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90화 (90/262)

<-- 90 회: 그 스승. -->

천곤지사가 흑의인의 가면을 벗기자 한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제갈 사혁을 일격에 제압하고 천곤지사와 여러 사람들을 조종해 장초랑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흑의인의 정체.

“역시 짐작했던 데로......”

이 모든 걸 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좋다면 필시 이 정도 나이는 먹었을 것이라 모두 예상한 바였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오.”

상대의 연배를 생각해서 모든 심문은 천곤지사가 맡았다.

“만공(萬工)이다.”

본명은 아닌 것 같지만 별호라고 해도 짐작 가는 인물이 없어 그리 유명한 자는 아니었다.

“장초랑이라는 이름을 대서 성혜 소저를 괴롭힌 이유가 무엇이오. 왜 하필 장초랑이었소?”

“이유는 없다. 단지 장초랑이라는 이름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구실점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결국 장초랑이라는 이름은 정체불명의 하나의 인물 혹은 단체에 의해 지속적인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혜에게 가르쳐주기 위한 경고의 의미인 셈이다.

“성혜 소저가 그대에게 위협 받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오?”

“여기서부터는 제가 심문하겠습니다.”

성혜가 직접 나서자 천곤지사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역시 이런 것은 당사자가 직접 풀어하기 때문이다.

“선우 도장의 관장을 꺾는 자는 비급을 얻게 되고 그녀를 부인으로 삼는다. 이 소문을 낸 사람이 혹 대협이십니까?”

모든 일의 원흉임에도 불구하고 성혜는 대협이라며 만공이라는 노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만공은 성혜의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죠.”

짚이는 것이 있기 때문에 질문은 의문형이 아니었다.

성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공서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사정을 듣고 싶었다.

“모든 것은 소저가 내 처소에서 비급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네. 저는 분명 지난 날 난주 돈황을 여행하던 중 이 비급을 사막의 동굴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대로 듣고만 있으면 성혜가 만공의 처소에서 무공서를 훔쳤다.라는 이야기로 그냥 결론이 날 수 있었다. 그리고 비급을 훔치는 것은 강호무림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대죄.

“하지만 그 동굴에는 관 한 짝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관을 보고서 관속에 무공서의 주인이 잠들어 있을 것이라 그리 생각했습니다.”

“소저 그대 말이 맞다. 성혜라 했던가?”

“네.”

“하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 관은 미리 준비해둔 내 것이 맞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홀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혜는 동굴에 있는 관만 보고서 무공서의 주인이 죽었다 판단해 나와 버린 것이고 실제로 무공서의 주인은 죽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제갈 사혁도 한번쯤 상상해봤던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에게 흡정마공을 남겨준 흡정마룡 위대극이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된다면 과연 자신이 주었던 흡정마공의 비급을 어떻게 했을까? 자신에게서 다시 빼앗으려 할까?

“나는 유명하진 않지만 성화문(聖火門)을 이끌던 문주였다.”

“!”

성화문이라는 말에 순간 제갈 사혁의 기가 급격하게 끓어올랐고 이를 눈치 챈 천곤지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제갈 사혁을 제지했다. 천곤지사 역시 알고 있는 이름인 듯했지만 제갈 사혁과 같은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우리 성화문은 술법이 주된 문파였기 때문에 육체적인 힘이 부족했다네. 그래서 나는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융합해 새로운 무공을 만들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소저가 가지고 있는 신정오서(身情悟書)가 그것이네 육체를 다루는 첫 번째 권.”

역시 제갈 사혁이 감정한대로 그 비급에는 다음권이 존재했다.

“그럼 좋습니다. 저는 이 비급이 주인 없는 것이라 생각해 가져왔던 것이고 주인이 나타나셨으니 이제 돌려드리겠습니다.”

만약 만공이 비급을 노리는 악독한 무리라면 비급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맞서 싸우려 했지만 비급의 원래 주인이라면 비급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 간단한 일이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비급이 없어졌다는 걸 깨닫고 소저를 찾기 위해 전역을 돌아다녔네. 그러던 중 이 지역에서 유명해진 선우 도장에 대해 듣게 됐고 선우 도장의 문하생들이 펼치는 초식을 본 순간 내가 창안해낸 무공임을 알았지.”

“그럼 어째서 돌려받으러 오시지 않았죠?”

정말 자신의 물건이라면 그 자리에서 당당히 비급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가 도대체?

“소저 주위를 세심히 살핀 결과 소저의 성품이 훌륭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소저를 며느리 감으로 점찍었다네.”

며느리 감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백의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자세히 보니 만공과 남자는 대충 봐도 얼굴이 판박이였다.

“그럼..... 그 소문을 낸 이유는?”

“그런 소문을 내면 소저의 혼삿길이 막힐 것이라는 계산을 할 수 있었고 장초랑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소저를 압박한 뒤 내 손자가 소저의 목숨을 구해내 연을 맺는 게 내 계획이었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치졸했다.

“제가 손자 분께 은혜를 입는다면 시집이라도 갈 것 같았습니까?”

“그렇다네. 소저가 우리 집안에 시집온다면 그 비급도 다시 우리 가문의 것이 되고 곧 그것은 성화문의 것이 되는 거라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은 참다 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천곤지사의 팔을 뿌리치고 앞에 나서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만공을 다그쳤다.

