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84화 (84/262)

<-- 84 회: 그 제자. -->

흑사련의 무사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어째서인지 이신은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다가가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다섯 발 물러났다.

“어째서냐? 왜 죽이러 오지 않는 거냐! 내가 우습나?”

온 몸을 찢어발기며 자신을 사지(死地)로 내몰더니 이제는 목숨을 앗아가지 않고 뒤로 다섯 발짝이나 물러나는 저 기이한 행동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굴욕이었다. 이것은 철저한 굴욕이었다. 도저히 목숨을 보전할 길이 생겼다며 좋아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길은 스스로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지 상대의 배려나 변덕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이대로 살기 위해 도망쳐버리면 더 이상 그는 스스로를 무림인이라 말할 수 없었다. 비록 명예로운 삶은 아니었지만 비루하게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문 흑사련의 무사는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이신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더 이상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는 없었다.

이 숲속에는 오직 이신과 남궁 미려 단 둘 뿐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후 이신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신!”

이신이 쓰러지자 남궁 미려는 두 팔로 기어서 이신에게 다가갔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만들어낸 출혈이 멈출 줄 몰랐다.

제갈 사혁과 같은 이신이라면 자연적으로 치유를 해야 하지만 의식을 잃은 지금 자연적인 치유는 불가능했다. 제갈 사혁과 달리 이신은 운기조식에 들어가야만 상처가 아물기 때문이다.

남궁 미려는 서둘러 자신의 윗옷을 찢어 이신의 상처를 지혈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점점 추워지고 이신의 몸이 급격하게 차가워지자 남궁 미려는 필사적으로 두 손을 비벼가며 열을 만들어내 이신의 몸을 주물렀다.

밤이 되자 피 냄새를 맡은 늑대 무리가 시신을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거렸고 이를 본 남궁 미려는 자신의 검을 오른손에 쥐고 주위에 널려 있는 흑사련 무사의 검을 왼손에 쥔 채 늑대 무리를 주시했다.

우두머리 늑대가 탐욕스러운 이빨을 드러내자 남궁 미려의 검 끝에 예기(銳氣)가 흘렀다. 그러자 우두머리 늑대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남궁 미려를 쳐다보기만 했다. 비록 미물(微物)에 불과하지만 야생의 감으로 남궁 미려의 기세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짐승 주제에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지 마!)

한순간이라도 허점을 보인다면 늑대들은 일제히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단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늑대 무리와 대치를 하고 흑사련 무사들의 시체로 배를 채운 늑대들은 새벽의 안개처럼 사라졌다. 늑대 무리가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남궁 미려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검을 내려놓았다.

“후우~”

왼손에 쥔 검을 내려놓은 남궁 미려는 무릎에 눕힌 이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늑대와 대치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마지막 남은 그 흑사련의 무사와 싸울 때 이신이 그를 죽이지 않았던 건 다섯 발짝 이상 떨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이건 또 무슨 난리야.”

늑대 무리가 물러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남궁 미려와 이신을 발견하고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찼다.

“아주 난장판이네~”

남궁 미려는 남자를 경계하며 왼팔로 속옷차림인 상체를 가렸다.

“아~ 기다려 여자 불러 올 테니까.”

흑사련의 영토기 때문에 적이라고 생각 했지만 남자는 오히려 자신의 윗옷을 벗어서 남궁 미려에게 던져주었다.

“소류(小流)사매 이리 좀 와봐.”

“무슨 일인데 사형?”

“저기 쟤 놈 어떻게 해봐. 다리가 맛이 갔나봐.”

남자의 부름에 곧 30대 초반의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남궁 미려를 부축했다. 그리고 여자를 뒤따라서 온 50대 중반의 남성은 부축 중인 남궁 미려를 알아봤다.

“남궁 미려군. 그럼 이 녀석이 이신이다. 데려가라.”

이신을 데려가려 하자 소류라는 여성에게 기대고 있던 남궁 미려가 마비된 두 다리를 가누지 못한 채 이신을 데려가려는 남자를 제지했다.

“당신들 누구야?”

“사매 얘 좀 어떻게 해봐. 요즘 애들은 속옷차림을 해도 부끄럽지 않나봐 아주 천방지축이네.”

남자가 또 다시 자신의 사매를 부르자 소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부축하려 했지만 남궁 미려는 검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누구냐니까?”

“화산파 속가제자 동문회 화산지회(花山之會)다.”

화산파 속가제자 동문회라는 말에 남궁 미려는 갑자기 눈이 풀리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공 선배가 점혈했수?”

소류가 공 선배라 불린 50대 중반의 남성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화산지회라는 말에 긴장이 풀려 기절했다.”

“그나저나 이 새끼들 흑사련 같은데 누가 다 죽였을까요? 설마 이신은 아니겠죠? 걔 아직 열다섯이잖아요. 역시 남궁 미려가?”

늑대가 시신을 훼손 시켰지만 전부 늑대에게 물려서 죽은 게 아니라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건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남궁 미려가 이렇게 했다면 새로운 여고수의 등장이고 이신이 이렇게 했다면.....”

“했다면?”

“무진이 놈 대가리를 깨서라도 내 손자 놈을 그 놈 밑으로 집어넣겠어.”

