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회: 청하 -->
전당포 입구에는 은자 대금 사절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금자보다 가치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은자를 받지 않는다니 조금 특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갈 사혁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골동품을 감정하고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은 호황을 그 자리에서 올려뒀다.
“흑호의 무공을 좀 알고 싶은데.”
호황을 보더니 전당포 청년은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감추더니 제법 잘 만들어진 검을 꺼냈다.
“3일 후에 오세요. 돌려받을 실 때는 은자 70냥입니다.”
대금으로 은자를 받지 않는다는데 대금으로 은자를 청부하다니 묘했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갈 사혁은 결심이 선 듯 전당포 청년이 준 검을 받고 호황을 넘겨줬다.
이게 이 지역 하오문의 방식이었는데 의뢰자가 가진 물건 중 신분 등을 나타내는 물건을 줘서 의뢰자가 누구인지 하오문 스스로 판단하고 전당포가 아닌 하오문을 찾아온 의뢰인일 경우 정보대금을 금자가 아닌 은자로 받아낸다.
“좋아.”
돈이 없어서 물건을 되찾지 못할 일은 없지만 호황을 이런 식으로 저당 잡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발로 걸어서 찾아 온 건 내 쪽이니까.”
항상 결과가 우선인 제갈 사혁으로서는 껄끄러워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제갈 사혁은 흑호와 만났던 현장으로 향했다. 지난 밤 그 난리를 겪은 기루는 공사 준비 중이었고 제갈 사혁과 흑호가 만들어낸 난장판은 아직 못질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방치 상태였다.
경신법으로 높이 뛰어올라 만근추를 행한 상태에서 물구나무 자세로 자신의 어깨를 양팔로 짓누른 그 공격은 달리 특별하달 게 없는 공격이었다.
“역시 특별할 게 없는데.”
경신법은 경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필히 배워야 하는 것이고 만근추 역시 무게중심을 잡거나 할 때 반드시 익히는 필수 무공이었다. 확실히 첫 일권을 튕겨낸 그 변화무쌍하고 독특한 무공 말고는 달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확실히 흑호의 밑천을 드러내야 했다.
“허리에 검이.....”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어떤 종류의 검법을 익혔을 게 분명했다. 그게 육합검법 같은 기초적인 거라면 난감하지만 허리에 병기를 찬 이상 비장의 검술을 익혔을 게 분명했다.
“나으리 오셨습니까.”
제갈 사혁이 공사현장에 찾아오자 공사를 주도하는 목수가 제갈 사혁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목수 입장에서 제갈 사혁은 일을 의뢰한 의뢰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액을 지불하는 의뢰인을 만나는 목수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했다.
“무슨 일입니까?”
제갈 사혁이 먼저 묻자 목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말입니다. 공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공사를 거부한다니 그게 무슨?
“네?”
식당이나 기루에서 난장판을 만들고 튀는 무림인은 많다. 그리고 각종 피해비용은 원인 제공자가 아닌 피해자인 상인이 알아서 해결한다. 그 어떤 상인도 무림인에게 피해보상을 청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은 화산파의 이름도 있고 해서 말끔하게 일을 해결하려 했다. 그런데 공사를 거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이유랍니까?”
“나으리께서 지난 밤 흑호를 상대로 싸운 게 이유라고.....”
“아니 흑호하고 싸운 게 뭔 상관이랍니까?”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흑호하고 싸운 게 대관절 무슨 상관이기에 호의를 베푼 것도 아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데.
“왜 이 지랄이야.”
“화나셨습니까?”
웃는 얼굴로 제갈 사혁을 대하고 있지만 목수는 죽을 맛이었다. 일반 사람에게 무림인의 심상(心象)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자신에게 불똥이 튀어 해라도 끼치면 큰일이었다.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누굽니까?”
제갈 사혁은 직접 기루의 주인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딴 가게 공사 안 해주면 돈도 아끼고 좋았다. 하지만 무림인으로서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지금은 좀 달랐다. 정인군자 소리는 못 들어도 나름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써야 했다.
기루의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제갈 사혁을 미리 알아본 기루의 주인은 다짜고짜 제갈 사혁의 멱살을 잡았다.
