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회: 그 스승. -->
이신의 병문안을 끝낸 뒤 제갈 사혁은 평소와 다름없이 임무를 뒤졌다. 그런데 그날은 참 특이한 날이었다.
(경호임무?)
4급 임무 중에 경호임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보통 무림맹의 출사들이 맞는 임무는 범죄자나 사파와 마도의 인물을 잡는 일이 대부분이다. 특수한 임무로는 납치조사 살인사건 재해복구 등이 있다. 모두 사건이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경호임무는 어디까지나 사건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무림맹의 임무 열람판에 존재할 수 없었다.
“별일이네.”
하지만 그럼에도 존재했다. 등급은 4급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였다. 가끔은 이런 일도 나쁘지 않았다. 사문의 평판도 오르지 않고 개인의 명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흔히 들어오지 않는 그런 종류의 임무.
다음날 새벽 제갈 사혁은 일찍 일어나 짐을 꾸렸다.
“오랜만이네 직접 짐 꾸리는 것도.”
혼자 떠나는 여행길이 낯설지는 않았다. 화산의협이라 불렸을 그 무렵에는 항상 혼자 다녔기 때문이다.
대충 짐을 꾸린 제갈 사혁은 기지개를 펴며 무림맹의 대문을 걷어찼다.
“천천히 가볼까.”
사천은 정파의 중심임과 동시에 중화요리의 성지기 때문에 사천으로 들어오는 상인들만큼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상인들이 많다.
사천 어느 시장 구석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감숙(甘肅)행 마차를 발견하고 마부에게 정중히 합승의사를 밝혔다.
“마차 좀 얻어 탈 수 있습니까?”
“무림인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난주(蘭州)까지만 갑니다.”
“난주까지면 됩니다.”
보통 무림맹에서 임무를 맡은 출두사들이 이렇게 상인들의 마차를 얻어 타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출두사들은 출사들에 비해 받는 임금이 적기 때문에 마차나 말을 따로 구입해서 타고 갈 돈이 없다.
“그럼 타십시오.”
상인들 역시 쟁자수나 다른 사람을 돈 주고 고용하지 않아도 되니 자연스럽게 무림맹의 무림인들과 상인들은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
감숙까지 가는 마차를 얻어 탄 제갈 사혁은 쇠로 되어 있는 커다란 상자 위에 누워 팔자 좋게 눈을 붙였다.
“소협.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마차를 얻어 타고 있지만 상인과 무림인 중 누가 갑과 을이냐 따지면 무림인 쪽이 갑이라 할 수 있었다.
목적지가 감숙인 상인은 많지만 목적지가 감숙인 무림인은 찾기 힘들다. 이런 공짜 손님을 못 태우면 상인은 돈을 지불해 쟁자수를 고용해야 한다. 그렇기에 상인은 제갈 사혁의 눈치를 살폈고 그런 그의 의도를 알아챈 제갈 사혁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얻어 타는 주제에 불편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를 얻어 타는 동안 이리떼도 만나고 또 난주지역이 가까워지자 제갈 사혁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산적도 만날 수 있었다.
“이 어르신은 이 산의 주인인......”
“닥쳐 새꺄!”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한껏 분위기를 잡던 산적은 제갈 사혁의 무식한 주먹 한방에 앞니가 나가버렸다. 기세등등하던 산적은 땅에 떨어진 자신의 성치를 보고 한 번 제갈 사혁의 허리에 찬 검을 보고 두 번 생각했다.
(망했다!)
산적은 재빨리 무릎을 꿇고 제갈 사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제갈 사혁은 쭈그려 앉아 산적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야.”
“말씀 하십시오.”
“돈 좀 있냐?”
실로 강호에 출두한지 근 반 년 만에 만나는 오다가다 걸리는 한 놈이었다.
“어... 없습니다.”
“왜 없어?”
왜 없어라니 질문도 참 거지같았다. 산적은 그 순간 평소에는 굴러가지 않는 머리가 척척 굴러갔다.
“살려만 주십시오. 정말 돈이 없습니다!”
산적이 생각한 제갈 사혁은 때리는 사람이지 죽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산적을 만나면 왕처럼 자신의 힘으로 군림하려할 뿐 백정처럼 다짜고짜 죽이지 않는다.
