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04화 (104/262)

<-- 104 회: 하오문 난립(下午門 亂立) -->

오랜만에 무림맹에 돌아온 제갈 사혁은 청하와 함께 청하의 취미생활을 함께 했다.

청하의 취미는 분재 가꾸기다. 조금 아저씨들 같은 취미지만 청하가 유년시절을 보낸 무당파는 그야말로 아저씨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취미라 봤자 중년 아저씨의 번뇌가 느껴지는 취미일 수밖에 없었다.

“소나무를 송백 분재라고 해요. 대부분 이걸 선호하는데 잡목 분재라고 또 있어요. 그게 뭐냐면......”

몇 시진 째 기본 상식만 배우고 있어서인지 슬슬 이 사람이 과연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맞는지 조차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말은 말인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물도 주고 가지도 잘 쳐야 하는데 이게 또 기술이......”

물이 어쩌고저쩌고 기술이 어쩌고저쩌고 제갈 사혁은 처음 무공을 배우는 신출내기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관심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청하가 가지를 치는 가위로 제갈 사혁의 머리를 두들기자 제갈 사혁은 얼빠진 정신을 추리고 당당하게 외쳤다.

“관심 있습니다. 정말로 항상 생각하는 걸요.”

“나 말고요. 분재 말이에요.”

그러면서 청하는 수줍은 듯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철없는 아들을 보는 엄마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만할까요?”

“네. 솔직히 버겁네요.”

제갈 사혁의 나이 스물 하나 하고도 지난 생애까지 합해 마흔여덟 호감만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가만히 보면 공통점이란 게 하나도 없죠.”

솔직히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서로에 관해 진지하게 알아가기로 마음먹은 후로는 특히나.

“이번엔 갈사 소협의 관심사를 이야기해보세요.”

“가을에는 귀뚜라미 시합이 최고....”

“그건 됐어요.”

“요즘에 인기가 있는 주사위.....”

“도박 말고요.”

도박이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청하의 표정이 좋지 않자 제갈 사혁의 청하의 두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사실은 도박이 취미가 아니라 일부러 져주는 겁니다. 내공을 쓰면 상대방이 속임수를 쓰는 게 눈에 보이거든요.”

일부러 져주다니? 도박을 좋게 보는 건 아니지만 논리적으로 도박을 하는 이상 무조건 이겨야 했다.

“애송이들이 밑장 빼기며 허튼 수작 부리는 걸 보면 여간 귀여워서 말입니다. 돈을 잃어주고 싶습니다.”

“왜 그런 게 취미죠?”

“돈이 썩어나니까요.”

도박에 돈까지 헤프게 쓰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결국 이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무림인으로서의 대화뿐이었다.

“송수겸을 쓰러트렸다면서요?”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깟 놈.”

거들먹거리며 송수겸을 한 없이 깎아내리자 청하는 입술을 쭈뼛거리며 제갈 사혁의 손을 붙잡더니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한층 편안해진 표정으로 아까의 질문을 다시 했다.

“송수겸을 쓰러트렸다면서요?”

그러자 제갈 사혁은 식은땀을 흘리며 무의식중에 자신의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죽는 줄 알았어요. 그 개새끼가 주먹을 날리는데 뼈가 진동을 하고 술 마신 것도 아닌데 오장육부가 막 뒤틀리고 와~ 진짜 죽겠더라고요. 그 새끼가 내 복부에 주먹을 연타하는데 난 자존심 때문에 안 아픈 척 했어요. 이 새끼가 내가 정말 안 아픈 줄 알고 때린 곳을 또 때리는데 그때 눈물이 그냥......”

남이 없는 곳으로 향하자 제갈 사혁은 방금 전에 허세는 어디가고 당시 정말 몸과 마음을 다해 느꼈던 생생한 감정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것은 청하가 서로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눈치 챈 부분이기도 했다. 간혹 남자들이 체면상 쎈 척할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무시하지만 제갈 사혁의 체면치레 허세는 그 밑도 끝도 없이 허풍의 연속이라서 꼭 거짓말쟁이에 말썽꾸러기 아이 같은 게 듣고 있으면 묘하게 즐거웠다.

“그래서요?”

“암흑 대력권인가 뭐 그런 거 쓰던데 단전을 봉인하더라고요. 저야 뭐 단전 안 쓰니까 신나게 두들겨 패줬죠.”

단전을 안 쓴다는 이야기는 이신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한 사람을 보니 정말 기분이 묘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청하의 숙소에서 차를 마셨다.

“령령~ 나는 유자차로.”

그것도 그녀의 스승과 함께.

“령령은 뭡니까?”

“우리 청하 본명이지 그때 나는 뭇 여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던 젊은 무림인이었고 그런 내게 무공을 배우고 싶다며 찾아온 게 이 녀석이었지. 당시 순수하고 순진했던 나는 그만 이 녀석을 제자로 들이는 실수를 해버린 거야. 그 길로 나 성제의 청춘은 끝이 난 거야. 절세 고수에 절세 미남 소리를 듣던 내가 애 딸린 아저씨가 돼버린 거지.”

