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79화 (79/262)

<-- 79 회: 후회하지 않는다. -->

“뭐냐?”

제갈 사혁은 제갈 사혁을 향해 물었지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스스로 그 이유를 어림짐작한 제갈 사혁은 쭈그려 앉아 곰방대를 피우고 있는 스물일곱의 제갈 사혁과 눈을 맞췄다.

“난 후회 같은 거 안 해.”

“......................”

“죄책감? 그런 거 없어.”

가만히 곰방대만 피우고 있던 스물일곱의 제갈 사혁은 어깨를 들썩이며 묘한 몸짓을 보였고 이를 본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누구든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런 마음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스물일곱의 제갈 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취급하지 마. 나는 다르다.”

제갈 사혁이 부정하자 스물일곱의 제갈 사혁 옆으로 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 분명 저 아이는 순돌이었다.

“나는 달라! 이 상황이 몇 번을 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한다. 시험해보아도 좋아.”

그 외침과 동시에 제갈 사혁의 손에는 순돌이를 베었던 낡은 검이 쥐어졌고 제갈 사혁은 망설이지 않고 아이의 목을 쳤다.

“후회하겠지 죄책감 들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진다. 오늘 내일 그리고 과거...... 시간이 지나면 점점 기억이 희미해져 나중엔 별 것도 아닌 일이 되는 법이야.”

광기였다. 그것은 이성이 짓누르고 있던 광기였다.

환영은 또 다시 눈을 어지럽혔다. 환영이 만들어낸 제갈 사혁은 순돌이에게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고 다른 곳에서는 금광수의 검에 베여 죽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그리고 또 그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모습의 제갈 사혁들이 있었다.

제갈 사혁은 그들을 지나쳐 맨 끝에 있는 스물일곱의 제갈 사혁에게 다가갔다. 분명 스물일곱의 제갈 사혁은 환영이고 실체도 없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갈 사혁 본인이었다.

양심. 또 하나의 마음 또 하나의 자기 자신 어떻게 불러도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 우는 이상......

“계속 가지고 있어. 자랑하듯 내게서 내보이지 마. 어제의 후회는 네가 오늘의 영광은 내가.”

모든 것을 떠밀어버릴 속셈이다.

“종방영에게 금광수에게 순돌이에게 용서를 빌기 원했어? 잘못했다고 말하길 원했어? 알고 있잖아. 나한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

“이런 것을 보여주면서 내가 무언가를 깨달을 줄 알았어? 깨닫기를 원했어?”

만약 그랬다면 제갈 사혁이 정의라는 미명아래 죽였던 이들 한때의 변덕으로 목숨을 빼앗았던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고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껴야했다. 특별히 기억하는 소수의 피해자들이 아니라.....

스물일곱의 제갈 사혁도 결국 제갈 사혁이었다.

“결국 너도 이것 밖에 안 돼.”

광기를 쏟아낸 제갈 사혁은 먹이의 숨통을 끊어내는 짐승처럼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타인을 죽이고 끝에 가서는 자기 자신을 물어뜯자 그 순간 몸에 있는 땀샘을 통해 내공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

내공이 모두 빠져나가자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주저앉아 버렸다.

빠져나간 내공이 대기에 녹아 제갈 사혁의 주위를 맴돌자 제갈 사혁은 내공을 다시 거둬들이기 위해 흡정마공을 시도했지만 흩어진 내공은 흡수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어떤 감각이 느껴졌고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의식하는 순간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제갈 사혁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몸에서 빠져나간 내공은 호흡기관으로 내뱉은 공기와 같아서 더 이상 흡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수련동굴을 빠져나가 운기조식을 해야만 했다.

