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회: 청하 -->
“흑호다!”
그 순간 흑호가 나타났다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고 불과 하루 만에 흑호가 나타나자 서희는 서둘러 바깥을 살폈다.
“사형 뭐해요. 빨리!”
“됐어.”
흑호를 잡으러 왔으면서 안 잡겠다는 제갈 사혁이 서희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심 이 성격파탄자가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달을 반쯤 가리는 검은 먹구름 그리고 개구리 가면을 뒤집어 쓴 채 지붕을 타고 다니며 금화를 비처럼 내리는 흑호와 흑호가 나눠주는 금화를 모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이 지역의 상인 모임.
“보통 부상이 아니었을 거야. 저 노인네.”
“뭐 그렇죠. 사형이 그 난리를 쳤는데 저렇게 하루 만에 지붕 위를 날아다닐 순 없죠.”
“무림맹으로 돌아가자.”
“흑호는요?”
“흑호가 항주고 항주가 흑호인데 저 커다란 걸 어떻게 가져 가냐?”
흑호와 살막 그리고 배극구검이라는 문제가 남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람들에게 흑호는 희망이다.
제갈 사혁은 악행을 망설이지 않고 행위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맹세코 단 한 번도! 하지만 이번 일은 악행이라기보다 ‘못난 짓’이었다.
(그러고 보니 금광수는 분명 흑호를 만났을 때 흑호가 배극구검을 사용한다는 걸...... 아니 금광수가 사용하는 배극구검을 흑호가 먼저 알아봤을 텐데.)
어떻게 보면 금광수와 관련되어 엮인 일은 꽤 많았다. 금광수 뿐만이 아니었다. 흡정마 종방영의 존재도 그러했다.
“금광수는 살막을 적대했나?”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내뱉자 서희는 제갈 사혁이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아서 미쳤나 싶었다.
“사형 미치면 안돼요. 무덕 사형은 사형의 뒤를 잇기엔 너무 사람이 강직하단 말이에요.”
“미치긴 누가 미쳐. 너 시집살이 하는 거 보기 전까지는 미치고 싶어도 못 미쳐.”
의자에 깊게 누운 채 제갈 사혁은 금광수와 종방영에 대해 떠올렸다.
(내가 죽은 건 흑사련 때문이란 말이야. 그 청사단 새끼들.... 그런데 문제는 종방영이 흑사련의 중요 인물이었다는 거야. 그럼 청사단은 왜 종방영을 노린 거지?)
어차피 흑사련이야 속된 말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강호에 나와 다른 너 따윈 필요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금광수가 과연 살막을 어떻게 대했느냐다.
(어차피 살막이 뭐가 됐든 뭐를 했든 거슬리면 다 쓸어버리면 될 일.)
제갈 사혁은 아쉽게도 심계가 깊은 사람이 아니었고 다행히도 강호는 그래도 아직까지 힘이 우선이었다.
“!”
“왜 그래요?”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라고 하는 게 옳았다.
다시 태어난 뒤로 단 한 번도 혈관이 막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태어났을 때의 몸을 줄곧 유지하고 있었다. 아기였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빠른 치유력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몸은 마치 사람이 가진 원래의 몸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무림맹에 도착하자마자 제갈 사혁은 청하를 만나러 갔다.
“제갈 소협을 질투했어요.”
그것이 청하가 문을 열고 들어온 제갈 사혁을 처음보자 마자 한 말이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서희가 말해줄 때까지는 전혀 모르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한때 금광수나 다른 이들에게 느꼈던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말하지 말 걸 그랬어요.”
“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가 한 일을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요?”
“뭐 한 두 번은 했겠죠. 하지만 빈말은 아닙니다.”
제갈 사혁은 조용히 청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 손을 청하의 가슴에 올려 청하의 손 위로 청하의 심장소리를 느꼈다.
“정말 후회하고 있습니까?”
일순 청하의 호흡이 멈추고 손끝에서 미미한 기가 느껴졌다.
“아니요. 솔직히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 김에 저도 한 가지 털어놓죠. 전 청하 소저를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어떻습니까?”
