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회: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 -->
“그럼 이렇게 하자.”
그로부터 수일이 지나자 전 강호에는 화산파의 후계자인 제갈 사혁이 칠객 송수겸을 두려워해 도망쳤다는 내용의 풍문이 퍼졌다. 송수겸에게 직접 보고하지 않고 우연지사(偶然之事)로 가장해 송수겸에 귀에 들어가게 하려는 진해창의 속셈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제갈 사혁은 당장 진해창의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지만 이왕 계획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일 속셈이었다. 최근에 이부성가 내에서 계준의 대한 신뢰가 높아져 진해창이 형님이라는 자와 함께 계준을 호위무사로 임명하고 데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계획대로 끝낼 수가 있었다.
“계준이 형. 어디 가는 거요? 무슨 짐을 이렇게 챙기쇼?”
“무릉도원(武陵道原).”
전설 속 무릉도원을 빗대어 말한 곳은 무릉도원의 실제 장소인 호남이었다.
“귀주에 물품을 호남으로 밀매하는 임무인데 그 호위를 맡게 됐다.”
제갈 사혁의 가르침 덕에 실력이 빼어나게 좋아진 계준은 최근 이부성가 장주의 호위무사라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그래서 작은 마을에서 사채이자 수금하던 때와 비교하면 정말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계준을 호남까지 보내다니 밀매 물품이 심상치 않음이 분명했다.
“그럼 물건 하나만 부탁할 게요. 이 단필 좀 호남 낙화루 강씨에게 가져다 줘요.”
그냥 낡은 붓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계준은 제갈 사혁의 부탁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갈 사혁과의 관계 때문에 차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냥 강씨면 되는 거여?”
“낙화루에 강씨가 안 되면 용씨도 괜찮고.”
단필을 품에 넣은 계준은 제갈 사혁의 등을 가볍게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단필 속에는 제갈 사혁의 밀지가 숨겨져 있었고 호남 낙화루라면 그것을 눈치 챌 게 분명했다. 호남 낙화루는 지난 날 양전을 잡기 위해 방문했던 하오문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값을 세게 쳐줬기 때문에 아직까지 특별손님 대우를 받고 있는..... 제갈 사혁에게는 앞으로 강호생활을 할 때마다 이용하게 될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계준이 떠난 지 정확히 닷새째 되는 날 계준은 맡았던 밀매 호위를 완벽하게 성공시키고 돌아와 진해창에게 친히 술잔을 받았다. 그냥 호위를 한 것뿐만 아니라 밀매 물품을 노리는 수적들과 맞서 기어이 물건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의 왼팔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그것을 본 진해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라.”
“네 장주님.”
긴장을 했는지 계준의 손은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파르르 떨렸고 그런 계준의 모습을 보며 진해창은 호탕하게 웃었다.
“수적들을 벌벌 떨게 한 사내대장부가 무얼 이리 긴장한단 말이냐!”
“자..... 장주님 앞이라 소인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오냐~ 내 그런 거라면 천번 만번 용서해주마. 크하하하! 마셔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술을 마신 계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장주인 진해창이 눈앞에서 술을 따라주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제갈 사혁 때문이었다.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장주와의 독대가 결정되었고 그때 제갈 사혁이 계준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랑 약속했던 거 기억하지?”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데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었고 듣고 싶지가 않았다.
“그려~ 기억 한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지만 심장이 요통치기 시작했고 두 눈은 제갈 사혁의 입술만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계준이 형 차례야.”
계준은 제갈 사혁이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고 그 다음에 들려온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진해창과 단둘이 술을 마시게 되면 진해창을 죽여줘.”“뭐!”
처음에는 이 아이가 뭘 잘못 말했나 싶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너 그게 진심이야?”
“그래.”
“미쳤어?”
계준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제갈 사혁의 멱살을 붙잡자 그 순간 제갈 사혁이 가볍게 계준의 손목을 부여잡으며 계준을 무력화 시켰다.
“곧 제갈 사혁이 이부성가로 올 거야.”
제갈 사혁이라는 말에 계준은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제갈 사혁은 분명 주군이 두려워 화산파로 도망쳤다고 들었다. 그런데 여기로 온다니 그럴 리 없어.”
“정말이야. 형은 소문 못 들었구나? 나는 한번 그를 본적 있어. 만약 이곳에 나타나면 절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단지 이부성가 패거리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죽일 걸 제갈 사혁이 오기 전에 진해창을 죽여줘.”
제갈 사혁에게 목숨을 보전 받기 위해 진해창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동생 주원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허점투성이였기 때문이다다.
제갈 사혁이 언제 이부성가에 들이 닥칠 줄 알고 지금 하필 이런 때 그런 부탁을 하는 걸까? 만약에 지금 당장 진해창을 죽인다하더라도 그 소문의 제갈 사혁이 진해창을 죽인 바로 ‘그 순간’ 이부성가에 오지 않으면 밖에 있는 다른 낭인들에 의해 조직을 배신한 죄로 죽임을 당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계준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했다. 만약에 이러나저러나 죽는다면......
