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93화 (93/262)

<-- 93 회: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 -->

나뭇잎에 이슬도 얼려버릴 만큼 추운 날이었지만 냇물에서 목욕을 마친 제갈 사혁의 몸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퍼져 나와 온몸을 감쌌다.

마을로 가는 길에 매화검수들이 향을 피우고 제를 지내는 모습에 가슴 한쪽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무림인들의 쓸 때 없는 자존심 싸움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죽어버리다니 제갈 사혁은 이 일을 꾸민 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찢어 죽이는 것 이상의 고통을 주리라 맹세했다.

“알아낸 거 있냐?”

“그게 말이다.”

아무리 비성이라고 해도 무림에 존재하는 모든 내공심법을 알진 못하지만 약 스물다섯 명을 부검해서 대충 그 윤곽이 드러난 내공심법은 총 4개다.

만계선공(万桂性功). 신하밀학(迅河謐學). 오형삼절(五形三絶).

“만계선공은 유명하지 않지만 신하밀학과 함께 조금 알아주는 정파의 내공심법이야. 그리고 오형삼절인데 이거 사파꺼야.”

정파와 사파의 마공이 한 무리에 섞였다면 이건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흑도 사파연맹.”

“흑도 무림연맹.”

제갈 사혁과 비성의 입에서 각자 다른 말이 나오자 헛기침을 한 무덕은 두 사람의 잘 못된 명칭을 정정해주었다.

“흑도 사마연맹입니다.”

“어~ 그래 아무튼 흑사련. 사혁이 너 흑사련에 원한 산 일 있냐?”

무림맹과 흑사련이 적대관계인 것은 맞지만 암묵적으로 각 단체의 중요 인물을 노골적으로 노리진 않는다.

“넌 니가 죽인 놈들 일일이 어디 출신인지 알아보냐?”

제갈 사혁다운 답변이지만 이렇게 말로만 세게 나갈수록 뭔가 묵은 사정이 있다는 걸 비성은 잘 알고 있었다. 제갈 사혁이 센척할 때는 두 가지다. 정말로 자신이 상대보다 우위를 점했을 때 그리고 정말로 불리할 때.

“그 허세가 후자가 아니길 빈다.”

정말 흑사련에서 이 난리를 칠 정도면 사천에서 귀보 아니면 최근에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을 전 무림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된 칠객 구마준 정도 일 것이다.

“역시 칠객 구마준 그 양반 일 때문인가?”

“진짜였냐? 구마준 죽인 거.”

“그럼 거짓말이겠냐.”

비성도 무림에 발을 담고 있는 이상 소문 정도는 들어봤지만 강호의 소문이야 워낙 뜬구름 잡는 말들이 많아 부풀려지거나 근거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구마준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때 전부 믿지는 않았다. 소문의 출처가 무림맹이라지만 일반적으로 20대 초반의 애송이가 구마준 같은 고강한 고수를 꺾는 일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 입으로 직적 듣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제갈 사혁 구마준을 죽였을 거라는 사실을 실감 하지 못했다.

“솔직히 동기들 중에 유일하게 너만 본산 제자가 됐지만 야~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니 나이가 몇인데 벌써 구마준 같은 놈 머리채를 끌고 내려 오냐?”

솔직히 말해서 제갈 사혁이 공식적으로 꺾은 이름 있는 고수는 그 전까지 칠망검이이 다였다. 칠망검 같은 경우는 낭인이고 또 정사지간을 떠나 신망 받는 강호의 대선배기 때문에 제갈 사혁을 거론할 때 칠망검을 꺾었다하지 않고 은퇴시켰다고 우회적으로 말하지만 칠객 구마준과 칠망검은 그 격이 달랐다.

아무리 화산파의 이름값이 비싸다지만 이제 막 스물한 살 먹은 애송이가 끌어내릴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기인 비성도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일인데 본인 입에서 정말로 그 이름이 거론되니 머리가 굳어버려 사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장난 아니네.”

“.................”

“너 임마 칠객이 왜 칠객인지는 알지? 지금이야 뭐 옛날이야기가 됐지만 흑도섬이 아니었으면 걔네 중 한명이 흑도섬이다.”

흑도섬. 무림 역사상 그 이름이 가진 무게는 적지 않았다. 흑도 사마연맹 통칭 흑사련의 단체 이름을 따서 부르는 흑도섬(黑道閃) 이 이름은 곧 흑사련 제일의 무림인을 뜻한다. 그리고 그에게 패배한 일곱 무림인을 바로 칠객이라 부른다.

