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회: 그 스승. -->
제갈 사혁은 왼팔을 뻗어 상대의 시아를 가린 후 아래에서 위로 곡선을 그리며 발차기를 날렸고 범상치 않은 발차기임을 깨달은 흑의인은 몸을 숙여 공격을 피했다.
“혜성 소저.”
“성혜입니다.”
“죄송합니다. 성혜 소저 누가 장초랑입니까?”
갑자기 장초랑이 누구인지는 왜 묻는 걸까? 이상한 사내였다.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걸까?
“장초랑은 없습니다.”
“?”
순간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장초랑이라고 찾아온 놈이 사실은 장초랑이 아니라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
“다 죽여 버리면 뭐가 되든 되겠네.”
낙영장법(落英掌法).
엄청난 내공을 단숨에 낙영장법에 담아 펼치자 저택의 담벼락이 박살나며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사태파악이 되지 않는다면 사태파악을 안하면 그만이었다. 제갈 사혁은 성혜를 경호를 하기위해 이곳에 온 사람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장초랑이건 아니건 임무에 방해된다면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게 제갈 사혁의 방식이었다.
스스로를 장초랑이라 밝혔던 거구의 사내는 온몸에 혈관이 터져 죽었고 흑의인은 겨우 겨우 장타를 피해내 부상을 입고 도망쳤다.
원래 장법이라는 게 주먹으로 쓰는 내격권보다 쉽게 내상을 입힐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제갈 사혁처럼 공격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그 강도가 약해지지만 내공을 얼마나 주입하느냐에 따라 위력의 차이는 줄어들게 된다.
“성혜 소저 제가 말해주지 않은 게 있으면 지금 말씀해주십시오.”
제갈 사혁은 생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악귀처럼 섬뜩했다.
제갈 사혁이 선우 도장의 대문과 담장을 무너트렸기 때문에 도장 문하생들은 아침부터 도장에 나와 담장을 쌓는 일에 투입되었다.
“차 맛이 아주 좋군요.”
“.......”
성혜와 한노는 체념한 듯 제갈 사혁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장초랑은 한명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성혜는 어느 책 한권을 꺼내서 제갈 사혁에게 보여주었다. 그 책은 낡은 무공서였다.
“여행 중에 찾는 무공서입니다.”
기연이란 무림에서 흔하다면 흔했다. 제갈 사혁만 해도 흡정마공과 백년 하수오를 얻었기 때문이다.
“저희 집은 원래 그렇게 대단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숙부님께서 상단으로 업종을 바꾸셨죠. 그런데 그 숙부님도 5년 전에 돌아가시고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저는 모든 재산을 처분해 소비생활만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 무공서를 얻게 되고 성씨 가문의 가업이었던 도장을 다시 열었습니다.”
제갈 사혁이 보았던 저택의 오래된 균열이나 집사인 한노의 말끔한 옷차림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부조화는 가세(家勢)가 기울어버린 집안이 다시 일어나는 과정에서 생겨난 모순이었다.
“무공서를 만든 저자의 성을 따 도장의 이름을 선우라 짓고 집안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뭐 정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공서의 무공은 너무 뛰어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됐습니다.”
폐쇄적인 문파와 달리 개방적인 도장은 돈만 내면 누구나 무공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세간에 노출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것까지는 그리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요. 문제는 그것부터였습니다. 도장의 관장인 제가 여자라는 사실이죠.”
“어째서입니까?”
“어느 날 소문이 돌았습니다. 선우 도장의 관장을 꺾는 자는 비급을 얻게 되고 저를 부인으로 삼을 수 있다는 소문이 말이죠.”
비급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관장인 그녀를 부인으로 얻을 수 있다? 땀내 나는 남정네가 만들어냈을 법한 소문이었다. 비급은 그렇다 치고 결혼이라니 얕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후부터였습니다. 도장을 깨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제 손으로 쓰러트렸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모두 하나 같이 장초랑이라는 이름을 대고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도장을 깨러 온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 같은 이름을 대고서 나타난다면 필시 위화감이 생길만도 했다.
“그럼 그 흑의인은 누굽니까.”
“그게 바로 가장 큰 의문입니다. 장초랑이라는 이름을 대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저는 상단을 통해 실력이 검증된 호위무사를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호위무사를 대신해 장초랑을 쓰러트리면 꼭 그자가 나타났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결국 그 어느 곳에서도 호위무사를 고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호위무사를 고용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던 셈이었다.
“무림맹을 통한 실력 있는 무림인이 필요했습니다.”
“일단 경호임무는 계속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무진 소협. 계속해주시는 겁니까?”
한노는 계속 경호를 해주겠다는 제갈 사혁의 두 손을 붙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죠.”
