 첩보 조직임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애초에 변장술을 가르치고 타인이 익힌 내공심법의 근원을 알아내는 걸 가르치는 문파가 정상적인 무림문파일 리 없었다. 어쩌면 제갈 사혁이 복수를 포기하라고 말했을 때부터 서율은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만나는 일 없을 거야. 아가씨.”
제갈 사혁은 발걸음을 돌려 사천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