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74화 (74/262)

<-- 74 회: 청하 -->

“젊은 네놈들끼리 작당을 해. 노인네를 쫓아낸 주제에 도움을 청하다니.”

흑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천주.....”

“막주에게 전하거라. 이곳에는 흑호라는 도둑놈 밖에 없다고.”

“제발 도와주십시오. 살막이 진정한 모습을 되찾을 때입니다.”

“살막은 살막이다. 현재의 살막이 살막의 진정한 모습.”

흑호가 살막에 대해 단언하자 남자는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말했다.

“살막은 암살 집단이 아닙니다! 신교입니다. 우리야 말로 절세신교입니다!”

“절세신교라. 한때 그랬던 때도 있었다.”

“한때가 아닙니다. 배교(拜敎)는 건재합니다.”

“아둔한 지고! 우리는 배교의 잔당에 지나지 않는다. 교주께서 돌아가신 날 이미 배교의 명맥은 끊겼다. 지금의 막주는 단지 배교의 그림자를 이용하려는 여우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그날의 시작이었다. 살막은 암살집단으로서 수 십 년을 살아 버텨왔고 암살집단에는 오직 의뢰와 임무만 있을 뿐 명예도 긍지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대 막주가 무덤에 묻어두었던 배교의 무공서가 발견 된 뒤로 살막의 젊은이들은 생전 느껴보지 못한 긍지를 느꼈다. 미천한 자신들이 사실은 배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살막은 달라졌다.

“전대 막주조차 배교에서는 한낮 대주에 머문 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실은 잔인했다. 배교가 그 뿌리라고는 하지만 살막은 배교의 우두머리에서 뜯겨져 나온 집단이 아니다. 우두머리의 부하가 창설한 정통성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그 사실을 외면했다.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과시할 명예도 그렇다고 부를 누릴 수도 없는 미천한 살수집단이 어렵사리 숨겨진 명줄을 잡았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한때는 자신이 감춰둔 배교의 무공서도 공개를 해 그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살막은 점점 자신들을 배교와 동일시하며 자신들이 배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 믿었다.

“유비가 한나라 왕조의 자손임을 앞세웠지만 그 피가 흐릿한 수많은 방계의 핏줄에 불과하다. 하물며 우리는 방계의 핏줄조차 잇지 못한 주인의 하수인이다. 그런데 어찌 주인의 것을 탐하려 하느냐!”

“하지만 우리는 배교입니다. 교주가 없다면 우리가 만들어내면 됩니다. 살아 있는 것은 교주가 아닙니다. 우리입니다!”

살막은 설사 자신들이 배교의 주인이 아니라고 해도 오기로라도 배교의 정통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욕심이 결국 흑호를 살막에서 내쫓았다.

“너희는 마교의 무서움을 모른다.”

“마교도 우리를 모릅니다.”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것에 긍지를 갖는..... 안타까웠다.

“찾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 반대편에서 지붕을 박차고 뛰어오른 제갈 사혁은 흑호와 남자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흑호는 개구리 가면을 눌러쓰고 남자를 향해 주먹을 쥐어보였다. 그러자 이를 알아들은 남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고 도망치던 남자를 바라보던 제갈 사혁은 시선을 떼고 흑호에게 집중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이쪽은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다.”

남자를 대할 때와 달리 흑호는 가면 속에 얼굴을 감춘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림맹은 네놈을 원한다. 흑호.”

무림맹이라는 말에도 흑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흑호가 보이는 저 당당한 태도.

흑호는 드러난 것들보다 훨씬 대단한 고수였고 보통의 범주 안에 드는 무림인은 아니었다.

제갈 사혁이 흑호의 오른팔을 노리고 주먹을 뻗자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니극(泥棘).

분명 뼈가 있는 사람의 몸일 텐데 낙지나 문어처럼 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번과 같은 공격을 되받아치는 종류의 기술은 아니었지만 워낙 기술이 특이해서 당황스러웠다.

흑호는 잔가지가 많은 나무를 연상케 하는 몸동작을 보이더니 주먹의 궤도를 자유자재로 바꿔 제갈 사혁을 가격했다. 알 수 있었다. 권법사로서는 서백호보다 뛰어났다.

