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회: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 -->
아침식사를 끝내고 제갈 사혁은 계준을 따라서 수금을 하러 다녔다. 사채업이며 마약 유통이며 별에 별 짓을 다하는 이부성가이니 만큼 회수는 항상 밑에 낭인들 몫이었다.
계준은 마을 사람들의 멱살을 잡으며 산적출신답게 겁을 주는데 굉장히 능숙했다.
“아자씨~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고만 합시다.”
“정말 돈이 없어.....”
“아자씨! 정말 이러기요?”
아자씨 아자씨 거리면서 인상을 쓰는 게 꼭 동네 건달 같지만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을 겁주는 방법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다음 달까지는 꼭 갚을 테니께 우리 사정 좀 봐줘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여.”
“돈이 없으면 집에 있는 저 개새끼라도 가져 가야것소!”
집에서 나온 계준은 개집에 묶여 있는 목줄을 풀고 개를 가져갔다.
“주 동생 개 좀 데리고 있어.”
“이런 걸 가져가서 뭐해요?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가져가는 거야. 원래 수금이라는 게 집구석에서 뭐라도 하나 들고 오면 돼. 어차피 돈 값을 수 있는 사람 이 마을에 한명도 없어. 동생 그거 아직 모르지?”
그러면서 계준은 마을에 있는 상점들을 가리켰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계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웠다.
“이 근방의 상점들이 전부 이부성가야. 개인 사업자는 한명도 없어. 이부성가에서 상점을 독점하니까 이 마을에서 물건을 사려고 해도 이부성가에 돈을 내야하고 빌린 돈을 갚으려고 일을 해도 이부성가에서 돈을 받아야 하고 먹고 살려고 쌀이라도 한 포대 사려면 그것도 이부성가에 돈을 내고 사야하고.”
말을 듣고만 있으면 청해에서 만났던 그 사채업자 놈은 정말 착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주 동생도 돈 벌어갈라고 여기 왔잖아. 봐봐 이부성가에 들어가지 못한 낭인들 돈까지 쓸어 담고 있어. 여긴 한마디로 개미지옥이야 개미지옥!”
독하다 못해 천하의 제갈 사혁도 소름이 돋았다.
“아주 나라 하나 건국했네 건국했어.”
“동생도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 지금 말해줄 게. 사실은 주군께서는 문파를 만드실 생각이야.”
주군이라면 당연히 송수겸을 말하는 거고 제갈 사혁도 송수겸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막상 내부인인 계준의 입으로 사실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지금은 사채업이나 약장사를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윤락업도 하게 될 거야 그렇게 본격적으로 그쪽 세계를 장악함과 동시에 그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단일 문파를 세울 예정이야.”
지금 당장은 이 작은 마을하나 쥐어짜서 마시고 있지만 놈들은 운남 전체를 맷돌로 돌려서 짜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문어발식 사업은 분명 하오문과 여러 가지로 겹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운남에는 하오문이 없다!)
송수겸이 자신의 이름을 팔아 운남에서 하오문을 내쫓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송수겸이 만들려는 단체가 제 2의 하오문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약 하오문이 아닌 다른 단체가 중원의 밤놀이에 개입한다면 그것도 큰 문제였다.
“돈이 없으면 돈을 빌리지 말던가!”
한쪽에서는 다른 수금원이 체납자를 구타하고 있었다.
“이러지 마세요! 아이고~ 장이 아버지!”
부인으로 보이는 아낙이 낭인들에게 구타당하는 남편을 감싸자 이를 보고 있던 계준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낭인들을 말렸다.
“계준이 뭐여?”
“기다려봐. 잡것들아.”
그러더니 계준은 아낙의 팔을 낚아채 아낙이 끼고 있던 낡은 목주를 빼앗으려 했고 아낙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건 안돼요! 아이고!”
“어허~ 남편 살려야 할 것 아냐!”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말에 아낙은 소리 없이 울면서 힘없이 계준에서 손을 맡겼다.
“촌것들처럼 왜 이래. 그냥 물건만 그럴싸한 거 가져가면 되는 거 몰라서 이래? 이 마을에 원금은 둘째 치고 이자 갚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돼? 자자~ 힘 빼지 말고 빨리 수금하러 가봐.”
