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회: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 -->
이부성가를 뒤져서 적당히 낭인처럼 보이는 옷을 입은 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저마다 분장을 통해 가짜흉터를 만들었다.
“우와~ 선배 기술 좋네요.”
“이 놈아. 강호를 살아가려면 분장술은 잡기 중에 잡기야.”
자연치유력을 이용해 일부러 상처를 만들고 지우는 제갈 사혁에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진이는 빠지는 게 어떠냐? 송수겸이랑 싸우느라 부상도 입었는데.”
부상이야 슬슬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있었지만 괜히 여기서 ‘아이 뭐 이 정도가지고’ 라고 말해봐야 선배들 성격에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조신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괜찮습니다. 일 벌려놨는데 끝까지 해야죠. 에이~ 선배님들 이 정도로 죽겠습니까.”
일단 만왕검가에는 화산지회 선배들이 먼저 가기로 했다. 지나가던 나그네를 연기한 후 화산지회라고 밝혀 하루 묵을 셈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게 바로
“소류가 아들 놈 옆에 붙어라. 가장 어린 네가 붙어야 무진이가 덤벼들었을 때 한방에 나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너무 노골적으로 소류 선배가 떨어져나가도 그러니 약간 약속된 합을 맞춰 놓는 게 어떨까요?”
“그러다 실패하면?”
“제가요? 설마요!”
일반적으로 나이가 어린 만큼 그 무리에서 가장 약하다는 편견이 있기 때문에 일이 터졌을 때 가장 나이가 어린 소류가 만왕검가 아들의 옆에 붙어 있으면 소류의 옆에 있는 자가 만왕검가의 외아들이고 이부성가의 낭인으로 분한 제갈 사혁이 외아들의 팔을 베어버린다. 이게 이번 일의 최우선 사항이었다.
“그럼 그건 둘이 알아서 상의하고 일단 무진이는 소류의 왼팔을 베고 소류는 왼팔에 질긴 가죽으로 몇 번 덧붙여서 뼈가 상하지 않게 하고 만왕검가 가주는 내가 맡는다.”
이왕이면 만왕검가의 가주 정도는 확실하게 죽이는 게 좋았다.
서류에 나온 대로라면 가주에게 형제가 둘이나 있지만 가주가 죽고 외아들이 팔이 잘리면 그때부터는 뻔하다. 서로 가주가 되기 위해 싸우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정통후계자가 그 자리에서 밀려나면 그 가문의 뒷일은 안 봐도 훤했다.
일단 계획을 짜둔 후 몇 명은 남아서 이부성가에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몇 명은 만왕검가를 급습하기 위해 몇 명은 만왕검가에 신세를 지기 위해 편을 나눠 이동했다.
어둡고 습한 밤공기를 가르며 경공을 펼친 제갈 사혁과 화산지회 선배들은 다음날 아침이 돼서야 만왕검가에 당도 할 수 있었다.
먼저 침투조가 만왕검가에 들어가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예상보다 늦어서 아침에 도착했기 때문에 잠자리를 구하러 들어가는 설정은 무리인 이상 가장 나이가 많은 선배의 의견에 따라 그의 팔에 작은 검상을 입혀 치료를 받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계십니까?”
경원이 만왕검가의 대문을 두들기자 건장한 사내 한명이 문을 열고 나왔다.
“누구십니까?”
“저희는 화산파 동문회인 화산지회라고 합니다. 친목행을 가던 중 부상을 입어서 그런데 치료를 좀 받을 수 있습니까?”
이미 정파를 배신했기 때문인지 그의 반응은 그다지 화산지회를 반가워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아직까지 대외적으로 만왕검가는 정파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섣불리 거절하지 못했다.
“가주님께 물어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그러고는 문을 닫아버리자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소류는 이를 갈았다.
“이런 미친! 화산파라고 하면 대문을 활짝 열고 어서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고 해도 모자를 판에 이 변절자 새끼들!”
“야야..... 표정관리 표정관리.”
경원이 웃는 얼굴로 소류의 옆구리를 찌르자 소류는 일부러 입 꼬리를 올리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가주가 나타나 안으로 들이자 침투조가 들어가는데 성공한 것을 본 습격조는 만왕검가 주변을 살폈다.
“무진이가 먼저 지나가는 사람처럼 한번 쓱 훑어보고 나머지 사람들이 시간 간격을 두고 둘러봐라.”
어차피 습격하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남았기 때문에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만왕검가의 저택을 관찰했다.
“경비서고 있는 자식들 별거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다 죽이죠. 죽이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가끔 정말이지 후배지만 선배들이 보는 제갈 사혁은 말 하나 하나에 특히 적을 두고 있을 땐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넌 기절이라는 방법은 모르냐?”
“사나이 인생에 죽느냐 사느냐만 있을 뿐이죠.”