성제는 청하와 다르게 꽤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사교성 뛰어난 형님 같은 분위기를 가졌는데 남자로서 너무 이야기가 잘됐다. 어쩌면 제갈 사혁의 허세를 아무 문제없이 받아 넘기는 청하의 대범함은 그녀의 스승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갈싸군.”

“제갈 사혁입니다.”

“청하한테는 애칭을 불리면서 나한테는 너무하는군. 갈싸군.”

“그냥 아무렇게나 부르세요.”

도저히 이 사람의 성격상 절대 하지 말란다고 안할 사람이 아니기에 제갈 사혁은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알았네 사혁군.”

하지만 포기하자마자 성제는 제갈 사혁의 이름을 똑바로 부르며 천하의 제갈 사혁에게 주화입마에 버금가는 허탈감을 안겨주었다.

“스승님 그만하세요. 보통사람은 스승님 분위기를 못 따라가요.”

이런 사람 밑에서 청하가 자랐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성제가 좋은 스승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어른인 것만은 확실하다. 권위적이지 않는 대신 상대를 이해하려 하는 그런 사람 적어도 제갈 사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 최신작이 나왔는데 한번 볼 텐가?”

“어머~ 벌써 완성됐어요?”

갑자기 무슨 두루마리를 꺼내자 제갈 사혁은 최신작이라기에 난초 그림이나 풍경화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춘화였다. 게다가 더욱 더 충격인 것은 청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작품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이거 누굴 기초로 잡은 거예요? 그냥 상상으로만 그리기에 이번 건 사실감이 넘치는데요.”

“호란(呼蘭) 명례.”

“아~ 그 유명한 기녀 말이에요. 정말 이렇게 생겼어요?”

“게다가 직접 봤지~ 어느 남정네와 일을 치루고 있기래 몰래 한 획 그었어.”

순간 제갈 사혁인 이 두 사제지간의 대화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다 떠나서 청하는 여인이 아닌가? 그런데 마치 양기 충만한 남정네 같은 대화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사혁군 선물이네.”

춘화를 건네주자 제갈 사혁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갈사 소협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요. 겉보기는 이래보여도 서른 네 번째 첫사랑을 가슴에 간직할 정도인걸요.”

“서른 세 번째입니다.”

순간 서른 네 번째는 당신입니다. 라고 울면서 말하고 싶었지만 그걸 말해버리면 남자의 소중한 그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다시 봤네 사혁군.”

제갈 사혁의 성격상 그럴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갈 사혁은 한량처럼 기녀를 옆에 두고 안을 순 있지만 잠자리에서 여인을 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명문가 출신이라서 이성교육이 엄격했을 뿐만 아니라 인격형성이 될 때쯤 화산파에서 성장하면서 그런 영향이 더 강해진 것도 있었다. 요컨대 남자로서 즐길 건 즐기지만 책임질 짓은 절대 하지 않는 주의였다.

“그런데 말이야. 명례가 안고 있던 남자가 호사마(豪史魔)였단 말이지.”

호사마 그 특이한 이름을 가진 자는 전 무림에 단 한명 밖에 없었다. 바로 마교의 교육 교관으로 유명한 그 자밖에.....

호사마는 마교에서 전투의 기본적인 틀을 잡아주는 사람인데 과대포장하자면 마교인들의 스승쯤 되는 인물이다.

“호사마가 호란 명례와 잤다는 게 이상하잖아. 호란이 있는 곳은 사천인데 말이야.”

여태까지 두 사제의 대화를 춘화에 관련된 음담(淫譚)정도로 하찮게 취급했지만 마교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상하잖아. 마교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호란 명례가 미녀긴 하지만 죽을 각오를 하고 정파의 요충지에서 안아볼 여인은 아니지. 그 정도 미인은 저기 저 미인도에 나오는 화접 정도는 돼야지. 아 그나저나 저거 갖고 싶다. 당대 최고의 미인인 화접의 미인도라니.”

“안돼요. 저건 제거예요. 스승님.”

“화접이 정말 강서 그 인간 애인이야? 별 일이네 그 양반~ 생긴 건 평범한 동네 아저씬데 말이야.”

“갈사 소협이 그랬어요. 맹주님께 직접 들었다고.”

“정말이야 사혁군?”

이야기가 자꾸 옆으로 돌지만 아무튼 마교가 관련 된 일이었다.

“그것보다 호사마가 사천에 나타난 거 성제 진인께서 알고 계시면 무림맹 간부는 다 알고 있겠네요? 무림맹은 그거에 관해 어떤 분위기입니까?”

“나야 무림맹에 말 못했지. 한참 다음 맹주를 뽑을 시기고 명문 정파에서 또다시 맹주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걸렸는데 이 시기에 말하면 호사마 정도는 피라미 취급할 걸. 혹시 모르지 도오 그 양반은 좀 다를 지도.”

일부러 화산파 출신의 무림맹 장로이자 제갈 사혁의 사숙인 도오의 이름을 언급하는 걸로 봐선 제갈 사혁에게 이번 일을 떠넘기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호사마를 잡아오면 되는 겁니까?”

