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99화 (99/262)

<-- 99 회: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 -->

(내가 니 놈을 잘 못 봤구나.)

제갈 사혁은 계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이 왔다가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속은 함부로 단정 짓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까지 제갈 사혁에게 계준은 적당히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산적의 아들로 태어나 산적으로 자랐고 여태까지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살아왔다. 그러니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 자체를 올바르지 못하다거나 적당히 한다는 식의 표현은 감히 제갈 사혁이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여인들의 사정을 봐주고 그녀들을 지키려 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자신을 낳아주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녀들에게 투영(投影)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필요한 건 없수?”

“목이 마르네.... 물 좀.....”

넘어가지도 않는 침을 삼기며 힘겹게 말하는 모습이 짠하게 느껴졌다.

사실 오늘 밤 이부성가를 어떻게 해보려 했지만 제갈 사혁은 마음을 바꿨다. 다음날이 아침이 되자 계준은 거의 반 시체가 되어 방으로 옮겨졌다.

이부성가에는 의원도 대기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계준을 봐주러 오지 않았다.

“계준이 형 일어나보쇼.”

“으으으.....”

밤새 뜬눈으로 새벽이슬을 맞아서인지 지난밤에 봤을 때보다 더욱 나빠진 상태였다.

“조금만 참아.”

제갈 사혁은 계준에게 등에 내공을 주입해 통증을 완화시켰다. 내공으로 내상 입은 부위를 덮는 것과 같은 원리지만 상처가 겉으로 드러난 만큼 근본적인 치료가 되진 않았다.

“좀 괜찮아졌수?”

몸에 힘이 없는 계준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제갈 사혁은 서둘러 근처 산으로 향했다.

자연치유 능력 때문에 약초에 의존하진 않지만 지난 생애에서는 스스로 상처를 다스려야 했던 만큼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저기 저게 백급이었나?”

원래는 보랏빛의 꽃을 피우지만 가을이라서인지 일단 캐보지 않으면 제갈 사혁처럼 가벼운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백급을 구별해내기 힘들었다. 다섯 뿌리를 캐내 겨우 한 뿌리를 건진 제갈 사혁은 조심히 그것을 씻어서 입으로 씹은 후 기다리다 지쳐서 잠든 계준의 등에 발라주었다.

“더럽다고 뭐라 하지 마. 절이 같은 고상한 물건은 없으니까.”

계준을 눕히고 훈련시간에 맞춰 나가자 이부성가의 낭인들은 제갈 사혁을 두려워하거나 아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 부르기 창피한 실력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라지만 그 무리 안에서 삼람은 제법 알아주는 칼잡이였기 때문이다.

오전 훈련이 끝나자 형님이라는 자는 갑자기 사천으로 사람을 보내려 했다.

“사천에 다녀올 놈 없나?”

사천이라는 말에 무언가 감을 잡은 제갈 사혁은 대뜸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갈 사혁이 가겠다고 하자 형님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제갈 사혁을 보더니 제갈 사혁의 바로 옆에 있는 낭인에게 이 일을 맡겼다.

“주원은 됐다. 팔성이 네가 가라.”

“네. 형님.”

“가서 무영곡에 홍귀를 찾아라. 화산파 장문 제자 암살 건으로 장주께서 진행상황을 궁금해 하신다.”

홍귀는 아마도 조직 내에서 사용하는 제남의 이명(異名)인 듯 했다.

뒤따라가서 팔성의 숨통을 끊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괄귀가 제남을 데려간 이상 찾는 일이 쉽지 않을 테고 괜히 근처에서 팔성을 처리했다가 시신이라도 나오면 안 그래도 삼람이 사건 때문에 보는 눈이 좋지 않은데 범인으로 몰릴 수가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 계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제갈 사혁은 계준과 독대를 했다.

“계준이 형은 뭐가 되고 싶어?”

“그게 무슨 소리냐? 뭐가 되긴 뭐가 된다는 거여?”

“내가 봤을 때 계속 이부성가에 있어봐야 형은 소모품이야.”