“팔자도 더럽지 하필 걸린 놈이 너 같은 놈이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판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딱히 제갈 사혁도 재미로 돈을 빼앗으려는 거지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려고 산적을 상대로 금품갈취를 하는 건 아니다.
“이런 게 전문용어로 역관광이야. 알았냐? 알았으면 그냥 집에 가라.”
“감사합니다. 대협!”
제갈 사혁이 목숨을 살려주자 산적은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쳤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제갈 사혁을 보며 상인은 의외란 듯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여태까지 상인이 만나본 무림인들은 전부 산적을 만나면 검을 뽑아들고 싸웠기 때문이다.
“제가 이상해보이십니까?”
“보통 산적을 살려 보내는 무림인은 없잖습니까.”
상인의 눈빛을 대강 읽었기 때문에 이상하냐며 묻자 상인은 기다렸다는 듯 속내를 말했다.
“사람 죽여 본 놈 눈이 아니었습니다.”
“구별이 가능하십니까?”
눈만 보고도 살인자인지 아닌지 구분을 해낸다니 아무리 무림인이지만 뜬금없었다.
“거울 보면 답이 나옵니다. 저 놈 눈이 내 눈이랑 똑같이 생겼는지 아닌지 그것만 보면 됩니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지만 일반인인 상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종류의 농담을 건네는 제갈 사혁에게서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난주에 도착하자 제갈 사혁은 목적지로 향했다.
“이곳인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니 경호임무를 무림맹에 부탁한 곳은 다름 아닌 도장이었다. 도장이란 문파라 불리기 조금 부족한 곳이지만 어찌됐든 무력을 키워나가는 곳이다. 상식적으로 경호임무 같은 걸 필요로 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대문도 반쯤 열려 있었다. 누가 들어와도 문제없다는 듯이......
“그래도 뭐 여기까지 온 김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기와부터 문풍지까지 잘 관리 된 저택이 눈에 보였다.
“누구십니까?”
노년의 학사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옷차림에서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로 보아 집사나 총관 쯤 되는 자였다. 제갈 사혁은 그의 옷차림을 아래에서 위로 한번 훑어봤다. 그 집의 하인을 보면 그 집 숟가락 개수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가죽신은 오늘 새로 만든 것처럼 가죽의 주름이 살아 있고 인두로 잘 다림질이 된 옷에서는 날카로운 선이 보였다. 만약 이곳이 어떠한 문제가 있거나 가세(家勢)가 기울고 있다면 절대 보일 수 없는 옷차림이었다.
“무림맹에서 왔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노(瀚老)라고 불러주십시오.”
한노의 안내를 받아 경호대상인 이 도장의 관장에게 간 제갈 사혁은 문뜩 저택의 기둥을 보았다. 지네 한 마리를 연상케 하는 균열이었다. 균열이야 살다보면 생길 수 있는 거지만 황토로 지은 저택에 균열이 생겼다면 이는 관리 소홀로 볼 수 있었다. 제갈 사혁은 곧바로 저택의 다른 곳도 둘러보았다.
“관장님 호위무사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세요.”
놀랍게도 관장이라는 자의 목소리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젊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연 한노는 제갈 사혁에게 먼저 들어갈 것을 권했고 제갈 사혁은 대수롭지 않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한노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손에는 무공서를 들고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주먹을 쥐었을 때 손마디 사이사이에 보이는 굳은살은 결코 그녀가 허투루 무공을 연마하지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선우(性慧)도장의 관장을 맡고 있는 성혜(性慧)라고 합니다.”
정면으로 바라본 성혜는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첫인상 하나로 판단한 성격은 고집 있을 것 같아보였다.
“무림맹에서 온 무진입니다.”
본명을 밝힐까도 싶었지만 이신이 옆에 없는 김에 신분을 숨겨 뭐 어떻게 해보자는 심리도 조금 작용했다. 하지만 다른 걸 다 떠나서 솔직히 말해서 이곳의 첫인상은 이상했다. 무림맹에 굳이 경호를 부탁한 점과 집사의 단정하고 빈틈없는 옷차림 하지만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저택에 여인이 운영하는 도장이라니 뭔가 정상적이면서 동시에 비정상적인 그런 곳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이야기 나누죠.”