사력을 다해 동굴 밖으로 나가자 신선한 새벽 공기가 말라비틀어진 육신에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평소처럼 호흡만으로 내공을 흡수할 수 있게 되자 제갈 사혁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 위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꼭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틈이었다. 금광수와 배극구검 그리고 살막에 대해 자신은 알지 못한다. 종방영과 청사단 그리고 서율에 대해 자신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금광수도 종방영도 제갈 사혁이 모르는 또 다른 단면에서는 시대가 원하는 영웅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없는 그들의 위치에서 그들이 해온 것을 어쩌면 똑같이 또 다르게 처리해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혹은 불신이 만들어낸 환영이고 시련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종방영이나 금광수는 더 이상 없다.

“엎질러진 물 따위 닦아버리고 새로 받아버리면 그만이야.”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의 몸에서 이전의 정순한 내공과 다른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화가 나느냐? 스승이 아니라 그냥 모르는 이가 그랬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이른 아침 스승에게 찾아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네. 스승님이 아니라 그냥 모르는 사람이 때렸다고 생각하면 기분 나쁩니다.”

방금 얻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도호진인이 제갈 사혁의 이마를 사정없이 주먹으로 때렸다. 그리고 묻기를 화가 나느냐는 것이다.

“그럼 누가 시비를 걸었다고 생각해 보거라.”

“네.”

“어떻게 할 것이냐?”

“세상 무서운 것보다 사람 무서운 걸 먼저 가르쳐줘야죠.”

제자의 성품으로 보아 예상 가능한 대답이었다.

“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사고(思考)의 확장이다. 그 사람의 성품과 인성 그리고 생각.”

하지만 제갈 사혁은 달랐다.

“아주 어처구니가 없는 방법으로 몇 가지로 널 시험해보았다. 예상한대로 인격의 성장은 없구나.”

인격의 성장이라니 어쩐지 스승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거네. 그거!”

그때 불쑥 끼어든 게 도상진인이었다. 매사에 성격 좀 있어 보이는 촌철살인의 입담을 자랑하는 무종과 무윤 서희의 스승 그리고 유일하게 도산 진인과 함께 색마 화운 룡을 못 잡아들였던 일을 끝까지 비난하던.

“장문사형 기억하오? 만백화공(慢魄畵工).”

20여 년 전 정사마가 엮였던 전쟁을 엮은 현 화산파의 지도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대단했다. 살아온 나이 그 이상의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구나.”

“사형이야 그때 삼십대 후반이었지만 난 그때 새파란 애송이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소. 만백화공 그 마친 놈이 싸우던 중에 갑자기 깨달음이 찾아왔다며 운기를 하지 않았소.”

그렇게 말하자 도호진인도 옛 기억이 떠오르는 듯 했다. 그때 분명 깨달음이 왔다며 대뜸 막무가내로 운기를 행해 전쟁 중이었지만 차마 공격할 수 없었다.

“그놈이 그 자리에서 하루를 꼬박 운기를 하다가 운기를 끝마쳤을 때 어땠소? 이 우제(愚弟)는 기억하고 있소. 그때 느낀 기감(氣感)을.”

깨달음이라고 하면 본디 기운에서 선기가 느껴져야 하는데 마교인의 깨달음은 기운에서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다.

사람의 기는 어떠한 성질의 기운을 가질 순 있지만 사람의 감정을 대변하진 않는다.

화를 내고 있을 때도 웃고 있을 때도 내뿜는 기의 성질은 같다. 다만 당사자가 배운 내공심법에 의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내공을 끌어올릴 때 당사자가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해서 내공에 슬픈 감정이 깃들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예외가 있는데 바로 마기를 다루는 마교다. 마교는 감정이 그 힘의 근원이 되어 내공에서부터 감정이 묻어난다. 고만고만한 마교인이라면 모르지만 적어도 거물급들은 내공의 기운이 특별하다.

“이 놈이 지금 그 짝이오.”

“음.....”

“무리는 아니잖소. 장문사형 실제로 이 녀석은 감정에 의해 그 이상으로 강해지니까. 평소엔 감정을 절제하는 처억~ 하지만 한번 수틀리면 막나가는 놈 아니오? 그게 본성이고.”