일단 제갈 사혁은 계준을 구워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산적질 했으니까 조직에 대한 눈치는 있을 거 아니야? 뛰어난 사람은 중용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낙오되잖아.”

“그렇지 그려.”

괜히 강한 척 동요하지 않은 척하는 말투였지만 목소리에 스며든 동요와 불안함은 제갈 사혁을 속일 수 없었다.

“내가 도와줄 게. 진짜 무공을 가르쳐줄 게. 어때?”

“그래서 네가 얻는 건 무엇이여? 그것부터 말해봐.”

산적질을 해서인지 아무 대가도 노력도 없이 이룰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두 가지를 얻지 첫 번째는 형의 신뢰. 두 번째는 나랑 약속하나만 해주면 돼.”

약속이라는 말에 계준은 꺼림칙한 그 무언가를 직감적으로 눈치 챘다.

“약속이란 게....”

“상황 봐서 그 때 그 때.”

계준의 질문을 미리 차단한 제갈 사혁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계준에게 선택만을 강요했다. 그답다면 그 답지만 누군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 상황에서도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얻는 게 무엇인가를 잘 생각하고 대답해줘.”

하지만 협상의 기술만큼은 확실했다. 아직도 대답을 망설이는 계준에게 제갈 사혁은 이익이 무엇인지 상기시키며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좋아. 도와줘.”

제갈 사혁은 그날부터 계준의 모든 것을 뜯어고쳤다. 무림에서 겉도는 힘 좋은 장사가 아닌 진정한 무림인으로 만들기 위해.

“일단 무기부터 바꿔.”

계준이 쓰는 무기는 도끼였다. 하지만 도끼보다는 도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도끼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제갈 사혁 본인이 도끼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고 또 계준도 딱히 도끼를 그렇게 잘 다루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를 선택했다고 해서 도법을 가르칠 수도 없었다. 제갈 사혁은 애초에 도법 따윈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은 내공 초식 그리고 이것을 뒤섞은 무공을 가르치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힘을 다루는 방법을 계준에게 가르쳐주었다.

“계준이 형은 힘이 좋으니까. 힘쓰는 법을 배워야 해.”

“힘이야 뭐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면 그게 힘 아니야?”

어떤 의미에서는 이신과 달리 더 속성으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계준이 질문을 하고 의문을 가질 때마다 직접 칼을 맞댐으로서 몸으로 깨우쳐주었다.

“필요할 때 쓰란 말이야. 싸울 때 계속 몸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금방 지쳐. 덤벼봐.”

덤벼보라는 말에 계준은 새로 장만한 도를 휘두르며 제갈 사혁을 압박했고 그것을 전부 막아낸 제갈 사혁은 흐름이 자신의 쪽으로 오자 적당한 힘으로 계준을 압박했다.

하나 둘 셋. 적당한 함으로 계준의 칼을 두들기던 제갈 사혁은 갑자기 기세를 바꿔 온 힘을 다해 계준의 칼을 내려쳤다.

“윽!”

그러자 도를 쥐고 있던 계준의 손이 찢어지며 손잡이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뭐여?”

“봤지? 이게 힘을 쓰는 방법이야.”

“내공을 쓴 거냐?”

내공을 썼냐며 계준이 살벌하게 노려보자 제갈 사혁은 여유 있게 고개를 저었다.

“내공을 쓰며 어떻게 형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 있겠어.”

“그럼?”

“내가 몇 번 칼을 두들겼을 때 형은 무의식중에 이런 생각을 했을 거야? 아~ 얘는 이 정도 힘 밖에 없구나.”

제갈 사혁의 말 한마디에 계준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너무 심각하게 반응하지 마.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그러니까 요점은 이거야. 상대의 힘에 익숙해져버려서 어느 순간 방심하게 됐을 때 더욱 더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면?”

“상대가 당황하는 구나.”

“바로 그거야!”

