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회: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 -->
아미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생각을 정리한 제갈 사혁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금 당장 운남에 있는 이부성가로 갈 생각이었다. 암살을 위해 고용된 제남이 실패했으니 얼마 후면 사람을 통해 암살실패 소식이 전해질 테고 그렇게 되면 때는 늦는다. 적어도 아직까지 무영곡의 살수 제남은 제갈 사혁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니 이때 역습을 가해야 했다.
“송수겸이라고 했지 어디 그 등짝 좀 보자.”
제갈 사혁은 늦은 밤 상인을 통해 마차에 합승한 뒤 운남으로 향했다. 그리고 운남의 성도가 목적지인 상인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부성가라고 아십니까?”
“그건 왜 물어보시우?”
이부성가에 대해 묻자 마차를 몰던 상인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름만 들어도 그런 반응을 보이기란 쉽지 않은데 분명 뭔가가 있었다.
“해는 끼치지 않을 테니 아시는 것만 말씀해주십시오?”
상인은 한동안 아무 말 없더니 제갈 사혁의 얼굴을 몇 번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간을 보는 것 같은데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낭인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무림맹이시우? 아니면 어디 흑사련이라던지?”
흑사련이라는 단어를 말할 땐 꼭 마누라 앞에서 기 죽은 40대 중년 가장 만큼이나 힘이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무림맹에 소속된 출사입니다.”
무림맹에 소속된 사람이라 밝히자 상인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옆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가 들으면 안 된다는 듯 조용히 속삭였다.
“이부성가가 겉으로는 장원인 척하지만 사채에 약장사에 별에 별 건달들이 다 있소. 이참에 무림맹에서 나서준다니 내 있는 그대로 말하겠소. 그 나쁜 놈들 좀 제발 쫓아내주시오. 이부성가에는 진해창이라는 놈이 있는데 그놈이 그 마을에서 왕처럼 군다우. 지놈들이 무슨 관리라도 되는 양 마을에 세금까지 따로 걷어 가는데 속 터져서 아무도 거기서 장사 안하려하오.”
그런데 이게 또 듣고 있으면 참 웃긴 게 운남은 무림맹의 입김이 닿아 있는 지배세력권 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절대 사파의 거두가 둥지를 틀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운남 지역의 정파는 뭐하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가는 것 아니었수?”
그것 때문에 간다니 이건 또 무슨?
“왜 운남 만왕검가(萬王劍家)와 은하검파(銀河劍派)는 이미 그 놈들하고 한통속 아닙니까?”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만왕검가와 은하검파가 이부성가와 한통속이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가을 홍시처럼 얼굴색이 붉게 물었다.
제갈 사혁이 아는 한 만왕검가와 은하검파는 정파였다. 금원정가(擒圓正家) 천태파(天台派)와 함께 운남 4대 정파 중 절반이 넘어가다니 이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 박쥐같은 중소방파 새끼들! 어라? 이 말을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들었지 사부님이 하신 말씀이었나? 아니야. 박쥐같다는 말은 분명.....)
“아!”
“아이고 깜짝이야! 무슨 일이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거 참~ 사람이 실없기는.”
지난 생애를 기준으로 한참 전 과거의 일이라서 잊고 있었지만 은하검파와 만왕검가가 무림맹을 배신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운남에서 가장 거대한 정파인 천태파가 사라졌다.
제갈 사혁이 이 일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에는 방금 전 그 ‘욕’ 때문이었다.
당시 은하와 만왕의 배신 사건을 조사하던 사람이 개방의 주축이 된 후기지수 구월상이었다. 그래서 구월상은 항상 후기지수 모임 때마다 박쥐에 비유하며 버릇처럼 그 두 단체를 욕을 했었다.
(구월상이 이 일을 두고 그런 말을 했었지........ 젠장! 하필 그게 왜 지금 기억이 났을까?)
과거의 기억대로라면 현재 은하검파와 만왕검가만이 무림맹을 배신한 상태지만 곧 그 두 단체에 의해 천태파가 무림에서 사라지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천태파란 말이지.)
천태파는 운남에서 알아주는 거대 문파였고 제갈 사혁이 아는 한 고작 은하검파와 만왕검가만으로 천태파를 없애지 못한다.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에 이부성가 그리고 송수겸이 있었다.
(송수겸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일에 우선순위는 누가 뭐라 해도 송수겸을 처단하는 일이지만 순간 명예욕에 불타올랐다. 만약 만왕검가와 은하검파의 배신을 화산파의 힘만으로 제압해낸다면 사문의 위상이 더욱 더 굳건해지기 때문이다. 무슨 제물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 일로 인해 무공이 고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명예란 그런 것이었다. 타인이 나를 우러러 보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명예였다.
다음날 오후쯤에 운남에 도착하자 제갈 사혁은 상인에게 가짜 수염을 부탁했다.
“에이~ 나는 그냥 시세 차익을 보는 보따리 장사꾼이라서 그런 진귀한 물건은 가지고 있지 않소. 그래도 무림맹에서 일하시는 분이니 내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구해보리라. 대신 그 놈들을 꼭 좀 치워주시오. 거기서 나도 장사나 해봅시다.”
