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회: 후회하지 않는다. -->
경공으로 빠르게 달려가던 제갈 사혁은 갑자기 속도를 낮췄다.
바람 소리와 함께 갈색 빛이 감도는 메마른 나뭇잎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여름은 가고 완연한 가을이 오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바라보던 제갈 사혁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일부러 몸을 돌려가며 마른 나뭇잎을 밟았다. 장마철 물웅덩이나 겨울날 땅에 생긴 빙판을 일부러 발로 밟아 깨는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이었지만 그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진지했다. 나뭇잎을 모두 밟은 후 제갈 사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마른 나뭇잎을 발로 밟는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다시 경공을 펼쳤다.
화산의 사계절은 뚜렷하지 못하다. 중원오악(中原五岳) 불리며 가장 산세가 험하다고 알려진 화산은 그 명성에 걸맞게 산 주위로 영기가 흐르며 그 때문에 가을에도 푸름을 간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계절에는 특히나 참배객들이 몰린다.
천천히 걸어서 오는 통에 3일 정도 지난 뒤에나 화산파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대문 앞에서 벌어진 일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참배 기간에는 무기를 소지한 자의 출입이 금지됩니다.”
대문을 지키고 있던 평검수가 어떤 남자를 막아서고 있었다..
“빠졌네.....”
남자가 평검수들을 향해 빠졌다고 말하자 평검수들은 갑자기 인상을 구겼다.
“이 아저씨가 진짜.”
“여기는 화산파입니다. 괜히 객기부리다가 몸 성하게 못 나갑니다.”
미쳐도 한참 미친 평검수들이 남자를 향해 가희 망언을 일삼자 제갈 사혁은 재빨리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셨습니까! 선.....”
제갈 사혁이 무슨 말을 하려하자 남자는 제갈 사혁을 제지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이게 몇 개?”
“1.”
그러자 이번엔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이게 몇 개?”
“2.”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자 이번에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이게 몇 개?”
“3이 잖습니까?”
“그럼 1하고 2하고 3하고 합치면?”
뜬금없이 합치면 이라니? 평검수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영문을 알 수 없겠다는 표정이었고 제갈 사혁은 한쪽에서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전부 합치면 123.”
남자가 123이라고 이야기하자 평검수들은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아이고 돌겠네 이봐요. 아저씨 1하고 2하고 3하고 합치면 6이지 어떻게 123이요? 흐하하하~”
평검수들은 개념 없기로 화룡정점을 찍었고 남자는 평검수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나 화산지회(花山之會) 123기야.”
“하하....”
“푸하... 하...”
점점 웃음소리가 줄어들자 평검수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남자는 제갈 사혁에게 눈을 돌리더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제갈 사혁에게 던졌다.
“새꺄! 사형이란 놈이 빠져갖고 교육 안 시켰으니까 쟤네가 내 얼굴도 모르잖아 죽어 임마!”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평검수 두 명이 사태파악을 너무 심각하게 한 나머지 피부가 새하얗게 변했다.
화산지회. 화산파의 속가제자들이 하산 후 만든 친목회고 평검수들은 대부분 본산제자가 되지 못하면 화산지회에 속하게 된다. 화산파의 제일 높은 제자는 엄연히 대사형 무원이지만 이 속가제자라는 게 1년에 한 번씩 돈을 받고 교육시키기 때문에 기수도 엄청나 공식적으로는 본산제자들 보다 빨리 화산파에 입문할 경우 그 명칭은 선배지만 대우는 사실상 사형이다. 이것이 사회생활 3대 절세 무공인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 중 하나 학연이다.
“선생님 외출하셨냐? 안 보이신다.”
남자가 허공을 향해 외치자 매화검수 중 한명이 다가왔다.
“네 선배님. 장개 선생님은 출타중이십니다.”
스승이 외출 중이라는 말에 입맛을 다신 남자는 제갈 사혁에게 손짓했고 제갈 사혁은 잽싸게 남자의 옆에 붙었다.
“음~ 그래 무진이 무림맹에서 잘하고 있다고 들었다. 계속 그렇게 해.”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남자는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참배객들 사이로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제갈 사혁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는 평검수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씨~ 너희들 미친 거 아니야?”
제갈 사혁이 조금 전 일로 짜증을 내자 평검수들은 재빨리 제갈 사혁의 비위를 맞췄다.
“아무래도 저희가 잠시 미친 것 같습니다!”
“미쳐서 죄송합니다!”
“자기가 미친 거 알면 대문 경비를 안서야 할 거 아냐! 이 인고에 답이 없는 새끼들아! 삼도천에서 물을 퍼와 확 삶아 버릴 라니까!”
한차례 잔소리가 끝나자 제갈 사혁은 자신의 이마에 손으로 찰지 게 한 대 때리며 매화검수를 불렀다.
“네. 사형!”
교육이 덜된 평검수를 보며 제갈 사혁은 매화검수인 사제를 향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저 새끼들 안 보이게 묻어버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보통 화산지회의 속가제자들은 이맘 때 우르르 몰려다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한 명뿐이라 이 정도 선에서 해결됐지만 평소에는 어림도 없었다.
한바탕 홍역을 치루고 난 뒤 제갈 사혁은 본당으로 향했다. 참배객들이 많아서 평소에는 장문인과 장로들뿐인 한산한 본당이 오늘은 꽉 차서 발가락 하나 올릴 틈이 없었다.
제갈 사혁은 세상의 이치와 도를 설파 중인 장문진인과 장로들에게 눈인사만 건네고 자리를 떴다. 이맘때면 제일 바쁘기 때문에 제대로 인사를 나누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약방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무종과 서희가 있었다.
“너희들 뭐 하냐?”
“사형 오셨어요.”
