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회: 그 스승. -->
밤안개를 가르며 마차를 타고 빠져나가는 만공 조손은 멀어져가는 선우 도장을 향해 등돌린 채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았구나.”
“할아버지. 역시 성화문은 잇지 않겠습니다.”
“..........”
“무서워진 게 아닙니다. 다만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무공실력이 미천하지만 두려움을 핑계 삼을 손자가 아니었다. 비록 천재로 키우진 못했지만 겁쟁이로 자라게 놔두지 않았다.
“여태까지 할아버지의 보살핌만 받아왔습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이번에 성혜라는 소저를 보고 배운 게 많습니다. 비록 할아버지의 비급 때문이라지만 스스로 가문을 일으켜 세웠잖습니까. 여자인 그분이 했던 일을 사내인 제가 못할 리 있겠습니까?”
손자는 늦었지만 자립하는 모습을 할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그 순간 마차가 멈추며 두 사람 뿐인 마차 안으로 마부와 똑같은 옷차림을 한 제갈 사혁이 들어왔다.
“너... 너는!”
제갈 사혁의 얼굴을 본 만공의 입술을 파르르 떨며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몸에서 뻗어져 나오는 기운은 천곤지사와 싸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늙고 병든 육신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저항하지 않았다.
여유 있게 맞은편에 앉은 제갈 사혁은 갑자기 만공의 손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놈!”
만공은 두려움에 의해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제갈 사혁의 관자놀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피붙이에 대한 사랑은 두려움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 사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자의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그대로 한참 손자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그대를 존경한다.”
제갈 사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뜬금없는 것이었다.
“타인의 장점을 보고 배우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배움을 밑거름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그대가 나는 존경스럽다. 나는 절대 평생을 걸쳐도 알 수 없는 종류의 깨달음.”
그것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존경이며 불완전한 경외(敬畏)였다.
“그리고 그쪽과는 따로 볼일이 남아 있다.”
그의 손자를 보는 눈과 만공을 바라보는 눈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고 그것의 정체를 알아챈 만공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20여 년 전의 정사대전 성화문의 배신으로 화산파와 소림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부정하지 않겠네.”
“가능하면 그대의 목숨으로 받아가고 싶지만 성화문의 모든 것을 넘기는 조건으로 그대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성화문의 모든 것. 제갈 사혁이 처음부터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애초에 만공 조손을 무림맹에 연행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화산파로 향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하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특별한 술법을 사용하는 문파다.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무림맹과 나눌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화산파의 것이어야 했다. 화산파만이 독점해야만 했다.
성화문의 비전에 비하면 만공 조손의 목숨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죽이는 그깟 사람목숨에 불과하다.
“협력하겠네.”
만공도 수십 년을 강호에서 구른 노강호다. 제갈 사혁의 제의가 절대 부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가고 싶을 때 화산파에 가면 된다. 억압도 속박도 없다. 약속하지. 단 반드시 내 이름을 대라. 내 이름은 제갈 사혁이다.”
아침이 되어서 선우 도장으로 들어온 제갈 사혁은 갑자기 창고에서 망치를 꺼내오더니 수련용 목인을 고치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묵묵히 목인을 고치기 시작했다.
망치소리와 함께 선우 도장의 하루가 시작되자 한노가 제갈 사혁에게 손을 흔들었다.
“무진 소협 일어나셨습니까?”
“한노 어르신.”
“지금 목인을 손보시는 겁니까?”
“네. 뭐 아침에 달리 할 게 있어야죠.”
차가운 마루에 앉아 제갈 사혁이 목인을 고치는 모습을 묵묵히 본 한노는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저희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노는 단 한번도 성혜를 아가씨라 부른 적이 없었다. 성혜에게 자각을 시켜주기 위해서인지 항상 관장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늘 제갈 사혁에게 성혜를 아가씨라 칭했다.
“아가씨의 마음과 별 상관없이 이런 말을 한다면 저도 자신의 손자와 아가씨를 억지로 엮으려 했던 만공이라는 사람과 다를 바 없지만 어떠십니까?”
한노는 그동안 제갈 사혁을 유심히 살펴봤다. 일전에 귀뚜라미 시합을 도박이라 단정 지으며 거부반응을 보인 것도 이 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소협이 오신 뒤로 아가씨가 눈에 띄게 활달해지셨습니다.”
성혜는 분명 예쁘고 상냥하며 자립심도 대단한 여성이었다. 만약 그녀를 배필로 삼는다면 분명 훌륭한 아내가 될 테지만.......
“한노 어르신. 저는 누군가를 변화시킬 정도로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의 변화는 성혜 소저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것들입니다.”
“그렇습니까.”
성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노는 약간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기뻤습니다. 어르신 같은 분이 이런 부탁을 하실 정도면 저도 꽤 괜찮은 남자 아닙니까?”
팔짱을 끼며 태양을 등진 제갈 사혁은 특유의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무진 소협은 멋진 분이십니다.”
“그 사람은 그걸 모른단 말이야”
“네?”
“아닙니다. 아무것도.”
점심식사를 할 재료를 사기 위해 시장을 찾은 성혜는 시종일관 제갈 사혁의 눈치를 살폈다. 지난밤에 그 일이 있었으니 슬슬 무슨 말이라도 할 법한데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한노는 허리를 핑계로 오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우~ 피곤해.”
오늘 제갈 사혁의 첫마디였다.
“어제 술이 몸에 맞지 않으셨나 봐요?”
은근슬쩍 성혜는 지난밤에 있던 일을 꺼내며 만공 조손의 일에 대해 제갈 사혁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천천히 긁어낼 셈이었다.
“성혜 소저가 그렇게 멋진 옷을 입고 나타나셔서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할까요?”
