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회: 청하 -->
스승과의 상담이 끝난 후 청하는 무엇을 결심한 듯 서둘러 제갈 사혁을 찾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제갈 사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청하는 서둘러 무림맹 숙소를 관리하는 팔을 찾았다.
“팔 대협.”
청하가 다가오자 평소 청하와 자주 얼굴을 보던 팔은 최대한 공손하게 청하에게 예를 갖췄다.
“청하 소저. 어쩐 일이십니까.”
“화산파의 제갈 소협은 어디계시죠?”
화산파의 제갈 소협이라는 말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팔은 손뼉을 치며 손가락으로 임무패가 걸어져 있는 알람판을 가리켰다.
“방금 임무를 찾아 가셨습니다.”
청하는 서둘러 임무 알람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알람판에는 이미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았다. 어느 게 제갈 사혁이 가져간 임무패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간 자신이 봐온 제갈 사혁이라면 분명 가장 위에 있는 임무패를 가져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임무가 무슨 임무였죠?”
청하는 가장 위에 있는 빈 공간을 가리키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항주(杭州). 흑호(黑虎)를 잡는 일이었지 아마?”
항주의 흑호라면 의적(義賊)으로 이름난 자였다. 그 근본은 도적이지만 정사지간 그 누구도 흑호를 잡는 걸 은근히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흑호를 잡으러 가다니 청하는 병기의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한편 길을 떠난 제갈 사혁은 평소와 달리 이신이 아닌 서희를 데리고 임무를 떠났다.
“어쩐 일이에요?”
“뭐가?”
제갈 사혁이 모른 척을 하자 서희는 입술을 비틀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이신이 아니라 왜 나에요.”
서희는 단지 제갈 사혁의 부상을 치료해줄 목적으로 무림맹에 왔을 뿐 임무를 따라가야 할 의무 같은 건 없었다. 아무리 사형이라고 해도 말이다.
“흑호잖아. 그 녀석 데리고 가봐야 별 도움 안 돼.”
“흑호(黑虎)라니 무서운 별호네 안 그래요. 사형.”
흑호. 얼핏 검은 호랑이라는 뜻이지만 문자 그대로의 뜻 말고 다른 의미로는 조금 우스운 이름이 된다.
“흑호는 개구리를 뜻하기도 해. 그래서 좀처럼 흑호라는 별호를 사용하는 무림인은 없지.”
“그런 거야?”
“그런 거다!”
사실 제갈 사혁이 이번 일을 맡은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앞서 종방영의 일도 그렇고 금광수의 일도 그렇고 서율의 일도 그렇고 바뀌어버린 누군가의 인생.
제갈 사혁이 지금 맡은 임무는 바로 금광수가 예전에 맡았던 임무였다. 당시 금광수는 임무에 실패했었고 그 이유는 흑호와 싸워서 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흑화와의 일은
“비밀이었지.....”
“뭐?”
“아니야. 아무 것도.”
원래 제갈 사혁이 무공 이외에 일에는 꼼꼼하지 못하다보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금광수는 지금 생각해보면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제갈 사혁이 찾는 건 무림에 풀리지 않는 원인불명의 사건들이고 이번 일이 그 중 하나였다.
“사형 나 힘들어요. 업어줘.”
한참 생각에 잠겼을 때 서희는 갑자기 등 뒤에서 제갈 사혁의 목을 조르다시피 강제로 업혀왔다. 정말 다리가 아파서 일리는 없고 그냥 일종의 장난이었다.
“귀찮으니까. 남의 다리 빌릴 생각하지 말고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라.”
“평소엔 살뜰하게 사제들 아끼면서 이럴 때는 꼭 사람이..... 성격 파탄자. 도대체 왜 걸어서 가는 거예요?”
흑사련 구역에 가깝지만 원래 항주가 있는 절강은 밤 문화가 발달돼서 굳이 정사니 마도니 가리지 않는다. 물론 그 때문에 항주에서는 매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칼부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항주로 가는 길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공을 사용해서 항주로 가면 동종업계 관계자를 만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종업계 관계자가 꼭 같은 구역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참아. 걷는 것도 수련이다.”