“웬일이야. 내가 무림맹을 떠나니까 나 보고 싶었어?”
“뭐 하냐고?”
약방은 평소와 다르게 무슨 종이를 접고 있었다.
“저녁에 산 밑에 있는 강에 떠내려 보낼 종이배요.”
그러고 보니 접고 있는 종이에는 무슨 글씨 같은 게 적혀 있었다.
“잘 들 해라.”
귀찮은 일 같아 보여 잽싸게 도망치려 했지만 서희가 제갈 사혁의 머리채를 쥐어 잡는 통에 도망치기는 이미 늦었다.
“신이도 안 데려 온 주제에 도망치기는!”
“그래요. 사형 좀 도와줘요. 사형 뭐 들어보니까. 임무 없으면 무림맹에서 놀고먹는다면서요. 사매한테 다 들었어요. 집에 왔으면 집안 일 좀 거들어요.”
이래저래 화산파에는 만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들이 벚나무처럼 튼튼하게 자라기를’
저마다 종이에 적은 소원은 제각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을 훔쳐보는 것 같아 묘하게 재미도 있었지만 그 소원은 너무나도 소박하고 순수해서 종이배를 접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소원을 읽는데 정신이 팔릴 수밖에 없었다.
“훗~”
읽는 내내 너무 기분이 좋아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웃었다.
“평소에 저러고 다니면 얼마나 좋아.”
서희가 갑자기 한마디 하자 제갈 사혁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지었고 고개를 까닥거려 무슨 말이냐며 물었다.
“무원 사형처럼 그렇게 웃고 다니면 얼마나 예뻐 보여요. 나 같아도 반하겠네.”
남자한테 예뻐 보인다는 소리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뭐 대충 잘생겼다는 뜻으로 이해한 제갈 사혁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서희를 쳐다봤다.
“반했냐?”
“그게 아니잖아. 그 청한지 총한지 그 여자 말하는 거 아니야.”
그 이야기가 언제 나오나 싶었던 제갈 사혁은 관자놀이를 긁으며 딴청을 피웠다.
“난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됐네요. 이 답답한 사람아.”
서희와 제갈 사혁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무종은 입술을 삐뚤빼뚤 거리며 살짝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사형은 무표정일 땐 사람이 좀 인간성 없어 보이니까. 웃고 다니는 게 좋죠.”
“무종 사형이 속 시원하게 말하네.”
제갈 사혁이 무당파의 제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새삼 비밀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난 형수님이 무당파인 건 좀 그래요. 다른 사람들도 그러던데.”
화산파와 무당파가 사이가 나쁘지도 그렇다고 친하다고 하기도 뭐하기 때문에 실제로 화산파 내에서 이 일을 두고 크게 갑론을박(甲論乙駁) 펼치진 않지만 대체적으로 이렇다.
제갈 사혁이 누구를 좋아하는 건 상관없으나 화산파의 대모(大母)가 되는 것은 부정적이다.
“왜 갑을박론이라도 펼쳤어?”
“갑론을박이에요. 사형 그것도 몰라요.”
“너무 그러지 마. 서희야. 사형은 옛날부터 자기 편한 데로 글을 읽는 버릇이 있으니까. 한번 보면 그대로 외워버리지만 너무 빨리 암기하기 때문에 가끔 이렇다니까.”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명불허전를 명전허불이라고 했어요.”
“너네 좀 그렇다. 알아듣기만 하면 되지 남의 결점을 그렇게 막 드러내고.”
“그렇다고 해서 사형 흉보는 건 아니에요. 알아들을 수는 있으니까.”
“그래 무종 말 잘한다. 알아듣기만 하면 장땡이지.”
그렇게 종이배 접기로 오후시간까지 다 잡아먹고 저녁이 되자 본격적으로 화산 아래에서는 종이배를 띄우는 행사가 열렸다. 행사가 시작되자 불꽃놀이와 함께 평소 화산파 장로들도 제사복을 입고 참배객들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사형 여기 계셨어요.”
제갈 사혁은 강가에 앉아 있는 무원을 발견하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서희한테 잡혀서 종이배를 접었다며?”
“고 계집 어렸을 땐 귀엽더니 크면 클수록 날 잡아먹으려 한다니까요.”
“여동생이 다 그렇지 뭐.”
그 말과 함께 무원은 자신의 종이배를 띄웠다. 종이배로 접혀서 그 소원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너는 띄우지 않는 거냐? 아니면 벌써 띄운 거냐?”
“흥~ 자신의 소원은 자신의 손으로 이뤄야죠.”
“그럼 자신의 손으로 이뤄낼 그 소원이 뭐냐?”
“무진 사형이라면 뭐 주지육림(酒池肉林) 아니겠어요?”
무덕이 오자 다른 사형제들도 무원과 제갈 사혁의 옆으로 모였다.
“아니 강호정복일 걸.”
“아니야. 여자 문제로 소원을 빌었을 수 있어.”
“이 멍청이들아. 사형을 그렇게 모르냐. 천하태평(天下泰平) 이거 말고 다른 게 있을 리가.”
여러 추측들이 난무하자 여기저기서 말싸움이 일어났고 급기야 돈이 걸린 내기까지 벌어졌다.
“사형 말해 봐요. 무슨 소원 빌었어요?”
특히 돈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들어간다는 무장(無將)이 제갈 사혁을 강하게 밀어붙여 소원의 진위를 캐내려 했다. 주지육림이니 강호정복이니 여자니 자신을 그렇게 봐줘서 너무 기뻐 피눈물이 날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제갈 사혁은.
“소원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낼 뿐 저런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 멍청이들아.”
“아싸!”
제갈 사혁은 소원을 적은 배를 띄우지 않았다는 말에 무장이 환호를 지르자 여기저기서 돈 주머니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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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