상인과 헤어진 뒤 이부성가가 있는 곳까지 경공을 펼쳐 도착한 제갈 사혁은 일단 마을 분위기를 살폈다. 마을 곳곳에는 무기를 소지한 자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녔는데 모두 특정 문파에 속하지 않은 낭인들이었다.
운남까지 데려다 준 상인의 말로는 워낙 이부성가의 텃세가 강해 이 지역에는 하오문도 쉽게 접근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제갈 사혁은 일단 용화장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일부러 상처를 내 흉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상인이 어렵게 구해다준 가짜수염을 붙이고 낭인처럼 행동했다.
“이봐!”
그런데 낭인으로 분장하고 거리를 돌아다니자마자 갑자기 벌떼처럼 다른 낭인들이 제갈 사혁을 감싸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놈인데 뭐하던 놈이냐?”
벌떼들 틈에서 벌처럼 행동했는데 벌은 다른 무리에서 온 이방인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냐니까?”
소도둑놈처럼 생긴 낭인이 어디서 왔냐고 묻자 제갈 사혁은 버릇처럼 사천이라고 얘기했고 그 말과 동시에 수십 자루의 시퍼런 칼날 사방에서 날아와 그물처럼 제갈 사혁을 옭아맸다.
“정파 새끼가 여긴 무슨 일이야?”
실수로 사천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럴수록 대범하게 나가야했다.
“잠깐 내 말 좀 들어보쇼! 사천에서 왔다고 낭인한테 정파고 나발이고 그런 게 어디 있소!”
낭인들은 떠돌아다니며 칼로 밥벌어먹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돈이 된다면 정파 쪽 일이건 사파 쪽 일이건 필요하면 마교 뒤꽁무니도 쫓아가는 게 낭인이다.
“사천에서 무슨 일 했어?”
사천에서 무슨 일을 했냐고 묻기에 달리 생각이 나지 않았던 제갈 사혁은 청해에서 칠망검을 만났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사천에서 오긴 왔는데 최근에 일한 건 칠망검 선배님하고 청해에서 사채업자 놈 하나 목숨 건사해준 게 다요.”
“칠망검?”
“그렇소. 청해요. 사천은 그냥 가끔 잠이나 자는 곳이오.”
사천이 집이라고 하면 조사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잠이나 자는 곳이라고 두루뭉수리하게 이야기했다.
“이곳에서는 얌전히......”
그러면서 소도둑처럼 생긴 낭인은 제갈 사혁의 옷을 뒤져 돈 주머니를 꺼냈다.
“깝치지 말고 사라져라.”
그 말과 동시에 수십 자루의 검으로 만들어진 그물에서 풀려난 제갈 사혁은 조용히 목덜미를 만지며 낭인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헛웃음이 세어 나왔다.
“요것 봐라?”
저런 종류의 인간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뒷배가 든든하니까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딱 자신과 같았다. 다만 그들과 제갈 사혁이 다른 점이 있다면 제갈 사혁은 뒷배가 든든하기 때문에 그 배경에 어울리는 실력을 쌓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고 그들은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에 만족한다는 점이었다.
일단 제갈 사혁은 이부성가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낭인의 출신성분이야 앞서 말했듯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실력만 있으면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실력을 어느 정도 보여준 후 이부성가에 들어가면 일단 송수겸이 이부성가에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대책을 세워야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거짓으로 수족이 된다고 해도 말단 부하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친해져볼까?”
지난번 서백호를 잡기 위해 쟁자수로 위장했을 때도 같이 상행을 떠났던 낭인들은 제갈 사혁에게 말을 걸어가며 친해지려했다. 어차피 낭인들의 속물근성이야 이 바닥에서 알아주니까 그걸 이용해도 좋았다.
“그럼 일단 자연스럽게 들어가 볼까?”
아무리 낭인을 모아놓는 곳이라고 해도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가 눈에 보이는 놈 아무나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서 나 이런 놈이요. 하고 보며주면 그걸 본 상급자가 이런 패기 넘치는 놈 오늘부터 넌 우리 식구다! 라는 식의 전개는 이뤄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말이다.
“옛날 말에 상놈 끗발이 상끗발이라는 말이 있지.”
그런 말 따윈 없지만 아무튼 보잘 것 없는 자라 하더라도 그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는 그 무리에 속한 자부터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내 경우에는 포섭이 아니지만.”
방금 전 가정교육 형편없이 받은 망할 자식들 덕분에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린 제갈 사혁은 가만히 길거리에 주저앉아 낭인들을 유심히 살폈다.
설렁설렁 보니 묘한 점을 두 가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무기였다. 다른 낭인들과 달리 새것처럼 근사한 무기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 낭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 좋은 무기를 찬 낭인만이 이부성가로 추정되는 저택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거네 그거.”
이 지역 낭인들은 전부 이부성가에 고용된 낭인들이 아니었다. 대략 추정하자면 다들 이부성가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날건달이 따로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목운동을 한 제갈 사혁은 천천히 객잔 안으로 들어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해 보이는 낭인에게로 다가갔다.
“뭐요?”
방금이라도 칼을 뽑을 것 같은 살벌한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자 제갈 사혁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낭인의 뺨을 호쾌하게 후려 갈렸다.
“밥 줘.”
밥 줘. 라는 그 한마디는 정말 밑도 끝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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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를 하려고 했는데 뭔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근사한 패러디가 있.........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