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82화 (82/262)

<-- 82 회: 그 제자. -->

“미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충이 아니에요. 저는 이신이에요. 그리고 미워하면 안 되잖아요. 이런 말 하긴 조금 그렇지만......”

그 순간 남궁 미려는 남궁 소화를 떠올렸다. 이신과 가장 가까웠던 사이였고 그 아이 때문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제 집이잖아요. 자기 집을 미워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 말을 들은 남궁 미려는 조용히 이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줘서.”

늘 괄시만 당하던 그곳을 집이라고 불러준 이신이 너무 고마웠다. 설사 그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지금은 그저 고마웠다.

처음으로 제갈 사혁이 아닌 다른 사람과 떠나는 여행이었다. 제갈 사혁은 임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신에게는 세상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여행이었다.

흑사련의 손이 뻗은 곳이지만 남궁 미려는 광서성에 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틀 밤낮으로 달려온 마차에서 내린 남궁 미려는 곧바로 하오문을 찾았다. 광서성에 있다는 것만 알지 정확히 소도장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무림맹의 정보조직은 흑사련과 마교에 집중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 임무를 하달할 때는 목표물의 최근 행적만 표기할 뿐이다. 이럴 경우 대부분 하오문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남궁 미려가 주루에 들어간 뒤 점소이와 몇 마디를 나누자 곧 은밀한 밀실로 안내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지역의 하오문 책임자는 젊은 여성이었다.

같은 성별을 지닌 여인의 등장에 남궁 미려는 정보를 나눔에 있어 쓸 때 없는 흥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직감하고 식탁에 의뢰비용을 내고 상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쓰고 있는 면사를 벗어 얼굴을 보였다.

“무림에서 최고로 아름답다는 남궁 가의 아가씨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상대가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더 빨랐다.

“오늘 안에 소도장이 있는 곳을 알았으면 해요.”

“어제 만장(慢場)이라는 주루에서 묵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정보이니 그 주루가 있는 지역에서 얼마 가지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 모르죠.”

이야기가 막힘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자 하오문 책임자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남궁 미려는 뒤도 안돌아보고 그대로 떠났다.

“흑사련에 이 정보를 팔도록 하세요.”

하지만 남궁 미려가 직접 하오문에 온 것 자체는 크나 큰 실수였다. 하오문의 본질은 정보를 파는 장사치.

“남궁 미려라는 대어는 쉽게 낚이지 않는 법이죠.”

그들에게는 소도장의 정보를 팔아치우는 것보다 흑사련에게 남궁 미려를 팔아치우는 쪽이 더 남는 장사였다. 그것도 모른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오문에서 나온 남궁 미려는 루주의 한쪽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이신과 함께 만장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도주로를 차단해줘. 할 수 있지?”

“에....”

제갈 사혁이었다면 절대 이런 부탁은 하지 않기 때문에 이신은 남궁 미려의 부탁이 새로우면서도 어색했다.

만장이라는 주루에 도착하자마자 품에서 소도장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꺼내든 남궁 미려는 주루를 들쑤시고 다니며 초상화와 가장 비슷한 얼굴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기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술을 마시고 있는 소도장을 발견해낸 남궁 미려는 면사를 벗고 초상화와 소도장을 번가라가며 쳐다봤다.

“소도장?”

반면 소도장은 남궁 미려 같은 미인이 자신에게 말을 걸자 품에 안고 있는 기녀를 거칠게 밀쳐내고 아랫입술을 핥았다.

“호오~ 이 어르신에 품에 안기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냐? 어서 이리 와 안겨 보거라!”

뱀새끼처럼 혀를 내민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확인 절차가 꼭 필요한 만큼 다시 한 번 소도장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소도장?”

“그래. 이 어르신이 바로 그 소도장님이다.”

소도장은 거드름 피우며 여유를 부렸고 소도장임을 확인한 남궁 미려는 정색을 하며 소도장을 노려봤다.

“무림맹에서 왔다.”

“미친!”

소도장은 앞에 있는 식탁을 발로 차 남궁 미려를 향해 날렸고 검을 뽑아든 남궁 미려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식탁을 반으로 갈랐다. 그러는 사이 소도장은 2층에서 뛰어내렸고 그 순간 밑에서 대기하던 이신의 일격에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정말 잘했어!”

이신이 소도장을 한 번에 잡아버리자 이신이 대견스러운 남궁 미려는 이신을 꼭 껴안았다.

“에. 뭐.”

기뻐하는 남궁 미려와 달리 이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갈 사혁과 모든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이라면 아니 제갈 사혁이 잡는 인물들이라면 애초에 도망가지 않는다. 비록 임무를 따라간 경험이 양전 딱 한번뿐이지만 적어도 결투라는 과정이 있을지언정 도망이라는 과정은 있을 수 없었다.

“원래 이런 식이에요?”

“뭐가?”

순간 일이 원래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냐고 물어보려 했던 이신은 남궁 미려의 눈치를 살핀 뒤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니요. 사부는 조금 오래 걸리거든요.”

“당연하지 사혁하고 날 똑같이 판단하면 곤란해.”

그러면서 마치 누나라도 되는 양 미소를 지으며 이신의 코를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그럼 뒤처리를 해볼까.”

품에서 통을 꺼낸 남궁 미려는 소도장의 복부에 침을 놓은 후 침을 통해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뭐에요?”

“단전을 폐하는 거야. 침을 통해서 내공을 아무렇게나 주입하면 단전이 손상돼서 다시는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거든.”

그러한 방법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신은 남궁 미려가 달라보였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가요?”