“한 놈은 살려 그래야 딴 놈들이 우르르 몰려오지.”
밤이 되자 예정대로 만왕검가를 습격할 준비를 갖춘 뒤 이부성가의 낭인들이 가지고 다녔던 금장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럼 일단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따라들 오세요.”
제갈 사혁이 가장 앞서서 만왕검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 순간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가뿐하게 뛰어올라 만왕검가의 담장 위에 올라간 제갈 사혁은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들어 경비를 서고 있던 두 명 중 한명에게 던졌다.
“!”
“웬놈이냐!”
두 명을 한꺼번에 죽이지 않은 건 방금 전에도 화산지회 중 한명이 말했 듯 일부러 소란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제갈 사혁이 검을 뽑아들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경비는 재빨리 만왕검가 안으로 들어가 습격자가 나타났음을 알렸다.
“적습니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방문을 열고 만왕검가의 식솔들과 아침에 이곳에 온 화산지회 침투조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곧 제갈 사혁의 등 뒤로 화산지회 습격조가 나타나고 만왕검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제갈 사혁은 검격을 날려 만왕검가의 사병들을 종잇장 자르듯이 자르고 서둘러 선배인 소류를 찾았다. 소류가 서둘러 20대 후반의 남자를 보호하자 그가 만왕검가의 후계자임을 깨달은 제갈 사혁은 온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마치 사람을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소류에게 달려 들었다.
소류가 예정대로 낙영검법(落英劍法)을 펼쳤다. 그리고 제갈 사혁은 약속된 움직임을 보이며 가죽으로 보호한 소류의 왼팔을 살짝 베어내고 만왕검가 외아들의 복부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러자 만왕검가의 외아들은 그 충격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이틈을 타 오른팔을 베어냈다.
“으아아아!”
“룡아!”
아들의 비명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만왕검가의 가주였고 이때가 되자 가주를 노리기로 했던 자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선배에게 검을 휘둘러 그의 허벅지를 벴다. 이 역시도 서로간의 약속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있던 다른 자 내공이 깃든 검을 만왕검가의 가주에게 던졌다.
“가주님!”
사병 하나가 몸을 던져 이를 막았지만 이를 본 제갈 사혁이 바닥에 떨어진 창 하나를 들어 만왕검가 가주를 향해 던졌다.
“큭!”
각도가 조금 틀어졌지만 비스듬하게 몸을 관통하자 제갈 사혁은 재빨리 뒤돌아서서 담장을 넘었다. 그러자 모두 제갈 사혁의 뒤를 따라 만왕검가를 넘었다.
“가주님이 돌아가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쫓아라!”
중년의 남자가 사병들을 향해 소리치자 침투조로 들어온 화산지회는 살짝 분위기를 보더니 이내 습격조를 뒤따라가며 마치 끝까지 뒤쫓아 적들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것처럼 행동하며 만왕검가의 사병들이 따로 움직이는 것을 막았다.
“적들이 아직 근처에 있을 수 있소! 그대들은 경비를 서고 여긴 우리한테 맡기시오!”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그 난리를 치고 다음날이 되자 제갈 사혁은 멀쩡한 사복차림으로 만왕검가를 찾았다.
“선배님!”
“무진아!”
평소에는 서로 안아주기는커녕 악수도 하지 않으면서 경원과 무진은 얼싸 안으며 서로를 반겼다.
“이 무슨 변고입니까. 선배님!”
제갈 사혁은 경원의 몸을 훑으며 애써 걱정하는 척 연기를 했고 경원은 거짓 눈물을 흘렸다.
“운남 무림의 기둥인 만왕검가의 변고에 비하면 우리 같은 놈들의 피해는 어디 부끄러워서 말할 수 있겠느냐.”
두 사람의 재회(?)가 끝나자 경원은 슬픔에 빠진 만왕검가의 식솔들에게 제갈 사혁을 소개했다.
“만왕검가의 동도님들 여기 보십시오. 저의 후배인 제갈 사혁 무진입니다.”
“제... 제갈 사혁?”
“그 제갈 사혁이란 말인가?”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을 대는 순간 만왕검가의 사병들과 식솔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화산파의 속가 제자들이라기에 혹시나 했는데 설마 화산파의 정통 후계자를 부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 습격한 놈들의 정체는 알아보았느냐?”
“죄송합니다. 아직......”
제갈 사혁이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고 하자 가장 나이가 많으며 형식상 가주를 지키다가 부상을 입은 다른 선배가 제갈 사혁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제갈 사혁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뺨을 만졌다.
“이 놈아! 만왕검가란 말이다! 만왕검가의 가주께서 목숨을 잃으셨단 말이다!”
“선배 참으시지요!”
경원이 서둘러 말리는 척을 하자 이를 본 만왕검가의 식솔들도 서둘러 가세했다.