“........”

평소라면 허세 가득한 말이라도 내뱉을 테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생각을 바꾸자.)

흑호를 제압하려고만 했던 제갈 사혁은 생각을 전환했다.

주먹을 휘두르는 그 변화무쌍한 궤도는 분명 두 눈을 어지럽히기 충분했지만 제갈 사혁에게는 뛰어난 동체시력과 순간적인 감각이 있었다.

피하기도 힘든 흑호의 연속적인 공격에 단순히 팔로 막아내는 것을 포기한 제갈 사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흑호에게 두 손을 뻗었다. 흑호의 주먹이 뻗어올 때 흑호의 손목을 마치 옷을 털어내듯 가볍게 털어내 주먹의 궤도를 바꿨다.

서백호처럼 정교한 하나의 기술이라기보다는 순간적인 감각 또는 무모한 객기에 불과하지만 전투 중에 이를 완벽히 해낸 것만으로도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분명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계기는 사라졌지만 성장하고 있다.)

봉명공과 함께 다닐 때만해도 깨달음에 가까워졌지만 언제부턴가 깨달음을 놓쳐버렸다. 하지만 설사 깨달음을 놓쳤다 하더라도 성장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흑호의 주먹을 상쇄시킨 제갈 사혁은 빈틈이 보이자 재빨리 날아올라 무릎으로 흑호의 턱을 후려갈겼다.

“큭.....”

하지만 흑호는 만만치 않았다.

엄청난 내공을 불어넣어 혼신의 일격을 가한 순간 제갈 사혁의 무릎에 실린 내공을 튕겨내 충격을 주었다. 처음 흑호를 만났을 때 내격권을 튕겨내고 팔을 부러트렸던 그 방법이었다.

(젠장! 경솔했다.)

흑호의 공격을 모두 거둬내고 기회가 생겼다고 판단해 크게 한방 먹이려 했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다행히 지난번과 같이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권법사의 생명인 무게중심을 잡기는 힘들어졌다.

일반적인 공격을 하면 연체동물처럼 흘려내고 내공을 가하면 튕겨낸다.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무적이었다.

“도와줄까요? 제갈 소협.”

그 순간 지붕보다 더 높은 나무 위 꼭대기에 쭈그려 앉은 채 건달마냥 도(刀)를 흔들어대며 청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갈 소협?)

청하는 친근함을 표현하듯 제갈 사혁을 갈사 소협이라 불렀다. 그런데 지금의 그 호칭은 굉장히 이질감이 느껴졌다. 물론 제갈 소협이라는 호칭이 틀린 건 아니지만 오늘의 청하는 어딘가 달랐다.

“그래주시겠습니까?”

청하가 끼어든다면 적어도 서희가 돕는 것 보다는 나았다.

나비처럼 사뿐하게 내려앉은 청하는 어딘가 평소와는 달랐다.

“뭐하는 거예요. 아까부터 답답하게.”

“네?”

“안 배웠어요? 탄력(誕力).”

탄력(誕力). 죽은 이가 아닌 이상 인간의 몸에는 상시 힘이 들어가 있다. 라는 가르침이다.

“주먹도 결국 사람의 몸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해요. 그러니 당연히 튕겨내죠. 내공이 스며들었다면 더욱 더 심한 반동이 올 테고.”

그 말과 동시에 청하는 도를 뽑아 칼날의 반대 부분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단 한 번도 내공이 스며든 공격을 피하지 않았던 흑호가 청하의 도를 피했다. 날이 달리지 않은 부분인데도 말이다.

“피했네.”

평소의 청하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투였다. 피했다. 라는 말의 진위를 알아챈 순간 제갈 사혁은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내공이 흐르지 않는 ‘물건’은 흑호가 튕겨낼 수도 상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청하가 아니었으면 제갈 사혁은 탄력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가르침도 떠올리지 못하고 패배할 운명이었다.

“제갈 소협이 권법사라는 건 알지만 수틀리면 재빨리 검을 뽑아야죠. 허리에 찬 건 장식인가요?”