“아까부터 옆에 있는 사람들은 신나게 달리던데.”
앞 입술을 삐쭉 내밀며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는 서희의 모습에 제갈 사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강호는 경험이라는 게 중요하다.
“같이 경공 펼치면서 가볼까?”
“정말?”
경공이라는 말에 기뻐하는 꼴이라니.
“그래 같이 경공 펼쳐서 가다보면 인사도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제갈 사혁은 갈색 빛이 감도는 대나무를 손날로 쳐서 베어낸 후 마치 사람이라도 되는 양 대나무에게 혼잣말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어디 가십니까? 항주에 갑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지금 펼치는 경공은 무엇입니까? 천마행공(天馬行空)입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기 가서 잠깐 이야기라도 나누심이?”
혼잣말이 끝나자 제갈 사혁은 말을 건네며 촌극을 벌였던 대나무를 한손으로 움켜쥐어 으스러트렸다. 마치 사람의 목이라도 되는 양.
“어때?”
마치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친절하게 촌극까지 벌여가며 설명해주자 서희는 자신의 이마를 세게 후려쳤다.
“그만해. 이 이상은 내 자존심이 바스라질 것 같아.”
서희는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함과 동시에 화산파 내부에서 성격 파탄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을 10여 년째 그리고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항주에 도착한 두 사람은 흑호에 대한 정보 같은 건 전혀 수집하지 않았다. 흑호는 무림인이라기보다 의적이었다. 탐관오리의 보화를 훔쳐 사람들을 돕는 그런 의적 말이다.
“난 솔직히 그런 사람 마음에 들어요.”
“나도 그래.”
제갈 사혁이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자 서희는 의외란 듯 제갈 사혁을 쳐다봤고 그 표정은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도둑 고양이 같았다.
“의외에요. 사형 사형이라면.....”
“올바른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과 올바르지만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것 부도덕한 것과 부도덕하지만 내게 이득이 되는 것 그게 내 판단 기준일 뿐이지 내게도 옳고 그름의 잣대는 있어.”
“그럼 이번 일은 어느 쪽이에요.”
“부도덕하지만....”
말끝을 흐린 그때 누군가 외쳤다.
“흑호다!”
“재미있는 일.”
흑호가 출연했다는 누군가의 외침에 제갈 사혁은 지면을 박차고 올라 2층 건물의 난간을 밟아 박살내며 높이 뛰어올랐다. 지붕 위에 올라간 제갈 사혁은 곧바로 흑호와 마주했다. 흑호는 검은 옷을 입은 전형적인 도적의 모습이었는데 얼굴에는 검은 개구리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다. 이 개구리 자식아!”
제갈 사혁은 처음부터 사력을 다해 흑호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꺄아~”
“이... 이게 뭐야!”
실로 엄청난 내격이었기에 건물의 지붕 전체가 날아가 젊은 남녀의 뜨거운 현장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런 것 따위 지금의 제갈 사혁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죽어!”
달빛을 가르며 강맹한 일격이 흑호의 복부를 꿰뚫자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흑호가 주먹에 맞은 순간 엉덩이를 뒤로 빼더니 그대로 배를 튕겨 제갈 사혁의 주먹을 튕겨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고 그대로 제갈 사혁의 오른팔을 부러트려 버렸다.
“뭐?”
오른팔이 쉽게 부러지자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검은 개구리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물구나무 자세로 자신의 어깨를 짓눌렀다.
순식간에 2층 건물의 지붕에서 1층까지 주저앉아 버린 제갈 사혁은 박살이 난 건물잔해에 깔렸고 흑호는 벽을 박차며 부서진 잔해를 밟고 올라가 초승달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퉤~”
입 속에 들어간 나무 파편을 뱉으며 제갈 사혁은 인상을 심하게 구겼다.
도둑놈의 새끼가 생각보다 무공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뛰어난 걸 떠나 조금 특이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의 무공은 그래! 짜증나는 종류의 것이었다.