제갈 사혁의 성격상 한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그 결과는 이뤄내야 했다.
“무공서를 한번 읽어봐도 괜찮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이 부탁을 거부하겠지만 제갈 사혁의 실력을 본 성혜는 제갈 사혁에게 무공서를 건네주었다.
선우라는 사람이 썼다는 그 문제의 무공서를 한참동안 읽은 제갈 사혁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혹시 이걸 찾았을 때 다른 건 없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비급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뻐서 이것만 들고 나왔습니다.”
하긴 눈앞에 비급이 있는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 무공서를 끝까지 읽어보셨습니까?”
“네.”
“이상한 점은 못 느끼셨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이 무공서는 하나의 완벽한 무공서가 아닙니다. 분명 다음권이 있을 겁니다.”
다음권이 있다는 말에 성혜의 표정은 심각해졌고 그것은 제갈 사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성혜가 가지고 있는 비급은 초식 위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다음권의 내용이 내공심법이나 기공위주로 되어있다는 뜻이었다. 이게 만약 추측대로 정말 다음권이 존재한다면 예를 들어.....
“그 다음권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면 선우 도장의 문하생들이 펼치는 초식만 봐도 근간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 흑의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배후가 따로 있을 수 있었다.
두 권으로 추정되는 비급 그리고 알 수 없는 방문자.
흑의인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걸 4급 임무라고 걸어놨으니 무림맹의 일처리 방식이 허술하다는 증거였다. 또한 제갈 사혁은 제갈 사혁대로 정체와 실력을 숨기며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다.
(이신이 없는 이때야 말로 나의 꿈을 실현시킬 좋은 기회였는데!)
일단은 흑의인의 정체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흑의를 입고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 쓴 꼴이 흑호를 떠올리게 했다.
(이번에도 가면 뒤집어 쓴 놈이냐.)
실제로 가면을 쓴다는 건 정체를 숨길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봐야했다.
아침에 그런 일이 있었지만 도장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성혜는 관장으로서 문하생들을 가르치고 제갈 사혁은 옆에서 성혜를 경호했다.
하루는 시장에서 장을 보았는데 시장 상인들은 성혜를 보자마자 저마다 친근하게 한마디씩 말을 건넸다.
“관장님 오셨습니까.”
“오늘도 어여쁘십니다.”
“아이고~ 우리 성혜 아가씨 오셨네!”
대체로 마을에서 성혜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다. 주위 사람들의 태도를 보나 성혜의 인품을 보나 원한 살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무진 소협은 돼지고기와 닭고기 중에 어느 게 입에 맞으시죠?”
뜬금없이 좋아하는 고기 종류를 묻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저었다.
“고기를 가리는 건 사내가 할 짓이 아니죠.”
고기면 다 좋다는 말에 성혜는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전부 구입했다. 그러자 갑자기 한노가 팔꿈치로 제갈 사혁의 골반을 찔렀다.
“관장님이 저렇게 들떠 계신 모습은 오랜만에 봅니다. 무진 소협께서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있는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도장에서 관장 일을 하면서 말투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 신경 쓰던 성혜와 지금의 성혜는 조금 달라보였다.
“집사 아저씨 아~”
“아이구! 관장님 소인은 이제 이빨하나 건사하기도 힘듭니다.”
성혜가 당과를 권하자 한노는 난색을 표하며 한사코 거부했지만 기어이 한입 물수밖에 없었다.
“지나갑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성혜가 있는 길 한가운데 마차가 다가오자 제갈 사혁은 재빨리 성혜를 보호하려 두 팔을 뻗었다.
“위험합.....”
제갈 사혁이 성혜를 잡아당겨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순간 성혜는 가벼운 움직임을 보이며 마차를 피했고 그만 성혜를 잡기 위해 길 한가운데로 몸을 날린 제갈 사혁만 마차에 치이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무진 소협?”
“모... 몸 하난 튼튼합니다.”
결국 선우 도장에 도착했을 땐 도장 문하생들의 부축을 받고 돌아와야 했다.
“도대체 왜 길 한가운데 뛰어드신 거예요?”
그녀도 몸을 단련했다는 사실을 잊고 연약한 여인 취급을 하며 남자답게 그녀를 구해주려 했던 제갈 사혁은 창피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에 밟힌 건 둘째 치고 쌀을 실은 마차가 깔고 지나갈 때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제갈 사혁이 마차에 깔렸을 당시를 떠올린 한노는 생각만 떠올려도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성혜는 두 손을 마주잡고 진심으로 제갈 사혁을 걱정하며 구입한 식재료를 가지고 부엌에 들어갔다.
