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회: 후회하지 않는다. -->
다시 봐도 이 두루마리에 적힌 것은 복호백열권이었다. 다만 내공의 흐름이 조잡할 뿐 일권 복호를 수 십 번에 걸쳐 날린다는 기초적인 생각은 같았다.
실패한 무공들이 모여 있는 곳. 만약 깨달음에 의해 생각과 상상력이 풍부해진 사람이라면 실패를 밑바탕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절대방어라 불리는 육합검법도 수많은 개량을 통해 지금의 형태가 되었듯 과거의 기술로 되지 않았던 것이 시간이 흐른 뒤 조금 더 진보한 기술에 의해 부족한 점이 보완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실패작이 아니었다.
“환부작신(換腐作新)이라 했는데.”
낡은 것을 그대로 배우는 게 아니라 얻어낸 자신의 깨달음으로 낡은 것을 새것으로 바꿔야 했고 백장서는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제갈 사혁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너무나도 두려웠다. 만약 이대로 이곳의 가치를 자신이 알아보지 못했다면 훗날 장문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손으로 백장서를 없애버렸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숨을 쉬고 마음을 바로 잡은 후 제갈 사혁은 열심히 무공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서 붓과 벼루를 구해와도 될 것을 급한 나머지 나무로 된 신분패를 잘라내어 끝을 뾰족하게 만든 후 그 끝을 불에 태워 까맣게 그을린 부분으로 두루마리의 끝과 종이의 뒷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실패한 무공의 장점과 단점을 정리했다. 이곳은 아무나 들여보내면 그 진가를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훗날 누군가가 이곳에 왔을 때 조금 더 쉽게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갈 사혁의 의무였다.
거목(巨木)이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가지에서 떨어져나간 나뭇잎이 썩으면 양분이 되어 그 영양분을 흡수한 뿌리가 더욱 깊고 튼튼하게 땅속에 내려 않기 때문이다.
문뜩 제갈 사혁은 화산파의 오늘 길목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무림맹에서 사문으로 오는 길에 제갈 사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마른 나뭇잎을 발로 밝았던 적이 있었다. 단순히 재미로 한 행동이었지만 내심 마음속으로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나뭇잎이 자신보다 못한 다른 이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약한 자는 떨어지고 힘 있는 자는 그 자리를 영위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약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 사람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면 다음 세대를 위해 내려오는 법이고 결코 그것은 추락이 아니다.
제갈 사혁은 글 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실패한 것으로부터 자신 또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그 마음도 잊어버린 채 오직 훗날의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자료를 정리했다.
객관적이게 때론 개인적인 견해를 담아내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모두 동원했다. 그것이 선입견이든 뭐든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글을 멈추게 되었을 쯤에는 어느새 창가에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 계절이 되어 있었다.
“!”
뜻밖이었다. 문 밖을 나서자마자 그 사람과 눈을 마주하게 되고 제갈 사혁은 어쩔 줄을 몰랐다.
“어쩐 일이십니까?”
“누구?”
“접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왜 그래요?”
머리카락이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았고 젊은이 넘치던 짙은 검은 머리는 노인의 머리카락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흡정마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제갈 사혁이 감정 기복에 의해 내공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면 이런 일이 종종 생기곤 하지만 저 안에서 한 일이라고는 그저 글을 쓰는 일 뿐이었다. 뭐 어찌 되었든 이번이 처음은 아니기에 제갈 사혁은 달리 뜻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 어쩐 일이세요. 저희 사문에 다 오시고.”
“그냥 좀....”
어깨를 들썩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어색했지만 마냥 어색하게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좀 걸을까요?”
“수염 안 어울리네요.”
서로 동시에 말을 하자 분위기가 묘했다. 여전히 두 사람에게서 똑같은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요?”
“안에서 뭐했어요. 머리는 또 왜 그러고?”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여전히 제멋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멋대로인 점이 똑같을 수 있지만 그것을 동감(同感)이라는 단어로 묶을 수는 없었다.
“좋아요. 둘 다 말했다가는 안 끝나겠네요. 먼저 하고 싶은 말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지만 먼저 그 수염 별로에요.”
며칠 동안이나 관리를 안했기 때문에 수염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보통의 남자는 서른쯤에 수염을 기르기고 그 전에는 보통 외관상의 이유로 자른다.
“곧 자를 거예요.”
“잘라줄까요?”
“그래요. 그럼.”
서로 톡하고 쏘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전보다는 가까워지고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적어도 예전처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맞춰주는 느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로 고정된 면도날로 사정없이 수염을 깎아버리는 통에 아파서 죽을 것 같지만 제갈 사혁은 꾹 참아냈다.
“안 안파요? 스승님은 항상 수염 깎아주면 아프다고 뭐라 하시던데.”
“아프면 어떻게 해줄 건데요.”
“안 해야죠. 아프다는데.”
“그런 건 진작 좀 물어봐요.”
짜증을 내며 면도칼을 빼앗은 제갈 사혁은 거울을 보고 혼자 면도를 한 뒤 사과 껍질을 잘게 썬 것을 피부에 발랐다.
“원래 피부 보호를 위해 사과껍질 갈아 만든 이걸 먼저 발라야 해요. 그래야 안 아프죠.”
“그냥 물 바르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앞으론 잘 기억해둘게요.”
“그래요. 잘 기억.....”
그 말을 이성적으로 풀이한 제갈 사혁은 그만 들고 있던 면도칼을 놓쳤다. 앞으로는 잘 기억해두겠다. 이 말은 곧 앞으로도 제갈 사혁이 수염이 나면 깎아주겠다는 말이 되는......
