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회: 청하 -->
“갈사 소협!”
오늘은 마치 나올 순서라도 정해놓은 마냥 손님이 차례대로 찾아오는 날이었다.
“아. 청하 소저.”
“이때다!”
청하라는 말에 서희가 수작을 부리려 했지만 제갈 사혁은 손등으로 서희의 어깨를 후려치며 서희의 만행을 저지했다.
“무슨?”
“사매입니다. 너무 친해서 애정표현이 과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만나서 반가워요. 무당의 청하에요.”
청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청하는 화산파니 무당파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무윤 서희에요. 청하 소저께서 사형의 배필.....”
“얘가 배가 고픈가보네요. 하하하.”
오늘 따라 유난히 호들갑을 떠는 제갈 사혁의 모습에 청하는 어리둥절해 했지만 그냥 사매의 옆이라 일부러 보이는 행동 정도로 넘어갔다.
“피부가 많이 상하셨네요. 어딜 가셨어요?”
“가까운 마을이요. 아이가 실종됐다고 해서요.”
여전히 청하는 명성과 관련 없는 민간의뢰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요?”
“돈 많은 집 아이를 납치한 도적들이었어요.”
역시나 별로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힘드셨겠네요.”
“찾는데 고생했지만 그래도 아이는 무사했으니 마음은 편해요. 저는 좀 씻고 올게요. 지금은 좀.”
“네. 기다리겠습니다.”
청하가 떠나자 서희는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왜?”
“일방적으로 저 여자를 좋아한다는 느낌이 나서 조금 놀랐어.”
“나는 뭐 사람 아니냐.”
“사형이라면 이 여자 저 여자 여러 다리 걸칠 줄 알았지. 사형은 중원무림에 명성을 날리고 싶어 했고 그런 남자들의 꿈이 양손에 꽃이잖아.”
“그런 대단한 사람으로 봐줘서 정말 고맙다.”
이신이 사숙조에게 용돈까지 받아오고 청하가 약간 젖은 머리로 자리에 앉아 그제야 무언가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화산파의 제갈 사혁이 흑사련의 구마준을 죽였다!”
폭풍이 불어왔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폭풍이.....
그 순간 아주 잠깐이었지만 제갈 사혁은 청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놀란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저 표정은 마치.
“갈사 소협. 구마준이라면 칠객 중 한 사람이잖아요!”
청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고 그 말을 들은 제갈 사혁은 평소처럼 적당히 겸손함을 내보이며 은근히 인정했다.
“칠객. 그 명성대로 힘들었지만 영원한 건 없습니다. 위에서 치고 올라오는 걸 누르지 못하면 그 길로 끝이죠. 세상사는 게 다 그렇잖습니까.”
한순간이었다. 제갈 사혁의 그 한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청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진 것은 그리고 그 눈빛과 아주 잠시 동안 마주한 제갈 사혁은 일전에도 이와 같은 일을 경험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청하가 보내는 눈빛은 확실히 적의가 가득했고 제갈 사혁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거죠.”
“정말 힘들다. 이 한마디로 끝나는 상대였나요?”
“구마준은 대단한 상대였습니다. 검격을 날릴 때는 어디 하나 잘려나가는 줄 알았죠.”
이미 지나간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식사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을 수 있는 무용담에 지나지 않았다.
불연 듯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서희는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생전 처음 아니 어쩌면 사형이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이 불편함이 타인과 함께 자리함으로서 느낄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사형 저기.....”
“갈사 소협 죄송해요. 오늘은 입맛이 없네요. 먼저 일어날 게요.”
서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순간 청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고 제갈 사혁은 평소처럼 청하에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쉬세요. 청하 소저.”
“..............”
청하가 가버리자 서희는 미간을 구기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제갈 사혁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사형은 내가 사매인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무슨 뜻이야?”