확실히 그간 제갈 사혁을 지켜봐온 사숙이 하는 말이기에 제갈 사혁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럼 사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말하면 안 되지만 난 솔직히 깨달음에 정도가 있고 마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냥 축하해주면 될 일이오. 마교인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이 아이가 마교인은 아니잖소. 다만 분노에 충실해서 힘을 키우고 분노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오.”

축하해주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호진인은 제갈 사혁에게 열쇠를 주었다.

“받아라.”

열쇠를 건네받자마자 제갈 사혁은 그 열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지금이라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는 것이다.”

화산파의 서고인 백장서(百章署)의 열쇠였다.

백장서는 화산파의 경험의 보고라 불리는 곳이다. 그 이름만으로는 무슨 절세 신공이 잠들어 있는 보물창고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이미 화산파의 거의 모든 무공을 익힌 제갈 사혁에게 모르는 무공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백장서는 한마디로 실패한 경험들을 쌓아두는 곳이었다.

다른 문파였다면 모두 폐기했겠지만 화산파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실패한 무공이나 가설들을 따로 모아두었다.

“백장서의 열쇠다. 받아라.”

백장서에는 과거에도 환골탈태를 이루자마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온통 실패한 무공이나 시도 등을 모아둔 곳이라서 그 당시에는 들어가자마자 반나절 만에 나왔다. 굳이 하나 건졌다면 바로 이때 제자인 이신에게 가르친 폭류신공을 익혔다는 것 정도가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겨우 그 정도일 뿐이다. 지금에서 다시 들어가 본다 한들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리 없지만 스승께서 선물을 해주셨으니 거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스승님. 뜻 받들겠습니다.”

감사가 아니라 뜻을 받들겠다고 말하자 도호진인은 조금 의아해했지만 워낙 제갈 사혁이 조금 성격이 특이한지라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길로 백장서로 향한 제갈 사혁은 서고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두루마리는 두루마리대로 책은 책대로 아무렇게나 써서 둘둘 말아버린 종이는 종이대로 널려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옛날 이곳을 처음 만든 전대 장문인은 이곳에서 삼년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길면 두 달 짧으면 제갈 사혁처럼 반나절 만에 나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무언가를 얻는 자도 있는가하면 얻지 못하는 자도 있다. 백장서는 그런 곳이었다.

제갈 사혁은 좀처럼 백장서에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장서는 그냥 쓸모없는 실패작들을 두는 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날처럼 반나절 만에 나올 수는 없었다. 반나절 만에 문을 걷어차고 나와도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지금의 장문인은 과거의 사숙이 아닌 현재의 스승이었다. 생각 없이 기어 나올 게 아니라 무언가 열심히 알아본 척이라도 해야 했다.

“잠이나 자자.”

그 자리에서 누워버린 제갈 사혁은 그냥 그대로 잠을 자버렸다. 이것이 제갈 사혁의 문제이기도 했다.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더 나은 결과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타인의 실패에는 냉정했다. 그렇게 한참을 빈둥빈둥 누워서 잠만 자던 제갈 사혁은 배가 고파서 일어날 때 빼고는 좀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암~”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잠만 자는 꼴은 돼지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 짓도 이틀이 한계였다. 지루함을 참지 못해 택한 방법이 글을 읽는 것이었다. 절대 백장서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글을 읽는 게 아닌 오직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읽는 내내 제갈 사혁은 편견으로 가득 찬 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의 충돌로 생기는 힘을 이용하겠다니 이런 짓을 하면 오장육부가 남아나지 않을 걸.”

도저히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사람의 자세라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제갈 사혁은 나름대로 남이 만들다 실패한 결과물을 얕잡아보고 비웃으며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일이 지나자 제갈 사혁은 어떤 두루마리에서 우연히 그것을 보았다.

“뭐야 이거.....”

그 두루마리의 정체는 복호백열격 아니 복호백열권이었다.

복호백열권 과거 자신의 스승이었던 도산진인으로부터 전수 받은 이 복호백열권의 근원이 백장서에서 나왔다는 걸 눈치 챈 제갈 사혁은 백장서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여태까지 난 뭘 하고 있던 거야?”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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