계준이 상황을 정리하자 다른 수금원들도 애써 계준에게 져주는 척 집을 나섰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제갈 사혁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어효~ 그냥 새끼들 쥐어 짤 줄만 알지 살살 달래야 할 것 아냐.”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 사혁은 계준이라는 인물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계준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한때의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고 그저 자기한테 피해가 가지 않는 한도에서 적당히 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뭐든 하고자 하면 확실하게 해야 하는 제갈 사혁과는 조금 달랐다.
“꺄아~ 이러지 마요!”
“가만히 있어!”
“형님만 재미 보지마쇼!”
담장 넘어 뒤쪽에서 여인의 비명소리와 남자들의 천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계준은 제갈 사혁을 밀치고 쏜살같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는 삼람이 패거리가 한 여인을 희롱하고 있었다.
“삼람이!”
“아씨~ 저건 또 왜 여기 와서 지랄이야.”
계준의 등장에 삼람은 옆에 있던 장독대를 발로 차며 성질을 냈다.
“너 뭐하고 있었어? 이 개새끼야!”
“보면 모르냐? 수금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삼람이 패거리에게 희롱 당하던 여인은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였고 이는 아무리 봐도 사채 이자를 수금하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수금하려면 닥치고 수금이나 해. 등신 새끼야.”
그 말을 들은 삼람은 기어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래 이 미친 새끼야 재미 좀 보려고 했다.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냐?”
그러자 삼람이 패거리들도 계준을 향해 검을 겨눴다. 계준이 아무리 알아주는 장사라지만 머릿수로는 당해내기 힘들었다.
“계준이 형. 내가 몰라서 그러는데 같은 이부성가 식구끼리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때 뒤에서 나타난 제갈 사혁은 쭈그려 앉아 깨진 장독대에 들어 있던 장을 손으로 찍어먹었다. 한쪽에서는 칼을 빼들고 죽이네 어쩌네 하는 판국에 혼자 딴 세상 사람처럼 행동했다.
“몰라. 한 번도 식구끼리 죽인 적은 없었으니까.”
이부성가는 출신성분도 분명하지 않은 낭인들을 모아놓은 곳이기는 하지만 형님이라 불리는 자와 이부성가의 장주 진해창 그리고 그들 위에 주군으로 군림하는 송수겸이 있었기 때문에 한번도 이부성가의 식구끼리 칼부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럼 오늘 알게 되겠네.”
제갈 사혁이 웃으면서 삼람을 바라보자 지난날 제갈 사혁의 돈주머니를 아주 손쉽게 빼앗았던 삼람으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살려고 주머니 깐 새끼가 누굴 죽여? 너 이 새끼 계준이 믿고 설치냐? 저 비계 덩어리가 뭐든 해줄 것 같지? 정신 차려라 계준이 놈도 지 몸하나 건사하는 게 다 인데 그 놈이 너 끝까지 챙겨줄 것 같....... 컥!”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갈 사혁은 깨진 장독의 파편을 들고 삼람의 목을 그어버렸다.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삼람이 쓰러지자 삼람이 패거리들은 사태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분위기 파악 안 돼? 도망쳐야 할 것 아니야. 니들 눈앞에 있는 미친놈이 니들도 죽이기 전에!”
제갈 사혁이 눈에 불을 켜고 소리를 지르자 삼람이 패거리들은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골목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주 동생 미쳤어!”
계준은 제갈 사혁이 삼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빨리 정신을 차리고 삼람의 상태를 살폈다.
“진짜로 죽이면 어떡해!”
“왜요? 형도 걔네랑 싸우면 이 꼴 났어요.”
내가 뭘 잘못했냐는 식의 태도에 계준은 오히려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래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로 우리 식구끼리는 안 죽여!”
“그건 그때 가봐야 아는 거고요.”