확실히 이신이 이 난장판을 만들었다면 이신의 스승인 제갈 사혁의 제자가 될 경우 그 결과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였다.

“아들 낳으면 나도 사혁이 놈 멱살 잡고 협박이나 해볼까. 선배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놈이니까 될 것 같기도 한데?”

“난 싫어.”

“왜 그래 사매?”

말하는 것으로 보아 30대 남성과 소류는 부부사이인 듯 했다.

“보라고 사형. 열다섯 살이야. 겨우 그 나이에 이 정도 아수라장을 만들었다면 그건 괴물이잖아. 난 적당히 무공 가르쳐서 우리 아이 평범하게 키울 거야. 딴 생각하지 마.”

남자는 아깝다는 표정을 짓더니 흑사련 무사들의 기괴하게 꺾이고 찢겨져 나간 시신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사매 이걸 봐. 이거야 말로 남자들의 꿈이잖아.)

이신이 의식을 회복한 건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후였다.

“이제 일어나냐?”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이었다.

“사부 머리카락이 왜 그래요? 끝이 하얗게....”

이신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리키자 제갈 사혁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지나자 원기를 되찾고 다시 검게 물들었지만 여전히 머리카락 끝은 하얗기 때문이다.

“뭐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됐어.”

“그럼..... 얼굴은 왜 그래요?”

제갈 사혁의 왼쪽 눈은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평소의 제갈 사혁이라면 얼굴에 멍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냥 뭐 사숙한테 몇 대 맞았지.”

이신이 무림맹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자 화산지회를 통해 이신을 찾도록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도오진인이었고 이신이 어떻게 된 줄도 모르고 껄렁껄렁하게 한량처럼 무림맹에 기어들어온 제갈 사혁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도오진인의 주먹이었다.

“사람을 죽였어요.”

“!”

이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제갈 사혁에게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마치 언제까지 어릴 줄만 알았던 아들의 충격적인 탈선 고백을 듣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복호백열격 성공했어요.”

“?”

갑자기 복호백열격이라니?

“뭐?”

제갈 사혁은 당최 이 대화의 분위기를 읽을 수가 없었다. 첫 살인을 했는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어딘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너 괜찮냐? 사람을 죽였다며?”

“그게 왜요?”

그게 왜요? 라니 이 반응은 또 무엇이고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꼭 널 보는 것 같았어. 난 네가 싸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꼭 이신이 아니라 네가 싸우는 것 같았어. 제갈 사혁.)

이신이 싸우는 모습이 꼭 자신을 연상케 했다는 남궁 미려의 말이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 건 왜일까?

“쉬어라.”

“네. 사부.”

그러고 보니 무림맹에 들어왔을 때 도오진인이 분명 이렇게 말한 것도 기억이 났다.

(신이는 기수식을 잡지 않더구나. 꼭 네 녀석처럼 말이야.)

당최 감을 잡을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제자의 회복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 시각 남궁 미려의 숙소에서는 남궁 선중이 와있었다. 과일 한 바구니를 들고 온 남궁 선중의 표정은 꼭 어디서 얻어맞고 들어온 남동생을 보는 그런 표정이었다.

늘 그랬다. 분명 여동생인데 단 한 번도 여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남궁 선중에게 남궁 미려는 그냥 남동생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이번에야 말로 무림맹에서 빼오겠다며 아주 아버지를 쥐어짜시더구나.”

“할아버진 오빠보다 날 더 귀여워하셨으니까.”

남궁 선중은 남궁 미려를 한번 쳐다보더니 갑자기 천장을 올려다봤다. 꼭 무슨 말을 뜸들일 때마다 보이는 남궁 선중의 버릇이란 걸 모를 남궁 미려가 아니었다.

“이신이 너를 구했다고 들었다.”

“.........”

“사실이냐?”

“오빠는 이신이라고 하네. 나는 줄곧 충하고 이신을 헷갈렸는데.”

춘풍지회에서 흑비로 분한 제갈 사혁과 싸우던 이신의 모습을 본 남궁 선중에게 이신은 더 이상 충이 아니었다. 아마도 남궁세가에서 가장 먼저 이신의 변화를 받아드린 사람은 남궁 선중일 것이다.

남궁 미려는 여태까지 오빠를 단순히 무공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공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도량(度量)의 차이가 컸다. 그걸 지금에 와서 느끼다니.... 아니 지금이라도 느꼈으니 다행이었다.

“나 이제 선 안볼 거야.”

“그래.”

또 쉽게 이해해버렸다. 오빠에게 왜? 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흐린 남궁 미려는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자신의 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검 집에서 검을 꺼내 보이며 남궁 선중을 쳐다봤다.

그 순간 남궁 미려의 검에는 검기가 서렸다. 원래 검기 정도는 발현할 수 있지만 검기에 단순히 내공이 아닌 자신만의 감정을 서리게 했다. 진정한 의미의 검기인 것이다.

“오라버니.”

저 아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저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그래.”

남궁 미려는 갑자기 남궁 선중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십년 동안 이 아이의 오빠였던 남궁 선중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남궁 선중이 아니었다.

뛰어넘어야 할 벽. 그리고 그 대상을 자신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남궁 선중은 기분이 묘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마.”

남궁 선중은 자신이 사온 과일 바구니에서 배를 꺼내 한입 베어 물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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