최근에 이신을 가르치면서 직접 자신이 초식을 펼쳐 가르치던 제갈 사혁의 교육방식이 바뀌게 되었다. 이신은 원래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무언가를 가르쳐줄 때 질문이 굉장히 많았다. 특히 최근처럼 눈부시게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래서 제갈 사혁은 항상 질문에 답은 당사자에게 맡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스스로 답을 말하게 함으로서 자신감과 이해력을 길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잘 기억해둬. 아자! 아자! 아자! 으랏차차차~”

“아자. 아자. 아자. 으랏차차차.”

“처음부터 으랏차차차 했는데 나중에 헉헉헉.... 거리면 그냥 뒤지는 거야.”

그동안 난폭한 방식으로 제갈 사혁에게 화산파 무공을 배웠던 사제들이 보면 제갈 사혁에게 돌을 던질지 모르지만 이신을 가르치는 만큼 계준을 가르칠 때도 계준의 눈높이에 맞출 만큼 제갈 사혁은 교육자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보고 싶다. 신아... 넌 정말 훌륭한 제자였어!)

이신에게 재능이 없다. 재능이 없다. 노래를 불렀지만 계준과 비교하면 이신이 새삼 훌륭한 제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평소에 이신을 이름만 따로 부르지 않는 제갈 사혁이 신이라고 부르며 좌절할 정도로 말이다.

계준은 내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둔감해도 정도껏이여야 할 텐데 이건 뭐 상상 그 이상을 보여줘 버리니 제갈 사혁은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어떻게든 가르치긴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몸으로 익힐 수 있는 건 모조리 가르쳐주었다.

“자세가 가장 중요해요. 발을 어떻게 딛고 그 상황에서 허리 어깨 그리고 관절의 움직임을 어떻게 조절해야 최적의 힘이 나오는지 이거는 지금도 무림에서 연구가 되고 있을 만큼 정말 중요해요.”

초식이랄 것은 없지만 최대한 효율적인 움직임을 가르쳤다. 그렇게 하루하루 실력이 조금씩 늘어가자 어느새 계준은 외부임무를 떠나게 되고 이부성가가 개입하고 있는 모든 사업장의 분쟁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제갈 사혁 암살 실패 건도 이부성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행방을 알 수 없단 말이냐?”

진해창의 역정 섞인 목소리에 형님이라는 자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장주.”

“이놈아! 나한테 죄송해봐야 소용없단 말이다! 주군께서 제갈 사혁을 놓쳤다는 사실을 아시면....”

“일단 화산파로 도망쳤다고 보고하면 어떻겠습니까.”

거짓을 고하자는 말에 진해창은 마음이 흔들렸다.

“주군께 그리 보고 올려도 될 것 같으냐?”

“그 누구도 제갈 사혁의 행방을 모르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오문도 제갈 사혁의 위치를 모르는데 어찌 주군께서 아시겠습니까.”

값비싼 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결국 낭인에 불과한 진해창이었다. 얕은 수로 위기를 벗어나려는 근성은 버리지 못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테크노님 댓글 봤는데 정확히 꿰뚫어보셨습니다.

제갈 사혁이 계준을 잘못봤죠. 그걸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계준을 이부성가와 관련된 일에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이었죠.

처음에는 계준을 정확히 파악해서 같은 편을 만드는 조금 쉬운 방법으로 갔는데

지 잘난 맛에 사는 제갈 사혁이 사실은 계준이라는 인물을 잘못 파악했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본문으로 들어가서 이제야 조금 생각대로 글이 전개되네요.

사실 글을 쓰다가 12시 쯤에 올리려고 보니까 너무 제갈 사혁 답지 않아서 전부 지웠습니다. 솔직히 너무 계략만 가득했습니다. 그 계략도 완벽했고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는 격이 제갈 사혁 다운 거고

완벽한 계략을 꾸며도 적들이 똘똘하게 빠져나가거나 그로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서 빡 돌아야 제갈 사혁 다운데

어제 쓴 글은 너무 모든 게 척척 드러맞아서 기분 나빴습니다.

하지만 전개는 자연스러워서 평소보다 5페이지나 더 썼습니다. 그런데 어제 다 지워버려서.... 하하하.....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만 그대로 올렸다면 제갈 사혁이라는 캐릭터가 죽어버렸을지 모르니 길게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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