“야이~ 잡노무 시키야. 이 사람이 되다 만 짐승 노무 시키야!”
칠순은 되어 보일 법한 노인은 장정 못지않은 힘으로 제갈 사혁의 멱살을 잡은 뒤 뺨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노인의 부하들이 노인을 말렸다.
“어르신 진정하십시오!”
“상대는 무림인입니다!”
부하들이 허겁지겁 노인을 말렸지만 노인은 부하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당차게 외쳤다.
“내가 힘은 없지만 나도 강호를 상대로 장사한 게 50년이야. 나도 무공만 모르지 어엿한 무림인이라 이거야!”
그러더니 삿대질 하던 손으로 갑자기 제갈 사혁의 볼을 잡아당겼다.
“니 사부님 뭐하시노? 니 사부님 뭐하시노. 어이~”
다짜고짜 욕을 하고 멱살을 잡히고 이제는 스승님까지 들먹이니 제갈 사혁으로서는 어이를 떠나 환장할 노릇이었다.
“흑호 잡으라 가르치더냐? 이 망할 노무 시키야!”
“어르신 약드실 시간입니다.”
“차돌 애비 놔라! 놓으라니까. 야 돌빡이 이놈아 내 말 안 들리나 놔라!”
“어르신 제 아들 차돌이가 올해로 스물입니다. 그런데 돌빡이 뭡니까 돌빡이가.”
노인을 기어이 데리고 나가자 남아 있던 다른 부하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아이고~ 화산파의 도사님 어르신께서 노망이 드셔서 오늘 내일 하십니다. 한번만 봐주십시오!”
머리를 땅에 박고 들 줄 모르는 그 남자를 일으켜 세운 제갈 사혁은 설명을 부탁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르신은 항주 토박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배운 건 없고 할 줄 아는 게 이런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가게였는데 20년 전에 강호는 전쟁터 아니었습니까. 무림인들끼리 시비가 붙어 가게를 부수고 화풀이로 기녀를 죽이고 별일 다 있었습니다. 포기하고 일 때려치울까 하던 차에 흑호가 어르신한테 돈을 줬습니다. 정확히는 항주의 모든 상인들이 흑호에게 돈을 받았습니다. 비록 도둑질한 장물이 대부분이었지만 항주 사람들한테는 목숨과도 같은 돈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다시 시작한 어르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날까지 왔습니다. 한마디로 흑호는 어르신의 은인이고 오늘 날 항주는 흑호가 만들었습니다. 어르신뿐만 아니라 이 지역 그 누구도 흑호를 잡아가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가만히 들어보면 의적인 흑호의 도둑질한 물건으로 항주가 살아났다는 이야기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몇 년 전이요?”
“네?”
“그러니까 몇 년 전이요? 흑호가 나타난 게.”
“한 20년 됐습니다.”
그 말은 흑호의 나이가 한 사십에서 오십은 되었다는 소리였다. 예를 들어 스무 살에 도둑이 되어 활동했다 쳐도 사십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스무 살부터 도적이 되었을 리 없으니 대충 한 오십대라 생각해도 좋았다. 20년 간 관아의 병사들에게 잡히지 않고 몇 번이나 무림맹의 출사들을 따돌린 인물이다. 결코 고만고만한 인물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대단한 내력을 지닌 인물일지도 모르지.”
서희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항주의 유지들은 수십 년 전부터 흑호의 표적이 되어서 돈을 빼앗겼지만 절대 이 지역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세상천지 절대 잡을 수 없는 도둑놈이 있는데 나 같으면 진작에 튀었지.”
“항주는 황금알을 낳는 닭이니까요. 그 사람들도 끈질기게 버티는 거죠.”
“뭐하는 사람들인데?”
“대외적으로는 장사꾼인데 아편쟁이부터 인신매매까지 다양해요.”
끈질기게 버티는 놈들이나 끈질기게 털어가는 놈이나 의지가 대단했다.
“의지의 문제네.”
“그나저나 아편쟁이는 위험한 거 아니에요? 우리가 가서......”