사람을 비웃는 듯한 말투. 역시 청하는 평소와는 달랐다.

서둘러 호황을 뽑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흑호도 검을 뽑았다. 그 모습을 본 제갈 사혁은 이제야 자신이 공략 자체를 잘못 했다는 걸 깨달았다. 권법으로 밀어붙인 뒤 밑천을 드러내게 해서 검을 뽑게 만들 심산이었는데 흑호는 아주 단순하게 상대가 검을 뽑으면 따라서 검을 뽑았다.

소파로(心波路).

청하가 가볍게 도를 휘두르자 도격이 기괴하게 꺾이며 지붕은 파손 시키지 않고 지붕 위의 기와를 거둬냈다.

강맹함이 우선인 도법이라기엔 너무나도 부드럽고 또 한편으론 강렬했다.

청하의 실력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제갈 사혁이 아는 한 말이다. 하지만 이미 제갈 사혁의 기준이었던 용화장의 청하와 지금의 청하는 달랐다.

(잠깐 그러고 보니.)

청하의 옷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검은색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피가 말라붙어 검은색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뭐하는 거예요!”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청하의 외침이 제갈 사혁을 깨웠고 제갈 사혁이 정신을 차렸을 땐 말도 안 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사도멸홍(思道滅鴻).

“배극구검?”

다름 아닌 배극구검이었다. 지난생애에서는 금광수가 사용했으며 이번 생애에서는 제갈 사혁이 백년 하수오와 함께 빼앗은 뒤 불태워버렸던 바로 그 배극구검이 흑호에 의해 펼쳐진 것이다.

“정체가 뭐냐!”

“사형 얼빠진 소리 하지 말고 앞을 봐!”

제갈 사혁의 얼빠진 질문을 서희가 나무라자 제갈 사혁은 호황을 크게 휘둘러 사도멸홍의 기세를 한 번에 꺾었다.

“배극구검따위 내게는 안 통한다. 흑호.”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말이 없었지만 흑호는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배극구검은 몇 십 년 동안 강호에 나온 적이 없는 검법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 1초식을 본 것만으로 파훼를 했기 때문이다.

“여기 봐야지.”

미끄러지듯 몸을 숙이며 다가와 아래에서 위로 도를 휘두르자 옆으로 몸을 틀어 피해낸 흑호는 청하의 오른팔을 기괴하게 꺾었고 어깨에 힘이 빠져 청하의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어깨가 구실을 제대로 못하자 오른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청하는 그대로 넘어졌다.

이를 본 제갈 사혁은 검기를 발해 휘둘렀고 검기는 흑호에게 뻗어나가 청하에게 다가가는 흑호를 막았다.

“어지간히도 급했네. 평소에 검기는 쓸 때 없는 객기 취급하는 사람이.”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서희는 의외란 듯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흑호가 망설이는 사이 쓰러져 있던 청하는 쓰러져 있는 채로 도를 휘둘러 흑호의 다리를 벴지만 운이 나쁘게도 다리에 호신용으로 맨 단검 덕에 청하의 일격은 허투루 돌아갔다.

청하의 일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흑호는 청하의 얼굴을 발로 밟았고 그 순간 지붕이 아래로 꺼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이 새끼가 진짜!”

이를 보고 흥분한 제갈 사혁이 거칠고 사나운 기세로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펼쳤다.

병장기의 마찰음이 만들어내는 섬뜩한 소리는 옆에서 듣고 있는 서희가 마치 자신이 검에 베이기라도 한 듯 자신의 팔을 감쌀 정도였다.

“킄!”

사력을 다해 휘두르던 검은 제갈 사혁의 집중력이 흐려지면서 끝이 났다.

“하는 수 없지.”

검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공의 소모가 심하지만 권법이 통하지 않고 검술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면 검기를 날려 끝을 볼 생각이었다.

“청하 소저!”

결심을 하고 달려들려는 그때 청하가 지붕 위로 올라왔다.

“별 거 아니에요.”

억지로 팔을 끼워 맞추고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청하는 요란하게 도를 휘두른 뒤 기수식을 바로 잡았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