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회: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 -->
은근히 자신의 행적을 흘리고 다니던 제갈 사혁은 화산파의 정보조직인 망화각을 통해 칠객 중에 유일하게 세력을 가지고 있는 송수겸에 대해 알게 됐다. 유일하게 칠객들 중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자로서 정파출신의 속가제자라고 한다.
“당장 가서 결판을 내버려?”
분명 서백호라는 변수가 중간에 끼었기 때문에 죽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백호만큼이나 권사로서 기술을 닦은 지금이라면 나머지 칠객이 구마준과 비슷한 실력을 소유했거나 그 이상이라 가정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송수겸에게 몇 명의 부하가 있느냐다. 실제로 송수겸과 마주칠 경우 송수겸 한명만을 상대할 리 없었다.
그 점을 알고 매화검수들이 은밀하게 호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제갈 사혁은 사제들을 전부 돌려보냈다. 자존심 때문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칠객 중 한명 아니 칠객 전체가 제갈 사혁의 목숨을 노리는 게 확실시 된 지금 상대에게 얕보이면 끝이었다. 상대가 어떤 계략을 세우고 준비를 하고 있든 칠객을 물리치는 건 제갈 사혁 혼자 해야 할 일이었다.
객잔에 들러 밥을 먹는 도중 갑자기 살기가 느껴지자 제갈 사혁은 침착하게 오감을 일깨웠다.
(언제 올 거냐?)
며칠 동안 이런 식으로 사천을 떠돌며 제갈 사혁을 향해 크고 작은 습격이 있었지만 우두머리는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지듯 찻잔의 끝을 문지르며 때를 기다리던 그 순간 갑자기 살기가 옅어지며 사라져버렸다.
(........)
이번에 제갈 사혁을 습격하려는 자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나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내가 눈치 채고 있다는 걸 알았나?)
제갈 사혁이 흉수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기를 거뒀다면 일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음 습격은 조금 더 조심스럽고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무리군.”
반대편 건물 지붕에서 제갈 사혁을 바라보던 눈동자는 이내 제갈 사혁을 향한 시선을 거뒀다.
“찻잔을 만지는 버릇이 있었나?”
요 며칠 제갈 사혁을 습격한 낭인들을 고용한 사람은 송수겸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암살이 생업인 암살자고 낭인을 이용해 제갈 사혁을 습격하는 방식은 그만의 밑 작업이었다.
그가 제갈 사혁을 관찰한지는 10여 일이 조금 더 됐고 오늘밤 제갈 사혁을 암살하기 위해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계획을 결행하기 위해 마음먹은 오늘 갑자기 제갈 사혁이 찻잔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기이한 버릇을 보여주었다.
10여 일간 그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했지만 처음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 행동이 무심코 한 것이면 모를까? 자신의 살기를 느끼고 긴장을 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이상행동이라면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했다.
다음날이 되자 암살자는 늘 하던 일처럼 제갈 사혁을 감시했다.
“책이나 볼까?”
서점에 들어가자 암살자도 분장을 하고 서둘러 제갈 사혁이 들어간 서점으로 따라 들어갔다.
왼손으로 책을 잡고 엄지로 쪽을 고정한 상태에서 엄지를 밀어 틈을 만든 후 검지로 다음 쪽을 넘기는 버릇도 그렇고 다리를 쩍 벌리고 허리를 굽힌 채 경박해 보이는 자세로 책을 읽는 모습도 그렇고 지난 10여 일 동안 보아왔던 똑같은 바로 그 모습이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다 이렇다. 무의식적으로 같은 상황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때가 가장 빈틈이 많을 때다.
제갈 사혁이 갑자기 책장을 빠르게 넘기자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술에 핥았다.
(읽기 귀찮은 부분을 대충 넘기는 버릇도 그대로야.)
암살자는 제갈 사혁의 사소한 버릇 하나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듣고 기억했다. 그렇게 매일 관찰하며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낸 10여 일 동안의 제갈 사혁이었다.
그런데 어제 그것도 자신이 노리고 들어가려는 그 순간에 찻잔을 반복적으로 문지르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난 10여 일간의 제갈 사혁에게 그런 버릇은 없었다.
만약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고 긴장을 한 경우라면 긴장감에 의해 그런 돌출행동을 했다 볼 수 있었다.
(오늘 밤 다시 한 번.)
만약 이번에도 살기를 내보낼 때 제갈 사혁이 특이한 행동을 보인다면 사천을 떠날 셈이었다. 제갈 사혁 같은 인물을 암살하는데 실패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이 서점을 나서자 암살자는 곧장 제갈 사혁을 따라붙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암살자 특유의 보법을 펼치며 제갈 사혁의 오감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아줌마 고기 찐빵하고 멸치다시마 국물 좀 주세요.”
제갈 사혁은 늘 점심은 길거리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이때 고용해두었던 낭인이 제갈 사혁을 습격했다.
“죽어라!”
“니들은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냐?”
낭인의 검을 피한 제갈 사혁은 다시마 국물을 낭인의 얼굴에 뿌리고 재빨리 낭인의 등 뒤로 다가가 낭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더니 그대로 새우처럼 몸을 뒤로 꺾어 낭인의 머리를 지면에 박아버렸다.
“생각보다 괜찮은 기술인데 쓸 때마다 허리가 아프네 아이고~ 허리야.”