“대협 참으시지요.”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주위에서 하나 둘 말리자 분을 참아내는 척을 했고 제갈 사혁은 경원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증스럽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만큼 완벽한 연극이었다.
“반드시 놈들의 정체를 알아내겠습니다.”
제갈 사혁이 살기를 드러내며 그들을 반드시 찾아낼 것이라며 다짐을 하자 만왕검가의 몇몇이 불안한 듯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음... 만왕검가 내에서도 이번 일의 실상을 아는 건 몇 명 되지 않는군.)
제갈 사혁은 빠르게 분위기를 읽어냈고 흉수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가려는 사람처럼 만왕검가를 나섰다. 그리고 밤이 되자 제갈 사혁이 다시 한 번 이부성가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나머지 화산지회 사람들과 함께.
“그래 흉수는 누구냐?”
“이부성가라고 여기서 알아주는 장원입니다.”
이부성가라는 말에 몇몇 사병들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만왕검가 식솔들 내에서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과 묘하게 다른 반응이 나왔다.
“장원? 그래 거기가 어디냐 앞장서라!”
“선배 여기 계시지요. 이부성가는 칠객 송수겸의 사조직이라고 합니다.”
침투조를 끝까지 여기에 남게 하려는 건 자칫 만왕검가 내에서 복수를 하겠다며 따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럼 곤란하지.)
복수라는 이름의 동기만큼 제갈 사혁을 귀찮게 하는 것은 없었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하지만 예상대로 만왕검가의 몇몇의 반응은 격렬했고 제갈 사혁은 일부러 만왕검가의 다른 식솔들에게 말했다.
“이분들 좀 말려주십시오.”
제갈 사혁은 노골적으로 특정다수의 몇몇에게 말려줄 것을 권했고 말하지 못할 속사정이 있는 몇몇이 그들을 말렸다.
“룡아!”
제갈 사혁에게 팔이 잘린 만왕검가의 후계자가 팔에 붕대를 감은 채 나타나 제갈 사혁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아비의 원수를 부탁하자 제갈 사혁은 그를 부둥켜안으며 말했다.
“피는 피로서 씻어내며 모든 것은......”
(계획대로.)
“정의를 위해 반드시.”
만왕검가의 가주를 죽인 것도 그리고 그 아들의 팔을 베어낸 것도 제갈 사혁이지만 애초에 제갈 사혁은 그러한 일을 한 기억자체가 없었다. 단지 어제 저녁 사파의 한 지도자와 그 무리를 처단한 기억만 있을 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제갈 사혁에 의해 송수겸이 죽었다는 소문이 무림에 퍼지게 되고 만왕검가 습격사건과 송수겸의 사조직인 이부성가로 인해 무림맹에서 조사가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은하검파의 변절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흑랑대주와 운남의 천태파가 은하검파를 멸문시킨다.
만왕검가의 변절과 관련된 서류는 이미 화산지회에서 손을 쓴 상태라 만왕검가는 멸문의 겁화를 피해갔으나 얼마 후 전 가주의 동생에 의해 권력이동이 이뤄지게 된다.
이틀 후 하남(河南) 양귀비 밭.
“도련님.”
제갈세가의 사병단체인 무풍대가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사내 한명을 무릎 꿇리자 제갈 사혁이 곰방대를 물고서는 거만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이는 다름 아닌 진해창이었다. 자기 딴에는 도망친다고 쳤지만 그래봐야 제갈 사혁의 손바닥 안이었다.
진해창은 이번 일과 관련해 유일하게 살아 있었으며 하남에 있는 이부성가 소유의 양귀비 농장에 숨어 있었지만 절대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는 제갈 사혁에 의해 기어이 그 꼬리가 잡혔다.
제갈 사혁은 애초에 계준만 빼고 나머지를 다 죽일 속셈이었다. 설사 진해창이 아니라 이름 없는 피라미가 이부성가에서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이렇게 반드시 자신의 면전에 무릎 꿇렸을 것이다.
“너 하남에 살지? 나 사천 산다.”
화산파는 섬서에 있지만 제갈 사혁의 실제 거주지는 사천 무림맹이다.
“하남 사는 놈은 사천 사는 놈한테 죽는다. 그게 얼마나 좇 같은 건지 내가 보여줄게.”
진해창을 없앰으로서 제갈 사혁은 이부성가에 관련된 관련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양귀비 다 태워버리고 여기서 일하는 새끼들 다 쫓아내.”
“네 도련님.”
============================ 작품 후기 ============================
지문관련해서 지웠습니다.
저도 아무리 그 시대에 맞게 조사를 하고 그래도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네요.
그냥 상식적으로 지문을 남기면 안되겠거니 싶었습니다.
실수였고 의도한 것도 아니라서 지웠죠. 앞으로도 그런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그리고 1000번째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