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회: 그 제자. -->
이신의 하루 일과는 검법수련과 청하의 병문안이었다.
“청하 누나.”
“그래 어서 와.”
청하가 다쳐서 무림맹에 왔다는 소리를 듣고 이신은 매일 매일 청하의 병문안을 왔다.
“사부가 알면 크게 화낼 거예요.”
이렇게 만든 게 사실은 제갈이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원인은 분명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사부는 청하 누나를 정말 좋아하니까요.”
제갈 사혁이 다녀간 후 3일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청하는 제갈 사혁에 대해 어떻게 마음을 정해야 할지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그러던 중 청하의 눈에 이신이 들어왔다.
“제갈 소협이 날 그렇게 많이 좋아해?”
“청하 누나 왜 사부를 그렇게 불러요? 평소엔 갈사 소협이라고 부르잖아요.”
어느새 호칭도 서먹해져버린 청하이기에 쉽게 답해줄 수 없었다.
“아무튼 사부는 조금 별나요. 청하 누나 선물 산 것 만해도 산더미에요.”
선물? 하지만 청하는 한 번도 제갈 사혁에게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 미인도를 받은 적은 있지만 그것을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의미가 달랐다.
“선물 사놓고는 그냥 버려요.”
제갈 사혁은 제갈 사혁 나름대로 선물을 준비해서 청하에게 주려고 해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여인에게 선물이란 걸 줘 본적이 없던 터라 청하에게 선물을 줄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끝에 가서는 결국.....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 괜히 부담 가지면 어떡해? 라고 말하면서 버려요.”
선물을 주는 것까지 청하의 입장을 생각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니 평소의 결단력 있는 제갈 사혁의 모습만 알고 있는 청하로서는 의외의 모습을 본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제갈 소협은 어디에 있니?”
“사문으로 가셨어요.”
“그래?”
그리고 그날 이후로 청하는 무림맹을 떠나 무당파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있으면서 가장 빨리 만나기 위해.....
청하가 떠난 뒤에도 이신의 생활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오전에 검술을 수련하면 오후에는 자유 시간이었다. 늘 제갈 사혁의 분위기에 휘말리면서 사는 터라 제갈 사혁이 없는 하루하루는 이신에게 평온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부는 언제 오실까?”
15년을 남궁세가라는 작은 울타리에서 살아온 이신에게 제갈 사혁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제갈 사혁이라는 날개가 없으면 이신은 날아갈 수 없었다.
“이신?”
무림맹에서 이신을 아는 사람은 청하와 도오진인 그리고 혜성이다. 이들은 모두 제갈 사혁과의 인연으로 인해 알게 된 사람들이지만 유일하게 무림맹에서 이신과 직접적인 인연이 닿은 사람이 있는데 바로 남궁 미려다.
“몰라 볼 뻔 했어. 남자 아이들은 원래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
이신의 신체적 성장은 사실 정상적인 게 아니었다. 백년 하수오와 최근 도오진인에게 배운 무극심법으로 인해 육체가 무공에 알맞은 몸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나이는 열다섯에 불과하지만 열일곱 정도의 성장속도를 보여 지금은 어엿한 사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그래 오랜만이야. 오늘은 저 그러니까.....”
“사부는 사문으로 가셨습니다.”
제갈 사혁과 딱히 사이가 나쁜 건 아닌데 이신과 남궁세가를 엮이지 않게 하려다보니 남궁 미려도 제갈 사혁도 친척이라고 하기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돼버렸다.
“우리가 원래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어색하네.”
“어색하세요?”
이신에게는 과거에나 현재나 남궁 미려와는 딱 이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어색하고도 말 것도 없었다. 마냥 서 있기 어색했던 미려는 이신의 옆에 앉으려 했고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신은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의자에 깔아두었다.
제갈 사혁이 특별히 주문한 도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의자의 깔개가 되어버렸다.
“앉으세요.”
“고마워.”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말이 없었다. 이신은 원래 남궁세가의 시종이었기 윗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소양이 몸에 배어 있었고 이신과 그렇게까지 친하지 않았던 남궁 미려는 달리 이신에게 할 말이 없었다.
“요즘 취미가 뭐야?”
그래서 한 말이 고작 취미가 뭐냐는 남자가 여자한테 말붙일 때도 쓰지 않는 가장 흔해빠진 질문이었다.
“요새 사냥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바느질이 취미에요. 어쩌다가 사부 옷 꿰매주면 짜증을 내세요. 제가 꿰매줘 버리면 버릴 옷도 못 버리게 됐다면서.”
내심 짜증을 낸다기에 그 성격 나빠 보이는 제갈 사혁에게 구박이라도 당했다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 보였다.
“잘 해줘?”
“네. 사부는 말투만 신경질적이지 좋은 분이에요. 그 옷도 사부가 사주셨어요. 금자 10냥이라는데 입기 싫어도 비싸니까 그냥 입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남궁 미려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아주 살짝 엉덩이를 들었다. 금자 10냥이면 지금 남궁 미려가 입고 있는 옷을 다 합쳐야 계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아무리 비싸도 도포 한 벌에 10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무슨 옷이 10냥씩이나?”
“사부는 금자 2냥 정도 되는 옷 입으시면서 괜히 이 옷을 10냥씩이나 주고 사셨어요.”
제자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도 제갈 사혁이 이신을 잘 보살피고 있다는 사실은 간단한 대화만으로 알 수 있었다.
“아가씨는 요즘 어떠세요?”
이건 한마디로 기습이었고 암기였다. 설마 역으로 자신에 대해 물어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남궁 미려는 당황해야 하며 말을 더듬었다.
“나... 나?”
“네.”
“선 봤어. 지금도 보고 있고.”