“같은 또래 중에서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을 만나면 의식하게 되는 건 분명해. 그렇다면 반응은 세 가지야. 좌절하던가. 자신만의 마음가짐을 갖던가. 질투하던가. 남자 혼자 무림인인척 하는 건 곤란해. 여자도 무림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어.”
“청하 소저 말이냐?”
확실히 지난 생애였다면 제갈 사혁은 금광수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알 수 있었다. 청하의 기분을.
“나도 별 수 없는 놈이네.”
무슨 조정 관료라도 되는 마냥 재해보수 작업을 하고 선행을 베푸는 청하를 보며 자기희생이 강하고 책임감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같은 종류의 동일한 족속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천상 무림인이었다. 자신과 같은
“단단히 미움을 받았나 보네.”
“정말 최악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다 불편했어. 구마준 같은 건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단 말이야.”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청하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제갈 사혁의 말이 너무 신경 쓰여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마교의 무사들에게 급습을 당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제갈 사혁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다. 기절을 해서 앞뒤 상황을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들을 전부 상대하고 나서 상처하나 없었다는 점이었다.
“..........”
자신의 병기를 꺼내든 청하는 조용히 검신을 만지며 미간을 찡그렸다.
“얼마나 차이가 나지?”
하루하루가 부족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다고 자신하는데 어떻게 같은 시간을 두고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있는 걸까?
“자하신공 때문인가?”
자하신공이 얼마나 대단한 무공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당시 제갈 사혁은 화산파의 후계자가 아니었고 그가 자하신공을 익힌 것은 최근이라 할 수 있었다. 절대 자하신공이 그의 근원이 될 수는 없었다.
혼자 방안에서 말하는 내내 청하는 자꾸 제갈 사혁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일순간 손에서 힘을 빼고 들고 있던 도를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도를 손에 쥐었다.
그 후 그녀는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해서 반복 된 행동의 연속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하는 사람처럼.
“스승님께 물어봐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청하는 그 길로 무림맹에서 장로직을 맡고 있는 스승 성제에게 향했다.
“스승님.”
청하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남자가 춘화(春畫)를 그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또 춘화를 그리시고 계세요? 정말 그 길로 나가실 생각은 아니죠.”
“이 스승은 서른다섯이다. 이 녀석아. 이런 거에 아직은 관심 있을 나이지.”
젊어서 제자를 두었기 때문에 청하를 대하는 성제의 태도는 사제 관계라기에는 조금 모자라 보였다. 그리던 것을 그만 두고 청하에게 시선을 준 성제는 손을 뻗어 앉아도 좋다는 뜻을 보였고 청하는 무뚝뚝하게 자리에 앉아 인상을 구겼다. 일련의 행동은 도저히 평상시의 그녀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냐?”
“제 나이 때 얼마만큼 강해질 수 있죠?”
단 한 번도 이런 질문을 해본 적 없는 제자였기 때문에 성제는 평소와 달리 진지한 태도로 제자를 대했다.
“너는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진정 힘 있는 자의 삶이라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청하가 추구하는 무림인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성제기에 의외였다.
“얼마나 강해질 수 있죠?”
“격체전공이라고 있다. 스승의 모든 내공과 무공을 전부 전수해줄 수 있는 비기지.”
격체전공이라는 방법이 있다는 것 정도는 청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격체전공을 사용하려면 진원진기(眞元眞氣)를 소모해야 한다. 진원진기라는 건 그야말로 생명 그 자체를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기운은 사람이 상처를 입으면 자연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 격체전공을 해주려면 시전자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제갈 사혁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스승은 화산파의 장문인.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또 모르지 진원진기를 마음대로 생성해내는 게 가능한 사람이라면..... 물론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그럼 영약으로는 어느 정도 강해질 수 있죠?”
“내공의 양이 강함과 비례하지는 않는다. 청하야. 눈앞에 있잖아. 영약이라고는 한 번도 입에 대보지 않은 사람이.”
격체전공도 아니고 영약도 아니라면 도대체 그 강함은 어디서?