다음날이 되자 제갈 사혁은 대수롭지 않게 성혜의 방문 앞에 서서 경비를 서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문하생들이 제갈 사혁에게 다가왔다.
“그 큰 사고를 당하셨는데 괜찮으십니까.”
“역시 진짜 무림인은 다르군요.”
문하생들은 대부분 이 지역 장사꾼들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무림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천지일기공(天地一氣功)을 수련하면 됩니다.”
대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은 그럴 듯한 변명으로 넘겼다.
“천지일기공이면 화산파 내공심법이 아닙니까?”
“화산파 속가제자셨습니까? 3대 제자셨습니까? 2대 제자는 아니시겠죠?”
갑자기 속가제자에서 3대며 2대며 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제갈 사혁은 혼란스러웠다.
“속가제자는 3대 제자 2대 제자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보무제자가 4대 선검수가 3대 평검수가 2대 뭐 이런 거 아닙니까?”
무림에 깊게 관여한 사람이 아니면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스승이 한 문파의 장로직이나 그에 준하면 그 제자가 1대 제자가 됩니다. 만약 보무제자의 스승이 문파의 장로라면 1대 제자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스승보다 높은 분이 계셔서 그 분이 제자를 키우면 그 제자가 1대 제자가 돼서 스승과 동격이 됩니다. 그럴 경우 나이에 상관없이 사숙이 됩니다. 여러분으로 따지면 여러분은 성혜 관장님의 제자니까 선우 도장의 1대 제자가 되시는 거죠.”
선우 도장이 위세가 대단한 도장은 아니지만 1대 제자라는 호칭에 문하생들은 기분이 묘해졌는지 오늘 따라 수련용 목인(木人)을 때리는 소리가 우렁찼다.
“화산파 분이셨군요.”
신분은폐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제갈 사혁은 한노의 물음에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답해주었다.
“천지일기공의 구결을 적어서 드리겠습니다. 잘 써주십시오.”
“정말입니까? 듣기로는 문파의 무공을 함부...”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래 널리 공개한 심법이라 문제없습니다.”
공개했다지만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아 천지일기공의 사본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오죽하면 명문정파의 공개된 내공심법을 돈 받고 가르쳐주는 심법사라는 직업까지 생겼을까.
밤이 되자 제갈 사혁은 천지일기공의 구결과 묘리를 적기 시작했다.
“호황이 명검은 명검이란 말이야. 손질을 그렇게 안했는데 무뎌지지 않았단 말이지.”
무명천으로 검을 닦는 제갈 사혁의 손길은 여인의 머릿결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무진 소협.”
갑자기 성혜가 인기척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깜짝 놀라 호황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던 무명천이 잘라졌다. 거짓말 조금보태서 호황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도 닿으면 잘라내는 명검이다. 그래서 무명천으로 조심스럽게 닦고 있었는데.
“성혜 소저 무슨 일이십니까?”
“자... 잠깐만요. 지금 붓이 혼자 움직였죠?”
붓이 혼자 움직였다는 성혜의 말에 제갈 사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피곤하신가봅니다. 제 두 손은 검을 손질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붓이 혼자 움직입니까.”
“아니요. 제가 방금 똑똑히 두 눈으로 봤다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연합회 초대장이 와서요.”
“연합회가 뭡니까?”
연합회는 난주 지역 관장들이 모이는 모임을 뜻했다.
“어디든 제가 동행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것 때문에 오셨습니까?”
“아.... 그렇죠.”
그녀는 사실 이번에 처음 연합회 초대를 받았기 때문에 약간 들떠있는 상태였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제갈 사혁의 시큰둥한 반응은 성혜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부은 격이었다.
“그럼 내일 봐요.”
성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지만 그걸 눈치 챌 제갈 사혁이 아니었다. 성혜가 나가자 제갈 사혁은 반으로 잘라진 무명천을 잘 포개서 다시 호황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천지일기공도 거의 다 끝나가네.”
하지만 여전히 두 손은 호황을 손질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번편의 주제를 살짝 노출하자면 말입니다. 기연입니다.
여기서 몇글자 더 붙이면 왠지 다음편 읽으시는데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말씀은 못드리지만
아무튼 기연입니다. 뻔하게 제갈 사혁의 기연은 아니고요.
무협하면 기연인데 기연이 가장 카타르시스도 잘 느낄 수 있고 그러다가 문뜩 어떤 생각이 들어서 이번 편을 구상했습니다.
그리고 노블레스로 전환하고 나서 빠져나가는 선작에 솔직히 멘탈에 금이 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 목표는 출판이었고 그게 가능해진 지금은 완결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글을 그렇게 잘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끈질기게 그리고 재미있게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