“알아요.”
한 번도 그런 티를 내본 적이 없는데 알고 있다니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마음을 진정 시켰다.
“전 청하 소저를 좋아하긴 하지만 아주 싫어하기도 합니다. 귀찮은 곳 찾아가서 봉사활동을 하지 않나 그것도 모자라서 같이 하자고 부추기지 않나. 그게 돈이 됩니까? 명예를 줍니까? 솔직히 얼굴 말고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청하는 제갈 사혁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이를 갈며 제갈 사혁을 노려봤고 제갈 사혁은 미간을 구긴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정말로 얼굴만 예뻐요. 그게 유일한 장점이고.”
유일하다는 말을 유독 강조하자 청하는 기가 막혔다.
“저도 솔직히 제갈 소협이 그런 사람이란 거 대충 느끼고는 있었어요. 가끔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는데 그런 말 들을 때면 내가 너무 확대해석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짐작이 사실이었네요.”
볼멘소리로 말하는 것과 달리 청하는 단 한 번도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제갈 사혁이 자신에게 보여 온 행동이나 언행은 모두 진실 된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 믿음을 저버리다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는 의롭지 못합니다. 제게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해타산만 들어맞으면 도덕적 책임도 저버릴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청하도 제갈 사혁도 아니었어요. 우리는 그냥 용화장의 수하였고 거지 갈사혁이었어요. 차라리 제갈 소협이 아니라 갈사 소협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역시 여자는 가을날 물든 단풍잎처럼 감성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어떤 난관에 부딪히거나 애틋한 그 무언가를 갈망하는 사이가 아니다.
“우유부단한 건 딱 질색이니까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우리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친구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네. 우리는 친구죠. 이름도 알고 나이도 알고 시간 나면 밥도 같이 먹으니까요.”
“그런데 어색해져버렸네요. 전 지금 이 상황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그래서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제갈 소협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열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이건 남자가 미안하다고 하면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뭘 잘못했냐며 따지는 투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말해서 비무는 아니었죠. 서로 죽이려고 했으니까.”
별 일 아닌 것처럼 애써 가볍게 말하지만 비무가 아니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미안해요.”
전혀 미안하지 않았고 그런 내색조차 숨기려 하지 않았다.
“저도 갈빗대 부러트리려 한 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갈 사혁이 조금 더 인성적으로 성숙했다면 대범하게 웃어넘기겠지만 아쉽게도 이런 종류의 시비를 그냥 넘어갈 정도로 마음이 넒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남들보다 나은 게 있다면 바로 사태 파악이다.
“아니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 온 게 아닙니다.”
대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자 그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온 자리에서 한심한 농담이나 하며 유야무야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보통 이런 일은 남자들 사이에서만 있는 일이고 이럴 경우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기 싫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말과 함께 제갈 사혁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청하는 이불을 세게 움켜쥐며 제갈 사혁을 노려봤다. 남자는 이래서 문제였다. 그냥 져주는 척 먼저 미안하다하면 될 것을.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뭐가 그렇게 어렵죠? 먼저 말해주면 나도 자존심 안 세우고.......”
평소보다 조금 쏘아대는 느낌이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또 봐요.”
제갈 사혁이 그 말 한마디만 내뱉고 나가버리자 청하는 그가 떠난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우유부단해.”
“못 봐주겠네.”
“스승님!”
창문 너머로 스승인 성제가 나타나자 청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소문의 제갈 사혁 생각보다 괜찮네.”
“뭐가요?”
“젊은 놈이 딱 부러지잖아.”
“뭐가요?”
“난리는 네가 쳐놓고 정리는 저쪽에서 하러 왔잖아.”
“뭐가요?”
“벌써 여자한테 져줄 줄 알다니 남자네~”
“뭐가요?”
계속 같은 말로 대꾸하는 청하를 보며 성제는 기쁘기도 하고 약간 서운하기도 한 미지근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를 알 나이가 된 건가. 다 컸네. 산수촌의 령령(伶鈴).”