자신이 옳고 자신만이 최고라 자부하는 제갈 사혁과 달리 배움에 관심이 많은 이신은 남궁 미려가 가진 기술에 관심을 보였다.

“별로 대단한 기술은 아니야. 그냥 복부에 침을 꽂고 아무렇게나 내공을 주입하면 돼.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엉망으로 내공을 주입하면 할수록 효과는 더 확실해.”

내공을 주입해서 상대를 치료하는 내가요상술에 반대되는 개념을 이용한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기술이었다.

소도장을 관아에 넘긴 후 남궁 미려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폈다.

“으으~ 역시 이 맛에 이 일을 한다니까. 이 만족감!”

제갈 사혁이 명예욕 청하가 선행이라면 남궁 미려는 자기만족. 오직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 일을 했다.

광서성에 도착한지 하루 만에 두 사람은 다시 마차를 구해 광동성을 빠져나가는 그때 갑자기 마차가 급정거를 하며 마차가 크게 흔들거렸다.

“무슨 일이냐!”

남궁 미려는 마부를 향해 신경질 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마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남궁 미려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하지만 앞에 아이가 있어서.”

아이라는 말에 마차에서 나온 남궁 미려는 길 가운데에 떡하니 누워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서둘러 아이에게 다가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꼬마야. 괜찮니?”

바로 그때였다. 남궁 미려가 쓰러진 아이의 몸을 돌리자 아이가 아닌 늙은 노파의 얼굴이 남궁 미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노파가 남궁 미려를 향해 입에서 연기를 뿜었다.

“!”

함께 그 연기를 들이마신 마부는 목을 괴롭게 움켜쥐며 그 자리에서 사망해버렸다.

“아가씨!”

서둘러 남궁 미려의 곁으로 다가온 이신은 미려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이 면사는 원래 특수 제작된 거니까.”

검은색이었던 면사의 색이 녹색으로 변하자 면사를 집어던진 남궁 미려는 자신에게 독 연기를 뿜어낸 노파를 노려봤다. 그러자 노파의 양 옆으로 다른 다섯 명의 검객이 다가왔다.

“남궁 미려. 감히 흑사련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구나!”

내공을 실은 외침이 사방에 울려 퍼지자 주위에 있는 소나무가 흔들거리며 솔잎에 떨어졌다.

“정체를 밝히시오!”

“공혈겸(攻血鎌).”

공혈겸이라 불리는 이들은 흑사련에게서는 알아주는 실력자들이었다. 남궁 미려가 광서성에 온 것은 불과 하루.

(어디서 정보가.....)

아무리 생각해도 하오문 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궁세가의 사람인 자신의 정보를 흑사련에 팔아넘길 리 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하오문은 아니야.)

하오문이라면 너무 뻔히 보였다. 하지만 그 뻔히 보이는 점을 역이용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남궁 미려였다.

“누가 보냈느냐?”

“어린 계집이 감히 누구 앞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느냐? 어른에 대한 예부터 갖춰라.”

노파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남궁 미려가 하대를 하는 것에 불 같이 화를 냈다.

“흑사련의 눈은 그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 말과 동시에 공혈겸 중 한명이 남궁 미려를 향해 거대한 쌍초겸(雙草鎌)을 휘둘렀다. 남궁 미려는 이신을 밀쳐내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낫을 손으로 쳐냈다.

“받아라!”

그 틈을 타 노파는 마비 독이 묻혀 있는 침을 날려 남궁 미려의 허벅지에 맞췄다.

노파가 던진 침이 보통 침이 아니라는 것은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토연토정(土烟土炡).

검을 집어넣은 남궁 미려는 두 손으로 땅을 내려쳐 거대한 먼지바람을 일으킨 뒤 도망쳤다.

흑사련의 무리들을 피해 도망치던 남궁 미려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노파까지 합해 총 여섯 명의 눈을 피해 흑사련의 구역인 광서성을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했다.

“가씨....”

(어떻게 해야 하지?)

“아가씨!”

정신을 차린 남궁 미려는 이신을 쳐다봤고 이신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도망가세요. 여긴 제가 막을 테니 도망가서 도움을 청하세요.”

남궁 미려는 이신이 막아보겠다고 하자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가씨라며 떠받들고 있지만 이 아이는 아직 열다섯이었다.

“안 돼! 내가 저들을 따돌릴 테니까 그 틈에....”

“더 이상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보세요. 제가 이렇게 힘을 주면 아가씨는 제 손을 뿌리치지 못해요.”

이신은 남궁 미려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어보였다. 여인의 몸이라고는 하나 무림인인 남궁 미려가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상대가 같은 무림인일 때다.

“답은 이미 정해졌어요. 선택을 망설이지 마세요.”

이신은 남궁 미려를 남겨둔 채 돌아온 곳으로 향했다.

앞을 향해 걸어갈 때마다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

안심이 됐다. 그 덕에 더 이상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소나무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자 다섯 명의 무사가 순식간에 이신을 감쌌다.

북해빙궁에서 난전을 겪었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자신의 옆에 사부가 있었고 사숙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곁에 아무도 없다. 제갈 사혁이 없다.

“사부....”

이신은 조용히 제갈 사혁을 떠올렸다. 제갈 사혁이라면 지금의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신기루처럼 제갈 사혁의 환영이 보였다.

(이 멍청아! 먼저 물어뜯어. 사냥하러 온 거지 사냥 당하러 온 게 아니잖아.)

망상이 만들어낸 제갈 사혁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힘을 주는 것만 같았다.

“선수필승!”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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