“그런 식으로 여인의 마음이 얻어진다 생각하면 오산이오! 자신의 힘을 빌어 손자와 성혜 소저를 엮어주려 했다니 무례함에도 정도가 있소!”

“무엇이!”

“노인네의 독선과 아집으로 소저의 미래를 결정하다니 이게 무례한 일이 아니면 무엇이오! 그대가 소저의 미래를 정할 권리가 도대체 무엇이오?”

“닥쳐라 이놈아! 애초에 니놈만 아니었으면 모든 게 다 잘 됐을 것이다. 내 손자와 소저가 혼례를 올리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소저의 마음은 상관없는 것이오? 그게 가장 중요하잖소!”

제갈 사혁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계획이 성혜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로 경위는 다르지만 여동생인 남궁 이화를 강제로 황보세가와 엮으려 했던 남궁세가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못했다.

“더 들어볼 것도 없소! 이대로 감금시킨 후 내가 직접 무림맹으로 데리고 가겠소.”

“무진 소협 굳이 무림맹까지는......”

성혜가 만류했지만 제갈 사혁은 천곤지사에게 눈치를 주었다.

“성화문이면 20년 전 마교에 붙었던 정사중립문파입니다. 성혜 소저.”

“어찌 그것을!”

천곤지사의 입에서 마교에 붙었던 성화문의 과거가 밝혀지자 만공은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사실입니까?”

여태까지 아무 말 없던 만공의 손자가 만공에게 묻자 만공은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멸문 당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별 일이군.”

“무진 소협 천곤지사 관장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20년 전 당시 정사대전 때 성화문의 배신으로 인해 소림과 화산파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정사대전이 끝난 후에 무림맹에서 성화문을 멸망시킨 적이 있사온데..... 이렇게 생존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갈 사혁은 아니지만 당시 천곤지사는 소림사의 속가제자로서 정사대전을 겪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 자리가 문파의 수장들이 아닌 도장의 관장들이 모인 자리라고 해서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오. 나는 소림의 속가제자 된 몸이오.”

“나는 화산파에서 왔다.”

결국 두 조손(祖孫)의 혈도를 제압해 창고에 감금하고 날이 밝으면 성혜와의 계약 종료와 동시에 제갈 사혁이 직접 무림맹으로 압송해가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 되었다.

“무진 소협 들어가도 돼요?”

머리를 감고 있던 제갈 사혁은 갑작스러운 성혜의 방문에 당황해 급히 머리를 말리고 대충 윗옷을 챙겨 입은 후 방문을 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한밤 중에 성혜의 방문이 놀랍기도 했지만 더욱 당황스러운 건 성혜의 옷차림이었다. 평소 도복만 입던 성혜가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가슴이 파이고 노출이 심한 옷차림을 했기 때문이다.

“한잔 어떠세요?”

화장도 한 것 같고 게다가 술까지 권하다니 역시 평소와 달라보였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성혜가 가지고 온 술은 놀랍게도 양하대곡(洋河大曲)이라는 아주 명주였다. 장초랑 사건을 마무리 지은 축하주로 제격이라 할 수 있었다.

성혜 같은 미인이 따라주는 술이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성혜가 주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무진 소협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요.”

“아닙니다.”

“어머~ 너무 그렇게 겸손 떠시면 오히려 보기 안 좋아요.”

“하하하~”

“무진 소협.”

옆으로 바짝 다가온 성혜는 갖은 애교를 떨었고 제갈 사혁은 성혜의 말캉말캉 부드러운 가슴이 팔에 닿자 이성이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쭉~ 드세요. 무진 소협.”

“이렇게 많이는 못 마시는데....”

“사나이시잖아요. 쭈욱~”

더 이상은 마시기가 힘들어 그만 마시려 했지만 성혜는 제갈 사혁을 구슬려 기어이 제갈 사혁에게 술을 먹였다. 결국 제갈 사혁이 탁자 위로 뻗어버리자 손을 좌우로 흔들어 제갈 사혁이 완전히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제갈 사혁의 방을 나섰다.

어둠을 틈 타 밖으로 나온 성혜는 창고 열쇠로 문을 열고 혈도가 제압당해 꼼짝도 못하고 있는 만공과 그의 손자를 풀어주었다.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도망치세요.”

“어째서 우리를 돕는 것이오?”

“어르신의 무공서 덕에 집안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했던 것은 장초랑의 처벌이지 무림의 은원이 아니에요.”

비록 도장을 운영하는 성혜 또한 무림인이 아니라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로 대변되는 원한의 굴레로 인해 만공과 그의 손자가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비급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 비급은 이제 내 것이 아니오. 마음대로 하시오.”

그것은 만공의 자존심이었으며 성혜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이었다.

============================ 작품 후기 ============================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시끌별 녀석들을 읽었는데 시간가는 줄 몰라서 글 쓰는 게 늦었습니다.

란마나 이누야샤를 그린 작가분의 초기작이라는데 너무 오래된 작품이라 이해 못할 내용 뿐이었지만 그래도 읽게 되더군요.

하지만 시끌별 녀석들의 주인공 같은 아들을 낳는다면 그냥 인생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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