갑자기 동네 한량처럼 말을 하자 얼굴이 자두처럼 빨갛게 물든 성혜는 들고 있던 장바구니로 제갈 사혁을 후려쳤다.
“그건 잊어버려요. 당장!”
장바구니에 맞아 쓰러진 제갈 사혁은 장바구니에 맞은 뺨을 만지며 성혜의 마음에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돈황까지 마차를 몰고 가느라 힘들었습니다.”
돈황까지 마차를 몰고 갔다는 말에 빨갛게 물든 성혜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얼굴색이 눈에 띄게 바뀌자 제갈 사혁은 정말 볼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안전하게 모셔다드렸습니다.”
“미안해요. 아무 상의도 없이.”
“괜찮습니다. 그보다 좀 일으켜주시겠습니까?”
성혜가 손을 뻗자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 사혁은 갑자기 성혜에게 고개를 숙였다.
“소저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제갈 사혁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에 치이며 장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겨우 장을 다보고 남의 집 담벼락 아래 주저앉은 두 사람은 겨우 숨을 돌렸다.
“점심을 먹으면 바로 떠날까 합니다.”
불연 듯 제갈 사혁이 떠난다는 말에 성혜는 왜? 라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곧 제갈 사혁이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하도 도장 일에 관여하다보니 제갈 사혁을 한노와 같이 취급해버렸다는 사실에 성혜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급하게 가실 일이라도 있나요?”
“제가 없는 강호는 강호가 아니니까요.”
정말 모를 사람이었다.
점심에 대충 먹고 저녁에 근사하게 준비하려 했던 성혜는 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문하생들의 오후 수업도 취소하고 가진 실력을 모두 동원해 정성을 상 하나에 가득 담았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마을 입구까지 제갈 사혁을 마중 나온 성혜는 제갈 사혁에게 돈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무진 소협 수고비에요.”
경호임무였으니 다른 무림맹의 임무와 다르게 따로 수고비가 있었다.
“제갈 사혁입니다.”
“네?”
“제 이름말입니다.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눈에 띄는 이름이라서 말입니다.”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성혜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화산망종 제갈 사혁.....”
혜성도 아니고 성혜의 입에서 익숙한 별칭이 들리자 제갈 사혁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 그 이름 어디서?”
“제가 알고 있는 그 제갈 사혁이라면 소협의 별호잖아요.”
화산망종이라니 화산의협이라는 화산을 대표하는 의협지사라는 멋진 별호가 있는데 화산망종이라니 제갈 사혁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사천의 실종사건을 해결하고 칠망검을 물리치고 최근 칠객 구마준을 베어버린 화산파의 젊은 고수로 성격은 잔학무도하며 패악하기 그지없다고 들었지만.”
“들었지만?”
“누군지 몰라도 사람 보는 눈 정말 없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작별인사는 특별할 게 없었다. 제갈 사혁은 손을 흔들고 성혜는 제갈 사혁이 멀어져갈 때까지 바라보기만 했다. 홀로 선우 도장으로 돌아가자 따스한 마루 위에서 한노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노 아저씨 무진 소협은 돌아갔어요.”
“그렇습니까.”
“아저씨~”
성혜가 갑자기 등 뒤에서 업혀오듯 안아주자 한노는 성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 아가씨.”
“아가씨라 불러주는 거 너무 오랜만이다.”
“그렇습니까.”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이상하지만 단순하기도 했죠.”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마당 한 가운데 어린애처럼 주저앉은 성혜는 저택을 쭉 둘러봤다. 이곳이 아버지의 도장이었을 때도 숙부의 상단이었을 때도 성혜는 항상 이 자리에 있었다. 어느새 훌쩍 자라버렸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변함이 없었다.
“많은 일이 있었죠.”
“그렇습니다.”
낙엽이 쌓여갈 계절에 찾아온 손님이 가져온 변화는 놀라웠다.
무너진 담벼락 그 사람이 아니면 다시 쓰지 않을 밥그릇과 젓가락 다시 텅 비어버린 손님방 그리고 마음......
“어쩌지?”
이젠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돼버린 그 사람이.
“정말 좋아져 버렸어.”
아쉬움이 묻어나는 미소였지만 한노는 저 자리에 앉아 흙놀이를 하던 성혜가 이젠 정말로 다 커버린 것 같아서 시원섭섭한 마음이었다.
돈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마을을 나서던 제갈 사혁은 우연히 밭을 갈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그 사내는 자세히 보니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만난 산적이었다.
“야.”
“히익!”
제갈 사혁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얼굴을 알아본 산적은 밭을 갈다 말고 겁에 질려 주저앉아 버렸다.
“일하냐?”
“네! 그렇습니다. 이제 다시는 산적질 안할 겁니다!”
농사일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지만 산적이 밭을 가는 솜씨는 문외한인 제갈 사혁이 봐도 엉망이었다.
성혜에게 받은 돈 주머니에서 은자 하나를 꺼낸 제갈 사혁은 주머니에 은전을 넣더니 나머지를 전부 산적에게 주었다.
“그게 사람 사는 거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
“가....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
기연의 주인이 따로 있다면 어떨까? 라는 주제로 시작해 제갈 사혁의 속물근성도 보여주고 또 남자의 로망인 "다른 여자"도 전개했습니다.
어떻게 보셨는지요. 사실 노블레스 전환 후 첫 에피소드치고는 굉장히 박력 없었습니다. 조금 더 늦게 이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그 놈의 고집대로 써버렸네요.
여전히 글쓸 때 초반 스타트는 빠르게 끊는데 중반에 눈에 띄게 페이스가 나빠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언젠간 극복해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