“주군.”
“무엇이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용히 마루를 밟으며 밖으로 나온 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준이 형 끝났어?”
진해창과 독대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연무장에서 웬 젊은 남자가 계준에게 친근한 듯 말을 걸자 당황했다.
“누구?”
“나야 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계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목소리는 주인공은 주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주원은 얼굴에 흉터가 가득하고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남정네였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누가 봐도 깔끔한 미남자였다.
“진해창은 못 죽였나보네?”
“미안하다. 하지만 제갈 사혁이 언제 나타나는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죽였다가는 내 목숨이.”
제갈 사혁이 언제 나타날 줄 알고 섣불리 진해창을 죽이겠는가? 생각이 없는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내가 진해창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 사실을 진해창에게 말했어?”
“절대 그런 일은 없다. 너와의 약속을 못 지킨 것이 너를 배신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줘라.”
분명 계준은 너를 배신하는 일이라고 말을 했다.
너를? 왜 너를 배신하는 일이라고 말했을까? 계준이 동생인 주원을 배신한다?
계준과 주원 사이에는 약속이라는 윤리적 맹세만 있을 뿐 약속을 저버렸다고 해서 그것을 배신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배신하는 일이라고 말한 것은.
“내가 누군지 감 잡았구나.”
“그래.”
“언제부터?”
“지금 네가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리고 이 지옥을 내게 보여준 지금 이 순간......”
구름에 가려진 달이 빛을 되찾은 순간 서서히 어둠속에 가려진 잔혹한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모래로 가득한 훈련장에는 비록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함께 밥을 먹고 고생하던 이부성가의 식구들이 비명을 지를 세도 없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제갈 사혁은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여태까지 자신이 형님이라 불렀던 자의 시신 위에 앉아 계준에게 물었다.
“진해창을 죽이지 않은 게 제갈 사혁이 언제 올 줄 몰라서였다?”
제갈 사혁의 눈은 더 이상 자신을 형이라 부르던 주원의 눈빛이 아니었다.
“잘 했어.”
잘했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진해창을 죽이지 못하고 그냥 나올 거라 믿었어. 단지 나는 알고 싶었던 거야. 진해창에게 이 사실을 발설해 나를 배신할지? 아니면 ‘나’를 배신하지 않은 채로 제갈 사혁에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시험해보고 싶었어.”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여?”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야. 내가 말했지. 제갈 사혁은 단지 이부성가의 패거리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일 위인이라고.”
그랬었다. 분명.....
“내가 그렇다고.”
처음으로 주원은 아니 그는 말했다. 스스로의 이름을.
“당신은 그냥 괜찮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지만 분명 괜찮은 사람이야.”
“그 이유 때문에 나를 살려주는 거냐?”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게 변명이 되어주는 거야. 나는 내가 적이라 규정하면 절대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야. 나는 내 가치관과 다른 그 무언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사람이지 나도 사람이야.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야.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야. 내가 스스로에게 변명할 수 있도록.”
계준과는 악연도 없었고 갈등도 없었다. 계준은 자신을 동생처럼 챙겨주었으며 제갈 사혁이 대수롭지 않게 삼람을 죽였을 때도 대신 벌을 받았다. 그런 사람을 단지 이부성가의 낭인이라는 이유로 죽일 수는 없었다.
원한이 있으면 되돌려주어야 강호의 도리요. 신세를 지면 갚아야 사람의 도리다.
한낱 강호의 가치관으로 사람의 도리를 저버릴 수 없었다.
“말 되네.”
정막을 깨는 아주 목소리였다.
정갈한 수염과 다림질이 잘된 도포를 입은 중년의 사내는 한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책방주인?”
책방주인이라는 말은 곧 이 동네에 있는 조그마한 서점의 주인을 말하는 거였다.
“서점주인 주인이 여긴 웬일이야?”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서점 주인을 노려봤다.
“진해창이 자주 가는 서점 주인이야.”
계준의 말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시체로 꽃을 피운 마당을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며 이부성가의 대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고 들어오고 이부성가의 장주 진해창이 자주 방문하는 서점의 주인.
“아저씨 보기가 꽤나 힘드네? 책방 주인이면 책방에 있어야 할 것 아냐?”
제갈 사혁은 손에 든 검을 버리고 자신의 애검인 호황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더없이 상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호북 제갈 어른의 둘째 아들의 첫째올시다.”
“운남성 육량현 서점주인 되는 송수겸이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을 쓰는 게 걱정이네요. 다음편이 사실상 이번 에피소드의 클라이막스가 될텐데
솔직히 이번 편 과정이 너무 지루한 감이 있는데 마지막은 확실히 해야죠. 확실하게!
제갈 사혁이 교육자로서 성장해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질까요? 라는 질문이 계셨는데
설마요.옛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자는 평생 그래. 라는 말.....
보고 느끼고 즐기고 후회하고 눈물 흘리고 살아도 제갈 사혁은 평생 그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