“뭐... 뭘 기억 해준..... !”
“또 봐요. 갈사 소협.”
뺨에 스친 온기는 여느 때와 다른 청춘의 설렘이었다.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청하가 사라진 곳을 바라 본 제갈 사혁은 정신을 차린 뒤 작게 주먹을 쥐며 혼자만의 환희를 느꼈다. 메마른 감성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갈 계절 드디어 청춘이 찾아 온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화산파 식구들의 배중을 뒤로 하고 다시 사천 무림맹으로 향하려는 그때 서희가 다가와 제갈 사혁의 귀에 다 대고 속삭였다.
“아가씨를 안에 들여보내 준 건 나에요.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는 모른 척했어요. 괜히 알아버리면 한바탕 난리가 나니까.”
화산파 내에서 유일하게 청하를 만나 본 서희가 화산파에 청하를 소개하지 않은 건 그 아이 나름대로 제갈 사혁에게 마음 써준 행동이었다.
“그래서 조용했구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몇 달 동안 계속 찾아왔다니까요. 사형들은 물론이고 애들이 그때마다 누구냐고 묻는데 내가 얼마나 진땀 빠졌는지 알아요? 아무튼 나한테 빚졌어 사형.”
“조만간 좋은 옷 한 벌 보내주마.”
서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떠나려는 그때 무덕이 제갈 사혁의 어깨를 잡았다. 작별인사를 따로 나눌 정도로 먼 길 가는 게 아닌데 이렇게 길을 막아서는 일은 흔치 않았다. 특히 무덕에 경우는 더욱 더.
“사형이 폐관에 들어가신 후 강호의 정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잠시 동안 사형과 동행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강호의 정세가 어지러운 것하고 무덕이 자신을 따라가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무덕이 말한 그 강호의 정세가 제갈 사혁이 관련 된 일이라면.
“무림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오해가 있다면 말로 풀고 다툼이 생기면 두 주먹으로 해결하면 될 일. 결국 자신의 문제는 혼자 해결해야 한다. 그게 어른이니까.”
가끔은 도움이란 것을 청해도 될 것을 늘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늘 이런 식이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에게 제갈 사혁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무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형은 믿을 순 없어도 의지할 수는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 변덕스러움을 믿을 순 없지만 그 힘에는 항상 의지할 수 있었다.
“제법 건방진 말도 할 줄 알게 됐네.”
섬서에서 사천으로 경공을 펼쳐 서두를 수도 있지만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식도락(食道樂) 여행을 즐겼다.
조금 전까지 무덕에게 신변의 위협이 될 만한 경고를 듣고도 이리 행동할 수 있는 건 원체 먹을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나 하나 늦게 간다고 무슨 일 있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호황을 뽑아든 제갈 사혁은 커다란 바위를 한 번에 베어내고 평평해진 그 위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야 말로 천하태평(天下泰平) 약한 자는 꿈도 못 꿀 힘 있는 자의 사치였다.
이야기는 이 일이 있기 몇 개월 전으로 돌아간다.
“이 망할 새끼 오기만 하면 그 뻔뻔한 면상에 왕복으로 싸다구를 날려버리겠어. 개노무 자식!”
제갈 사혁을 대신해 이신을 맡게 된 도오진인은 이신을 보면 볼수록 화가 났다. 이신이 미워서가 절대 아니었다.
“사숙조.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그래 정말 잘 이해하는 구나.”
제갈 사혁이 권법과 검법을 모두 수련해 엄청난 실력을 쌓은 건 사숙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제자인 이신에게 있었다. 처음 이신이 자신에게 맡겨졌을 때 이신은 권법만 배우고 검법은 배우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제자로 받아 들인지 채 1년도 안돼서 검법은 가르칠 시간이 없게거니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권법만 가르쳐주시기로 했어요.”
“검법은?”
“안배우기로 했는데요.”
“...........”
처음에는 검법에 재능이 없어서 그랬거니 싶었다. 그 예로 자신의 사제인 도산진인은 검법에 재능이 없는 대신 권법에 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검을 가르쳤는데 이신은 한번 가르쳐준 검법의 모든 초식을 완벽하게 따라했다.
“그게 한 번에 되든?”
“네. 그냥 되요.”
미칠 노릇이었다. 장차 화산파의 장문인이 될 녀석의 제자가 이리도 재능이 출중한데 그 사부라는 놈은 제자에게 손잡이 쥐는 법도 가르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늘부터 이 사숙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마.”
하지만 도오진인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이 모든 게 격체전공으로 주입한 무공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격체전공으로 제갈 사혁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무의식중에 전수 받았으니 처음 검을 쥐었을지언정 그 몸과 마음은 수 백 그리고 수 천 번 검을 휘둘러본 노련한 검사의 그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면......
“검을 왜 그렇게 잡고 있는 것이냐?”
“에?”
다른 건 다 좋은데 이신은 검을 쥘 때 기수식을 전혀 잡지 않았다. 기수식(起手式)이란 건 공격준비 자세다. 그런데 이신은 검을 쥐고 차렷 자세로 멀뚱멀뚱 서있는 자세를 잡았다.
“꼭 무진이 놈처럼 잡는 구나. 그 놈한테는 단 일초식도 안 배웠다면서.”
격체전공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즉 이신은 제갈 사혁의 쓸 때 없는 버릇까지도 몸에 익히고 있었다.
“뭐 그래 됐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생각하면 되지. 오늘은 앞으로 아주 유용하게 쓸 육합검법을 가르쳐주마.”
그렇게 해서 이신이 검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도오진인의 검법수련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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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