명문가 규수들은 대부분 부모들이 혼사를 알아서 정하는 경우가 많아 선을 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남궁 미려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었다. 전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명성도 명성이지만 무림인으로서도 재능이 뛰어났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악인을 벌하는데 앞장서는 여장부.
그것이 현재 남궁 미려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었다. 이렇다보니 남궁 미려가 마치 오르지 못할 산처럼 되어버려 혼사 이야기가 쉽게 오고 가지 않았다. 그러니 혼기가 꽉 찬 딸을 가지고 있는 남궁 세가로서는 맞선이라는 강수까지 두어 남궁 미려를 시집보내려 했다.
“선은 잘 보셨어요.”
“죄다 한심한 사람들만 나와서 기분별로야.”
“정말요?”
정말요? 이 말은 여자들에게는 절세 영약 같은 단어였다.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 단어는 흔히 동조(同調)의 뜻으로 통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여자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내 말 좀 들어봐. 이부상서(吏部尙書) 아들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야.....”
이야기는 한참 끝날 줄을 몰랐다. 이야기 전개는 반년 전 이틀 전 한 달 전 등등 날짜 등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모두 똑같았다.
“무림인이 어때서? 그런 남자들 딱 질색이야.”
“그러네요.”
물론 이신이 남녀사이에 관해 무언가를 알리는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시종으로 지내면서 갈고 닦은 대화의 기술로 남궁 미려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남궁 미려의 기분을 맞춰주니 어느새 밤이 되어버렸다.
“으으~”
기분 좋게 기지개를 펴며 남궁 미려는 개운한 표정으로 이신을 쳐다봤다.
“이래서 소화가 널 좋아하는 구나.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
“그럼 내일도 이야기해주세요. 들어드릴게요.”
“내일은 임무를 가야해서 조금 힘들 것 같아.”
무림맹에 있는 거의 모든 무림인들은 임무를 정하면 그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강호 전역을 돌아다닌다. 제갈 사혁도 청하도 그리고 남궁 미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괜찮으면 따라와 볼래?”
“그래도 되요?”
임무는 어디 놀러가는 게 아니다. 이신과 같은 아직 미숙한 소년을 데려가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지만 남궁 미려는 대수롭지 않게 이신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남궁세가의 일원이라는 남궁 미려의 자부심과 어떠한 위험에서도 지켜줄 수 있는 조력자가 있는 이신.
경각심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의 만남이었다.
동행이 정해지자 이른 새벽에 만난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소도장(小盜匠) 광동성(廣東省) 출신으로 광서성(廣西省)에서 활동하고 있어 죄목은 강간 살인이 대부분이야.”
남자들이야 마도척결이나 무림공적 때려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겠지만 여성 무림인들은 보통 이런 악당들을 잡아드리는 일에 더 매달렸다.
“원래는 만화곡(萬花谷) 출신이야. 무공도 뛰어나서 관군도 잡아드리지 못하고 있어.”
“만화곡이 뭐하는 곳이에요?”
만화곡이 뭐하는 곳이냐는 말에 남궁 미려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신도 무림에 발을 들였다면 각 문파들의 이해관계 정도는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혁은 그런 것도 가르치지 않니?”
제갈 사혁이 없는 자리라서인지 남궁 미려는 제갈 사혁의 이름을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아뇨. 저도 눈치가 있으니까 그런 걸 알아보고 싶은데 사부가 이래요.”
그러더니 갑자기 이신은 천(川)자 미간 주름을 짓고 제갈 사혁 특유의 거만한 말투를 따라했다.
“니가 화산파라는 거만 딴 놈들이 알면 되지 니가 딴 놈들이 어디서 뭐하는 놈들인지 알 필요는 없어.”
어떤 의미에서는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하지만 듣고 있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묘했다.
분명 제갈 사혁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그 말을 그대로 모사한 이신이 얄미워 보이는 건 왜 일까?
“정말 그렇게 가르쳐줬니?”
“아 그리고 강호에서 살면서 꼭 필요한 말들도 가르쳐줬어요.”
이쯤 되면 그 가르쳐준 말조차도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건 여자의 육감으로 때려 맞출 가치도 없었다.
“뭐라고 가르쳐줬는데?”
“그래서 내가 잘못 했냐? 미쳤냐? 너 이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말하면서 이신은 스스로 자괴감이 들었는지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자 남궁 미려는 이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이신과 눈을 마주쳤다.
“잘 들어. 강호에서 꼭 필요한 말은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오해가 있으셨나 봅니다. 이 세 가지야.”
“사부도 그걸 꼭 알았으면 좋겠어요.”
남궁 미려는 이신이 착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마차로 이동하는 동안 남궁 미려는 이신을 데려온 결정적 목표기이도 했던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그런 사람이었다니까. 아니 자기가 오빠면 오빠지 뭐만 하면 시비야.”
“소가주님은 좋으신 분이시잖아요.”
“지금이야 그렇지 아무튼 그래서 할아버지.....”
그 순간 할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남궁 미려는 서둘러 입을 막았다. 이신에게 있어서 태상가주이자 남궁 미려의 할아버지는 언급하는 것 자체가 껄끄러운 상대였다.
“괜찮아요. 계속 말 하세요.”
이신은 남궁 미려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아니 뭐.... 그냥 일렀지.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하지만 남궁 미려의 입장은 또 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문뜩 이신은 남궁세가를 미워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이신은 충이 아니다. 화산파의 차기 후계자인 제갈 사혁의 제자였다. 훗날 이신의 도호가 정해지면 이신은 화산파 대사형이 될 그런 사람이었다. 머리회전이 빠른 남궁 미려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눈치가 빠른 이신이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