역시 이상했다. 이곳은 어딘가 굉장히 이상했다.
집사를 고용할 정도의 집안이라면 차 같은 건 하인을 통해서 내오는 게 일반적이지만 직접 차를 탔다. 직접 차를 타는 솜씨 또한 능숙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어가기에는 명문가에서 나고 자란 제갈 사혁에게 이래저래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경호를 수행해주셨으면 합니다. 현재 저는 목숨을 위협 받고 있습니다.”
“누가 목숨을 노리고 있는지는 아십니까?”
“장초랑(樟樵郞)입니다.”
“그자.....”
순간 그를 죽이면 일이 끝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제갈 사혁은 재빨리 생각을 바꿨다.
“.....에게서 보호해드리면 되는 겁니까?”
“그리고 한시도 제게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밀착경호는 조금 까다로웠다. 특히 상대가 여자면 더더욱.
그날부터 제갈 사혁은 성혜의 옆방에 머물며 그녀를 경호하기 시작했다.
“합!”
이른 아침이면 선우 도장은 문하생들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장 문하생들 중에 초심자는 있지만 대충하는 얼뜨기는 없었다. 모두 열심히 무공을 익히고 여인이 운영하는 도장이라 하여 기강이 잡히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기강도 확실하게 잡혀 있었다. 한마디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도장이었다.
“지루하시면 같이 수련해보심이 어떠십니까?”
한노가 기둥 근처에 기대고 있는 제갈 사혁에게 도장 문하생들과 함께 수련할 것을 권했지만 제갈 사혁은 경호를 핑계로 정중히 거절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성혜는 어디 있나? 나 장초랑이다!”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기에 경호를 하고 있는 거지만 정작 당사자가 대문으로 당당히 걸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제갈 사혁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제갈 사혁은 아침에 머리 감는 것도 잊은 채 떡진 머리로 방을 나섰고 저택의 마당에서 장초랑과 마주했다.
장초랑은 엄청난 거구였다. 때문에 장초랑이 들어온 대문은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박살 난 상태였다.
“오호라 성혜의 호위무사가 네놈이구나.”
난주의 이름난 고수라던데 장초랑에게서는 무림인 특유의 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무림맹에서 놀고 있는 놈팽이 출두사 놈을 하나를 데려다놔도 기감이 느껴지는데 장초랑에게서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지역의 고수라고 하면 무림맹 놈팽이보다 나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몸은 그냥 무식하게 단련한 듯 근육이 울퉁불퉁 위화감을 주지만 눈에 보이는 게 다였다.
“무슨 일입니까?”
때마침 성혜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제갈 사혁은 정중하게 장초랑에게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십시오.”
그런데 고개를 숙이자마자 장초랑이 제갈 사혁을 발로 차 마당 끝으로 날려버렸다.
제법 힘은 있다만 그게 다였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 사혁은 성혜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죽여도 됩니까?”
“네?”
지금 제갈 사혁의 머릿속에는 어차피 저 놈 죽이면 이번 임무는 끝난다. 라는 생각 밖에 없었다.
떡진 머리를 긁적거리며 장초랑을 올려다본 제갈 사혁은 주먹을 힘껏 쥐고 장초랑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냥 죽어라.”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가면을 뒤집어 쓴 흑의인이 나타나 제갈 사혁의 주먹을 흘려내더니 그대로 힘을 역이용해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중심을 바로 잡고 경신법을 활용해 사뿐하게 지면에 안착했다.
정작 경호대상을 노리는 장초랑은 보잘 것 없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가면 뒤집어쓰고 튀어나온 놈은 고수였다.
“어쭈구리? 요것 봐라.”
============================ 작품 후기 ============================
어제 모든 수정작업을 끝내고 드디어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100여편 정도 있었는데 노블레스를 읽는 분들을 위해 용량정리를 했습니다.
하고보니 100편이 안되더군요.
작품삭제를 굉장히 많이 했기 때문에 어쩌면 신규 업데이트 노출이 안될 수도 있지만 뒤에 읽을 분들이 편하게 읽으셨으면 하기 때문에 저도 신규 노출을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어쩌면 멍청한 짓을 했을 수도 있지만 하기로 마음먹으면 해야하는 성격이라서 저질러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