“예를 들어서 단 한번만 보는 것으로 모든 무공을 통달하는 그런 존재가 나타난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네?”
“무공을 단 한 번에 이해해버리게 되면 몸에 익히기 위한 체화 수련이 필요 없겠지.”
확실히 무공을 익히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특정한 검법 즉 검을 휘두르는 방법을 몸에 익히기 위해 반복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주된 걸림돌이기도 하다. 만약 이런 것이 불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가능해요?”
“설마~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모를까. 그건 불가능해.”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누구야 도대체 널 이렇게까지 질투심에 불타게 하는 사람이?”
평생 남을 질투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적어도 성제가 바라본 청하는 그랬다.
“제갈세가 사람들은 머리가 좋다는데 한번 본 것만으로 무공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하필 하지만 제갈세가라니 제갈세가라면 그 자 밖에 없었고 그 자는 명실상부 화산파의 후계자.
“물론 머리가 좋으면 무공을 빨리 익히겠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 천하제일인은 모두 제갈세가에서 나와야했을 거야. 그리고 그는 그렇게 머리가 똑똑하지 않아. 제갈 사혁은 말이다.”
“...............”
“나는 네가 그에게 호감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변질 될 줄은 몰랐구나.”
생전처음이었다. 사형들이 아닌 다른 남자에 대해 말하는 청하는.
“모두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정말 상식 밖이지 제갈 사혁은 말이야. 칠망검 선배야 많이 늙었으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양전은 아니야. 양전은 겨우 스무 살 하고 1년 넘긴 애송이가 잡아낼 정도가 아니야.”
“칠객 구마준의 목을 벴어요.”
칠객이라는 말에 성제는 미간을 찡그렸고 의자에 비스듬하게 누워 생각에 잠겼다.
“흑도섬......”
“네?”
“흑도섬이 천재소리 들으며 전성기의 칠망검을 이겼을 때도 스물다섯이었어. 그런데 뭐 구마준?”
칠망검이 존경 받는 낭인이라고는 하지만 칠객 구마준에 비유할 바는 못 됐다. 칠객이라는 호칭은 그야말로 흑사련의 중추라 할 수 있었다. 설사 비겁한 수로 구마준을 이겼다 하더라도 구마준을 이겼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일 것이었다.
“화산의 제자는 괴물인가?”
순간 성제는 껄끄러운 감정을 느꼈다. 화산파가 떠오르던 말던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청하와 눈이 마주치자 성제는 그 껄끄럽고 불편한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직접 부딪혀 보는 게 나을 것 같으냐?”
의식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비무를 하고 난 후에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갈 사혁에게 느끼는 자그마한 호감 그리고 목숨을 구원 받은 일.
“그가 두렵냐?”
두렵냐고?
“어떤 게 말이죠?”
“어떤 거라니 말 그대로 그가 두렵냐고?”
그 순간 청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와 비무를 한 뒤 바뀌어 버릴 관계가 두려운 걸까? 아니면 제갈 사혁이라는 한 사람이 두려운 걸까?
“두렵지 않아요. 조금 망설일 뿐이죠. 결단을.”
거짓말이었다. 뒤바뀔 관계도 두려웠고 승패로 인한 심경의 변화와 제갈 사혁이라는 사람 그 자체도 두려웠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제갈 사혁이라는 무림인을 원하고 있었다.
“결단을 망설이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는데 말이야.”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신중한 거죠. 그만 가볼게요.”
뒤돌아서는 청하를 보며 성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문 밖으로 사라진 제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댄 채 미간을 구겼다.
“일생일대의 호적수 되어줄 만큼 고만고만하지 않단 말이야.”
호적수라는 좋은 관계라면 그로서도 제자를 응원하겠지만 들리는 소문과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제갈 사혁이라는 존재는 청하의 호적수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애도 아니니 알아서하겠지.”
걱정은 되지만 이 이상 나서는 것은 스승으로서 그리고 그 아이를 지켜본 보호자로서 월권행위나 다름없었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