제갈 사혁의 지난생애 구마준은 흑도섬과 재대결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서백호 소위와 관련해 엮이다보니 흑도섬을 대신해 구마준을 없앤 꼴이 됐다. 언젠가 꺾을 놈들이지만 구마준만큼은 시간이 지나면 그냥 사라질 놈이었다.

“신검합일(心劍合一)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기어검을 쓰더라.”

“구마준이 이기어검을 써?”

정확히는 이기어도지만 정정하기 귀찮았다.

“최근에 쓰게 된 것 같았는데 말했잖아. 신검합일을 이루지 못해서 다섯 살짜리가 휘두르는 목검보다 위력이 없더라. 아무튼 서백호와 구마준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의 난전이 아니었으면 여차여차해서.”

그러면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지만 그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다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 것도 있지만 비성이 아는 제갈 사혁은 밑천이 드러나지 않는 한 끝까지 허세 부릴 남자였다.

다른 남자는 몰라도 제갈 사혁에게 허세와 자존심은 동일한 단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칠객이 배후면 칠객끼리 친하냐? 뭐 복수 어쩌고 할 만큼?”

“너 호민 선배랑 친하냐? 호민 선배가 어떤 놈한테 죽임을 당하면 어떻게 할래?”

호민이라는 사람은 화산지회에 속한 속가제자라서 선배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도산 진인과 나이가 같아 말이 선배지 사숙 뻘이었다.

“친하진 않지만 선배가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놈이 어디 있냐.”

“걔들도 그래.”

일곱 명의 무림인이 흑도섬에게 패배하고 칠객이라 불린지 5년이나 됐으니 친하진 않을지언정 같은 별호인 칠객의 이름을 품고 있다. 구마준의 죽음을 결코 가만히 보고만 있을 놈들이 아니었다.

혹시 몰라 나머지 시신도 부검해봤지만 결과는 정파와 사파의 내공심법이 섞여져 나온 게 다였다. 전부 대외적으로 공개된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삼류 내공심법이었다. 낭인이라는 소리였고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는 낭인이 흑사련에 발가락이 물린 제갈 사혁을 노린다는 점에서 흑사련쪽으로 무게 추가 기울고 있었다.

“대충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코에 맺힌 땀을 닦으며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에 젖은 손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그래 고맙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한 걸음에 와주고.”

“고맙기는 호북에서 장사하는 덕에 니네 집에서 금창약 더럽게 많이 사주더라. 그거에 비하면 이게 별거냐?”

단지 친구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갈세가가 오랫동안 거래하던 거래처를 바꿀 정도로 제갈 사혁의 내 사람 챙기기는 유별났다. 그리고 그 정성은 이럴 때 정말 크게 도움이 됐다.

“아 맞다. 나 우현보 봤다. 작년에.”

“현보? 장개 선생님한테 맞아죽은 척하고 나간 우현보?”

갑자기 부검하다 말고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우현보 이야기였다.

“어? 너 알고 있었냐? 와~ 깜짝 놀랐다니까. 장개 선생님한테 맞아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어서.”

운대관 시절 아이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거짓으로 살인을 가장하는 건 그 시절 아이들이 모두 어른이 된 지금도 비밀이었다. 그러니 평생 그 살인촌극의 진실을 몰랐던 비성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장개 선생님이 성격이 더러워도 자기 제자를 죽이겠냐?”

“그건 그렇지만 난 여태까지 우현보가 죽은 줄 알았거든.”

가끔 이럴 때보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 그리고 니 형수 애 가졌다.”

이건 또 무슨 뜬금 없는 소리란 말인가.

“내가 3월생이고 니가 5월생인데 니 마누라가 왜 내 형수야 제수씨지 미친놈아.”

“놀고 있네. 옛날부터 정신연령은 내가 니 형이었다.”

난색하며 짜증내는 제갈 사혁과 달리 매화검수들은 아이가 생긴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비성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슬슬 동기들이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하는 걸 보면 축하는 해주고 싶지만 입장이 입장인 만큼 조금 껄끄러웠다.