남자가 아직 한참 젊었을 때 소녀는 자신의 마을을 구해준 남자를 동경했고 남자는 소녀를 제자로 키웠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 소녀는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도왔다. 그런데 처음으로 소녀는 자신의 힘을 자신의 욕심이라 해도 좋은 일에 썼다. 멍청하게도 자신을 사모하는 남자를 향해 말이다.
“넌 똑똑했으니까 별로 손이 많이 가지 않았어. 처음이네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건.”
“뭐가.....”
같은 말을 또 다시 반복하려 하자 성제는 손가락으로 청하의 입을 막았다.
“잘 들어라. 꼬마야. 우유부단한 남자는 여자한테 또 보자는 말 안 해. 그리고 속내도 말했잖아. 네 성격이 마음에 안 들지만 얼굴이 예뻐서 좋아한다는 둥 하는 소리 말이야.”
남자인 성제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본성을 드러냈잖아.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그럼 알아듣게 말할 테니 잘 들어 화산파 놈팽이가 어떻습니까? 라는 말을 몇 번했냐?”
“네?”
“하여간 여자는 허구한 날 남자한테 잔소리하면서 정작 남자가 하는 말은 안 듣는다니까.”
청하는 도저히 스승인 성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즉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당신은 이런 제가 어떠신가요? 하고 묻는 거잖아.”
“...........”
“당신만 괜찮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산파 애송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적어도 나한텐 그렇게 들렸어. 자존심보다 중요한 거지. 너와의 관계가.”
“............”
“그런데 너는 잘못했네 어쨌네를 따지고 있으니.....”
이래저래 제자 뒤치다꺼리는 스승의 몫이었다.
“저는 안가요?”
“넌 여기 있어 무림맹에 사숙 계시잖아. 사숙조한테 가면 여러 가지로 배울 게 많을 거야.”
갑자기 오자마자 화산파로 떠난다는 제갈 사혁이 뜬금없기는 했지만 그간 봐온 사부이기에 이신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더 큰 것 같다.”
“그래요?”
확실히 처음 남궁세가에서 봤을 때보다는 몸도 제법 좋아지고 그야말로 환골탈태가 따로 없었다.
“내공심법이 뭐였지 네가 사용하는 게?”
“소천성공이고요.”
원래 소천성공은 제갈세가의 것이지만 제갈 사혁은 이신을 위해 특별히 전수불가라는 조건하에 가르치고 있었다.
“무극심법(武極心法)이라고 있어. 사숙한테 가면 그것부터 배워.”
원래 제갈 사혁과 같은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천천히 순수한 내공을 모아야 하지만 기본 뼈대는 갖췄으니 성장기 발육을 위해서라도 자연의 기를 좀 더 빨리 모아 내공을 기초로 근육과 뼈를 제대로 만드는 게 여러 무로 좋았다.
어디까지나 격체전공에 의한 속성무공과 백년 하수오로 인해 생긴 내공 등 여러 가지 분에 넘치는 기연을 받아드리기 위해서는......
“다녀오면 선물 기대해라.”
“어떤 거요?”
평소에도 이것저것 사주지만 달리 선물이라 지칭한 적은 없기 때문에 이신은 선물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 이신이 강아지 같다고 생각한 제갈 사혁은 이신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멋쩍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무림맹을 나서자 두루마리를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혜성과 우연히 마주쳤다.
“어이~ 화산망종 흑호를 못 잡았다며?”
“뭐냐 곤륜계집 시비 걸려고 왔냐?”
“아니야. 잘했어.”
무림맹의 임무를 실패했는데 잘했다니 그게 무슨?
“사람의 탈을 쓰고 흑호는 잡는 게 아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그동안 무림맹에서 흑호를 잡지 못했던 게 아니라 잡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도 그 개구리 잡으러 갔냐?”
“갔지. 무원. 설해. 효정. 봉명공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서. 결과는 너와 같아. 하지만 난 적어도 너라면 흑호를 잡을 줄 알았어.”
“할 말 다했으면 나는 간다.”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은 경공을 펼쳐 사천 시내의 지붕 위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떠나가는 제갈 사혁을 보며 혜성은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평소엔 여유가 넘치더니 뭐야?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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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