늘 이런 식이었다. 습격을 할 때마다 빈틈이라고는 없었다. 밤 먹을 때도 도박을 할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
암살자인 자신이 낭인을 따로 고용해 제갈 사혁을 습격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절대 빈틈이 없는 목표물의 빈틈을 찾아 찌르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밤이 되면 제갈 사혁은 끊어 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습관처럼 하오문이 관리하는 도박장을 찾았다.
한번은 사람들이 많은 도박장에서 제갈 사혁을 노릴까 생각도 했지만 제갈 사혁은 도박을 할 때마다 항상 도박사와 일대일 주사위 도박을 하기 때문에 은근슬쩍 옆에 접근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았다. 유일하게 사람들과 즐기는 도박은 마작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타짜들의 속임수를 가려내기 위해 하오문의 전문가들이 철통같이 지키는 터라 제갈 사혁을 급습할 수 없었다.
“손님 홀이올시다.”
도박장에 손님으로 가장해 숨어들어온 암살자는 제갈 사혁을 감시하면서 도박을 하는 통에 벌써 금자를 다섯 개나 잃었다.
“제갈 사혁 개새끼.”
제갈 사혁은 도박장에 들리면 반드시 두 냥 정도의 이윤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아마도 속임수를 쓰는 듯 했지만 하오문의 전문가들도 제갈 사혁의 속임수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늦은 밤이 되어 객잔에 돌아오면 제갈 사혁은 항상 방울을 매단 나무 송판으로 창문을 닫고 잠을 잤다.
“치밀한 놈.”
그리고 제갈 사혁이 잠을 자는 그때는 암살자도 잠을 잤다.
잠을 잘 때 급습하는 일은 쉽지만 상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음 날이 되자 제갈 사혁을 감시하는 암살자도 그리고 감시를 받는 제갈 사혁의 일상도 변함없이 흘러갔다. 그런데 어느 날은 제갈 사혁이 방울을 단 송판을 닫지 않고 잠을 잤다.
필시 기회였지만 암살자는 두 번 생각했다. 제갈 사혁의 함정이거나 문 닫는 걸 깜빡했다는 뻔한 결론이었다. 분명 절호의 기회인데 최대 위기기도 했다.
슬슬 제갈 사혁을 감시하는데 지치기도 했고 자객으로 보내는 낭인들의 고용비며 제갈 사혁이 도박장을 이용하는 터라 도박장을 따라가면서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리는 비용 등을 생각하면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참아라.... 참아야 한다. 돈은 한순간이지만 명성은 영원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제갈 사혁의 열린 창문 틈으로 검은 그림자가 기어들어갔다.
“뭐야!”
씹고 있던 옥수수떡을 대차게 던지며 암살자는 망원경으로 제갈 사혁의 방을 유심히 관찰했다.
제갈 사혁의 방에 침입한 침입자는 검을 꺼내들어 제갈 사혁이 자고 있는 침대를 찔렀다. 제갈 사혁이 공격당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얼마 후 제갈 사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입자를 일격에 쓰러트렸다.
“어떤 새끼야?”
사용하는 무기하며 건물 사이사이를 귀신같이 타고 올라가는 솜씨하며 동종업자가 분명했다.
“누가 고용한 거지? 어느 식구야?”
분명 송수겸의 의뢰를 받고 제갈 사혁을 암살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은 자기 혼자다. 그런데 또 다른 암살자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이때 제갈 사혁이 창문 밖으로 떨어졌다.
“뭐... 뭐야.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자 침입자는 제갈 사혁을 따라 밖으로 나갔고 이내 두 사람간의 혈투가 벌어졌다.
침입자가 어둠을 틈타 검은색으로 칠한 무광(無光)검을 휘두르자 제갈 사혁은 간발에 차로 검을 피라며 화산파의 절기라고 불리는 복호권으로 응수했다. 두 사람의 치열한 일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지만 실력차이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검법의 깊이가 부족한 침입자는 결국 제갈 사혁의 금나수에 팔이 잡히고 생전 견식해본 적 없는 기묘한 움직임을 보인 제갈 사혁에 의해 뼈가 으스러졌다. 과연 이름난 권사라더니 사람의 몸을 부수는 방법 또한 특이했다.
혈투가 끝나자 제갈 사혁은 갑자기 방으로 올라가더니 허리에 검을 차고 두 손에는 족자 몇 개를 챙겨 그대로 객잔을 나가버렸다.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도망치려는 건가?”
정황상 침입자의 습격을 받았으니 도망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갈 사혁을 암살해야 하는 암살자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제갈 사혁이 이대로 도망치면 그동안 제갈 사혁을 암살하기 위해 준비한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때문이다.
“안돼!”
암살자는 밤하늘을 가르며 귀신처럼 그림자만 남긴 채 제갈 사혁을 뒤따랐다. 그리고 도망치는 제갈 사혁을 본 순간 두 번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제갈 사혁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잠자리를 습격당해 허겁지겁 도망치는 지금이야 말로 가장 빈틈이 많은 순간이었다.
달빛에 비친 암살자의 검은 정확하게 제갈 사혁의 복부를 꿰뚫었다.
“!”
제갈 사혁과 두 눈이 마주친 암살자는 자신의 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의 감촉을 느낀 순간 제갈 사혁의 목숨을 죄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 작품 후기 ============================
12시에 올립니다. 원래 일찍 자는데 연재를 위해 지금까지 버텼습니다.
글 제대로 쓰려고 생일날 술도 안마시고 맨정신으로 쓰는 글이니 안심하세요.
음주집필 아닙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