부상을 입은 제갈 사혁은 주변 객잔에서 방을 잡고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공이 참 특이한데.”
이불 위에 누운 제갈 사혁의 등을 밟으며 근육을 풀어주던 서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특이하다고 그래요. 원래 무공에 있어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건 기초잖아요.”
“아니 그런 것 말고 뭔가 근본적으로 달랐.... 야! 아프잖아. 살살 좀 밟아!”
이용당했다기보다 튕겨져 나갔다고 하는 게 옳았다.
“튕겼다니까! 일단 주먹을 뻗었을 때 확실히 때렸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배를 툭하고 튕기자마자 역으로 내가 충격을 받았다니까.”
“그런 무공은 흔하디 흔하잖아!”
“아니라니까 이 멍청아!”
실제로 그런 무공은 굉장히 흔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당했던 제갈 사혁으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지 몰라 미칠 노릇이었고 멍청이라는 말에 화가 난 서희는 인정사정없이 제갈 사혁의 등을 밟았다.
그렇게 흑호에게 일격을 당한 제갈 사혁은 복수를 다짐하며 밤을 보냈다.
“뭐냐고 사형.”
“뭐가?”
아침부터 서희는 머리를 감고 있는 제갈 사혁을 찾아와서 괜히 짜증을 냈다.
“왜 내방은 싸구려고 사형 방은 최고급인데!”
짜증의 이유는 서희에게 배정된 방이었다.
“돈은 내가 내니까.”
그 말을 하면서 웃음을 흘리는 모습은 남들이 보면 상큼한 미소지만 직접 겪어보면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웃음이었다.
“내 방에선 야리꾸리한 냄새가 났단 말이야.”
“여긴 원래 숙소가 아니라 야리꾸리한 놀이를 하러 오는 곳이니까.”
순간 서희는 머리 감는데 사용되는 청주병을 거꾸로 들어 제갈 사혁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이씨!”
“내 방에서 밥이나 먹어. 너 좋아하는 거 시켰다.”
밥을 시켰다는 말에 서희는 일단 진정하고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서희가 자리에 앉아 제갈 사혁은 흑호를 잡아낼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의적이잖아.”
“?”
정말 뜬금없었다. 갑자기 의적이잖아. 라니 도저히 토론이란 게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의적이면 털린 사람은 나쁜 놈들이겠네?”
“그렇겠죠. 의적은 아무 죄도 없는 부자들 물건 훔치는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 물건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 나눠주는 사람이니까.”
항주는 부자가 많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뒤가 구린 동네다보니 부를 축적하는데 있어서 그리 정당하지 못한 방법도 많고 이래저래 흑호의 활동지역으로 적당했다.
“일단 밥 먹고 나서 이 동네에서 안 털린 곳부터 찾아봐.”
“네.”
“그리고 나머지는 먹으면서 생각.”
그렇게 운을 뗐지만 사실 흑호의 내력이 궁금해진 제갈 사혁이었다. 어젯밤 서희와의 논쟁대로 상대의 힘을 뒤돌려주는 무공은 많다. 특히 권법사에게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유용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팔이 부러졌다.
제갈 사혁의 팔을 부러트릴 수 있는 사람은 많다. 기를 모우고 자세를 바로잡고 마음을 다스린 뒤 일격을 가한다는 가정 하에서는 삼류낭인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제갈 사혁의 팔을 아무렇지 않게 부러트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력 조사를 해야겠는데.)
그렇게 특이한 종류의 무공이라면 무림사에 기록되지 않을 리 없었다.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흡정마공도 신비한 마공이지만 무림사에 그 기록을 남겼다. 무림에 존재하는 한 이름 없는 무공이란 있을 수 없었다.
서희는 식사가 끝난 후 수사에 들어갔고 제갈 사혁은 하오문을 방문했다. 풍류남아의 도시 항주라지만 이곳의 하오문은 오히려 검소하게 전당포를 하기로 유명했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