계준이 본 제갈 사혁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한 막내 같은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일단 일단 일단 일단 무조건 잘못했다고 그래 삼람이 먼저 칼을 뽑았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계준은 일단이라는 말을 4번이나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가씨는 빨리 집으로 들어가 여긴 우리가 다 치울 테니까. 집에 들어가서 꼼짝도 하지 마! 아가씬 처음부터 모르는 일이야 내 말 알지?”
방금 전까지 희롱당하던 여인을 억지로 방 안에 밀어 넣은 후 삼람의 시신을 업고 계준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주 동생 따라와!”
얼마 후 다시 돌아와서는 제갈 사혁을 삼람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더니 제갈 사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잡고 눈을 마주한 채 최면을 걸 듯 제갈 사혁에게 당부를 했다.
“우린 골목에서 우연히 삼람 패거리들과 만나서 시비가 붙은 거야. 알았지? 절대 저 아가씨는 상관없어 아니 저 아가씨는 애초에 없었던 거야.”
(이 사람이 미쳤나? 뭐하는 짓이야?)
저 아가씨는 상관없다느니 삼람이 패거리와는 골목에서 싸웠다느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는 계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제갈 사혁에게 이부성가는 송수겸의 머리채를 붙잡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부성가의 낭인들이 떼로 몰려와 제갈 사혁와 계준을 끌고 이부성가로 향했다.
“정말로 삼람을 죽인 게 주원이냐?”
형님이라는 자가 팔짱을 끼고 무섭게 노려보자 계준은 고개를 숙인 채 형님에게 사죄를 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주 동생이 저를 구하려다.”
“듣기 싫다! 같은 식구끼리 칼을 겨눠?”
형님이 칼을 뽑자 제갈 사혁은 칼이 날아오는 순간 그자의 목을 날려버릴 준비를 했다. 어차피 며칠 낭인행세 좀 하며 놀려먹고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저를 벌해주십시오!”
“뭐?”
계준이 자신을 대신 벌해줄 것을 요구하자 형님이라는 자는 뽑은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주 동생에게 잘 못이 있다면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계준. 네가 책임 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형님.”
계준이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자 잠시 계준을 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계준에게 물었다.
“후회는 없으렷다?”
“네.”
이를 본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뭐라고 이 하찮은 일이 뭐라고 이 덜떨어진 산적 놈이 자신을 대신해 벌을 받내마나 지껄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밤 비명을 참다못해 간신히 새어나오는 계준의 비명소리가 이부성가에 울려 퍼졌다.
“어이~”
줄에 묶인 채 채찍으로 수 십 차례 태형을 당한 계준에게 찬물을 끼얹은 제갈 사혁은 그의 뺨을 툭툭 치며 의식을 일깨웠다.
“주... 동생.....”
“주 동생은 뭔 놈의 동생. 왜 그랬수?”
“뭐가?”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답이 안 나오네.”
계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양 팔은 쇠사슬로 묶여있고 등은 시뻘게서 이게 사람 등인지 게 딱진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 여자를 왜 구하려 했소? 애초에 삼람이 놈들이 뭘 하든 어차피 이부성가 꼬라지에 왜 끼어든 거요? 계준이 형.”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어린 처자잖아.”
전직 산적이었다는 놈이 그렇게 말하자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태어날 때부터 산채에 있었어.”
“.............”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산적의 아들이라는 거지. 그런데 그러면 안 되잖아. 남자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힘없는 여자한테....... 못 배워먹었어도 그건 나도 알고 3살짜리 꼬마도 알아.”
============================ 작품 후기 ============================
원래 걍 이번 이야기 쉽게 가려고 했는데 또 이것저것 넣고 말았습니다.
하아~ 심플하게 가야 하는데 심플하게....
요즘에 상상이 잘 안되네요. 피곤해서 그런지....
무언가 연상을 하려 하면 머릿속이 까맣게 변해서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그렇다고 뭐 슬럼프는 아니고요. 그냥 재미 있는 영화 한편 보면 뇌가 자극 받아서 멀쩡해지겠죠.
글 쓰다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지금 이 후기를 여러분이 보고 계실 때 저는 떡볶이를 사러 24시간 영업하는 동네 포장마차에 갈 생각입니다.
떡볶이 국물에 불어터진 어묵이 아우~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