“놔둬라. 그놈들 상대하는 건 피곤하다.”
흑호라는 인물이 무언가 한 가닥 꺼리가 있을지 모르는데 아편쟁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됐든 흑호가 모든 일의 최우선순위였다.
“흑호는 항상 돈을 뿌리기 위해 일정한 장소를 이용하는데 그곳이 이곳이에요.”
“그럼 어제 여기 나타난 게 우연이 아니네?”
그 뒤에 서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제갈 사혁으로서는 상식적으로 판단하기 힘든 일이었다.
“정말이야?”
“그렇다니까요. 흑호가 아무렇게나 금품을 뿌리면 마을 상인들이 조직을 꾸려서 흑호가 나눠준 금품을 챙겨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줘요.”
공짜 돈이 생기는데 그걸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제갈 사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건 이 지역에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확실히 이런 면에서 서희는 이신보다 나았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정보를 얻고 또 그 이상의 것을 알아서 조사해온다.
“흑호를 돕는 상인들이 백하(帛廈) 흑호에게 빼앗기는 이들이 소명(宵名). 그리고 무림맹에 의뢰를 한쪽이 바로 이 소명이에요. 주로 아편쟁이들하고 인신매매 조직들이죠.”
세상일이란 게 이렇다. 백하와 소명으로 나뉘었지만 소명은 그 실체가 없는 상인들의 두 얼굴이다. 그러니 마약상과 인신매매범들이라 하더라도 증거를 잡지 못하는 한 무림맹에서는 처벌할 수 없다. 또한 반대로 무림맹은 범죄자들이라고 해서 무림맹에 정식으로 들어온 의뢰를 거부할 수 없다.
“흑호를 잡는다. 변하는 건 없어.”
“네.”
그리고 이게 서희와 이신의 다른 점이었다. 제갈 사혁이 한번 정하면 서희는 그것이 어떤 일이건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다.
항주에서의 3일이 지나고 하오문으로 간 제갈 사혁은 실망스러운 정보만 듣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살막이라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살막?”
호황을 받아든 제갈 사혁은 눈썹을 심하게 꿈틀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들어냈다.
“수년간 흑호의 무공을 기재한 자료에 의하면 공탄(恐坦)이라는 무공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공탄은 살막의 무공인데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습니다.”
살막이라는 이름은 제갈 사혁도 알고 있었다. 살막이 등장한 것은 정확히 앞으로 1년 뒤 청하가 죽었던 지난 생애 마교와 무림맹의 항쟁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너무 치열해서 결국 흑사련까지 끼어들어 삼파전이 되었고 상대편의 간부를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그 일을 한 게 바로 살막이었다.
“약속했던 은자다.”
의뢰대금을 주고 하오문에서 나오자 서희가 전당포 기둥에 기댄 채 제갈 사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흑호가 부농의 집을 털었어요.”
“부농이면 뭐 농부?”
“말이 농부지 환상을 재배하는 농사꾼이죠. 오늘 나타날 거예요.”
그날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둡고 음산했다. 마른 나뭇잎을 밟으며 흑호의 앞을 가로막은 이는 방립을 쓴 남자였다.
“천주 생각은 해보셨소?”
흑호를 천주라 부른 남자는 대답 없는 흑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검에 손을 댔다. 애초에 처음부터 부탁 따위를 하기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럼 예의에 어긋나는 것을 알지만 가겠소.”
쾌검이 검이 만들어낸 거친 곡선은 흑호의 가면을 노렸고 그 순간 흑호는 가면을 살짝 위로 재껴서 하관을 노출 시킨 뒤
“!”
짐승의 이빨과도 같은 이로 검을 물어뜯어 버린 뒤 부서진 파편을 뱉었다.
“깊이가 없는 배극구검은 배극구검이라 할 수 없는 법. 네놈이 내 뒤를 이어 천추라 불리다니 천주라 부르기도 아깝구나.”
흑호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울려 퍼지자 그 순간 흑호의 손가락이 남자의 두 눈에 닿았고 남자는 필사적으로 피해내 한쪽의 빛을 잃은 것으로 그나마 다른 한쪽을 지켜냈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