무림인은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젊었을 때는 수련을 핑계로 일찍 결혼하지 않고 또 주변 시선도 너그러운 편이다. 다만 제갈 사혁처럼 외아들인 경우에는 집안 어른들의 보이지 않은 압박이 있었다.

“아무튼 확실하냐. 칠객이?”

“그럼 다른 뭐가 또 있냐?”

괜히 불편해진 제갈 사혁은 말을 끊고 다시 칠객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굳이 있다면 내가 화산파고 걔네가 흑사련이라 거.”

칠객이 제갈 사혁을 노리고 있다면 사태는 조금 심각했다. 칠객 전체가 노리느냐 아니면 칠객 중 한명이 노리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사형. 일단 제가 봤을 때는 사형의 행적이 유출된 것부터 조사하는 게 순서 같습니다.”

무덕이 일단 거꾸로 타고 올라가 역추적하는 것을 건의했고 제갈 사혁도 손이 많이 가지만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역추적에 동의했다. 가만히 이를 듣고 있던 무종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게 있었는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무종 왜 그러냐?”

“사천에서 감숙으로 가는 길 중에 여기를 잡은 이유가 뭡니까? 큰 일이 몇 개나 있잖아요. 사형이 언제 여기로 올 줄 알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 많은 길 중에 제갈 사혁이 여기로 올 줄 어떻게 알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느냐가 관건이었다.

“나 여기 처음 오는 거 아닌데.”

“네?”

“갈 때 여기로 가고 올 때 여기로 왔지.”

평소에는 용의주도한 사람이 이럴 때는 참 단순했다.

자기가 무슨 개미도 아니고 갈 때 길에다 꿀 발라놨나? 갈 때 여기로 갔다고 올 때도 굳이 여기를 이용하다니 정말 모를 사람이었다.

“일단 혹시 모르니까 애들 시켜서 난주로 가는 길목에 마을 몇 개 있는지 알아보고 마을 조사는 하오문에 위탁해 괜히 직접 움직였다가 우리 쪽 피해 입으면 답 없다.”

제갈 사혁은 일단 위험한 일은 전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해결해 추가 피해를 미리 방지했다.

사천과 감숙의 길목에서 매화검수들과 떨어진 제갈 사혁은 일단 무림맹으로 귀환하지 않고 사천 각지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는 한편 칠객을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직접 하오문에 의뢰를 넣는 방식으로 은근히 자신의 위치를 흘렸다.

운남(雲南) 육량현(陆良县)의 작은 서점에서 책을 읽던 사내 곁으로 낭인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대장.”

가지런히 잘 정리된 수염에서 풍기는 깔끔한 인상은 타인의 시선으로 하여금 학자로 보일 뿐이지 세상의 모진 풍파에 거칠게 깎인 낭인이 대장이라 부를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송수겸(頌洙鉗) 칠객의 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흑사련의 일곱 고수 중 한명으로 흑사련 내에서는 다른 칠객들과 다르게 무리를 이끌며 대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애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래?”

송수겸은 부하들이 전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화산파에서 마을을 정리하는 걸 목격하고 오는 길입니다.”

“제갈 사혁은 확인 했느냐?”

“멀쩡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 어디 화산파에 틀어박혀서 벌벌 떨지 않겠습니까?”

송수겸 입장에서는 오히려 화산파에 숨어버리면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제갈 사혁의 입지를 실추시킬 수 있고 직접적이진 않지만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강호무림은 반드시 검을 휘둘러서 상대를 쓰러트리는 곳만은 아니다.

“그래. 잘 감시해라. 정기적으로 보고 올리고.”

부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 대장.”

대장의 격려에 감동 받은 낭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나가자 송수겸의 손에서 검은 빛을 띤 기가 연기처럼 스멀스멀 올라왔다.

“전부 죽였단 말이지? 어린놈이 오만방자하구나.”

스스로 무림의 은원관계는 철저하다 자부한 제갈 사혁도 결국 칠객 구마준으로 하여금 칠객 전원을 적으로 돌리게 됐다.

============================ 작품 후기 ============================

조언하신 말씀에 따라 12시에 올리는 게 좋겠군요. 그러겠네요. 그때 올리면 아침에 보시는 분도 낮에 보시는 분도 읽으실 수 있을 테니

생일인데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 없고 술마시자는 말만 있네요.

저 역시도 생일 축하단다는 말이 그다지 기쁘지 않습니다. 이게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겠죠.

그럼 저는 마시고 죽으러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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