“잡으면 안 되지 이 가을에 잠자리가 날아다니지 않으면 가을 정취가 안 느껴지잖아. 잠자리는 꿀을 먹지 않는데 왜 이 먼 곳까지 날아와 꽃 위에 앉았을까? 그걸 알아내야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란하게 설쳐서 호사마 머리통 가져오지 말고 머리통 대신 정보를 가져오라는 말이었다. 요즘 강호의 정세가 이상하다지만 뜬금없이 마교의 인물이라니 정말 별 일이었다.

호사마라? 이 일에 별로 흥미는 없지만 성제에게 점수 따놓을 기회 중에 기회였다.

이번 일로 얻을 수 있는 건 전 재산을 걸어도 얻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

득과 실을 빠르게 계산해낸 제갈 사혁은 자신의 숙소 방문을 발로 차고 이신을 불렀다.

“이신 가자!”

패기 넘치게 외쳤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요즘 너무 방치했어. 이러면 부모로서 꽝인데 말이야.”

무림맹에서 이신의 행동반경이라 봐야 그리 넓지 못하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대뜸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식당에서도 이신을 만날 수 없었다. 오히려 식당에서 만난 사람은

“여어~ 제갈!”

“지곤이냐.”

후기지수인 지곤이었다.

“내 제자 못 봤냐?”

“그 예의바른 아이 말이지. 미려랑 어디 가던데.”

“뭐?”

미려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짜증이 밀려왔다. 그렇게 남궁세가 놈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귓구멍에 버섯이 자랄 정도로 말을 했는데 사춘기도 아닌 녀석이 더럽게 말을 안 들어 쳐 먹었다. 보나마자 어디서 또 아가씨 아가씨하면서 시중들고 있을 게 뻔했다.

무림맹을 이 잡듯이 뒤지다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훈련장에서 이신을 발견한 제갈 사혁은 이신을 보자마자 한 소리 하려 했지만 도저히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하합!”

이신은 남궁 미려의 시중을 들고 있던 게 아니었다. 이신과 남궁 미려는 비무를 펼치고 있었다.

남궁 미려의 풍뢰멸세(風雷滅世)는 그 기세가 대단했다. 이미 남궁 미려는 제갈 사혁이 가늠하던 정도의 실력을 벗어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신도 슬슬 격체전공한 무공들을 제대로 구하고 있었는데 몸 움직임이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반보 종보 횡보를 아주 적절하게 섞으면서 역공을 펼칠 때 1초라도 더 빠른 공격을 구사하기 위해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남궁 미려의 검을 피해냈다.

이신이 역공을 하려고 하자 남궁 미려는 천풍검법(天風劍法)으로 검로를 바꿔 이신을 압박했고 이신이 왼 주먹을 뻗은 순간 그보다 먼저 이신의 관자놀이에 남궁 미려의 연검이 닿으려 했다. 순간 제갈 사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그 순간 이신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오행매화보는 사기야!”

아니 그것은 오행매화보라기에 분명 발을 딛는 방법도 이동 경로도 전혀 달랐다.

오행매화보는 애초에 상대의 이지를 제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보법이다 옆으로 이동하는 보법이 절대 아니었다.

“유운보(流雲步)에요. 청화 누나가 가르쳐 준 건데 잘 썼는지는 모르겠네요.”

청하의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남궁 미려는 머리를 긁적였다.

“친해? 그 무당의 청하와....”

“네.”

“좋아해?”

좋아 하냐며 묻는 남궁 미려를 보며 제갈 사혁은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이신은 다시는 볼 수 없을 만큼 멋진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네. 정말 정말 좋아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남궁 미려는 손에 쥔 검을 떨어트렸고 제갈 사혁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제갈 사혁은 서둘러 두 사람 사이에게 끼어들었다.

“얌마! 찾았잖아!”

“사부.”

제갈 사혁의 등장에도 남궁 미려는 넋이 나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신 가자! 네가 너무 너무 좋아하는 청하가 기다린다.”

“정말요!”

일부러 너무 너무 좋아하는 청하를 언급하며 제갈 사혁은 들으란 듯 외쳤고 그런 속내를 모르는 이신은 반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남궁 미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에도.”

제갈 사혁이 있기 때문인지 아가씨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남궁 미려를 대하는 이신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었다.

사제지간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가던 중 제갈 사혁은 스스로도 유치하다는 걸 충분히 알지만 그래도 이신에게 물었다.

“야 청하 소저가 좋냐? 내가 좋냐?”

“당연히 사부죠.”

“그렇지?”

청하가 없을 땐 제갈 사혁이 제갈 사혁이 없을 땐 청하가 좋다는 회심의 농담으로 마무리 하려 했는데 제갈 사혁이 진지하게 기뻐하자 차마 치고 들어갈 순간을 놓쳐버린 이신은 준비해둔 농담을 꺼낼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옛날부터 생각해뒀던 하오문 난립편입니다.

하오문의 제각각인 운영방식 (청하의 서신을 빼돌려 마교에 뿌린 거 사천에서 인신매매 남궁이화의 정보를 흑사련에 넘긴 거)은 다 이 내용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불안하긴 하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