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회: 흑운 공주 -->
호사마와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한 건 식사시간 때였다.
정파와 마교인이라고 하지만 일단 무공 초식이나 특정 심법에 의한 기파를 내뿜지 않는 이상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간파하는 건 여간해서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호사마는 제갈 사혁과 청하가 정파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운 낭자 많이 힘들지 않았나?”
흑운이라는 이름이 본명은 아니지만 호사마는 흑운 공주를 운 낭자라 부르며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
“아니요. 아저씨 별로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흑운 공주는 호사마를 본 게 이번이 처음이지만 할아버지의 지인이기 때문에 아저씨라는 호칭을 썼다.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군.”
호사마의 추정 나이는 약 50대지만 겉보기에는 이미 육십이 다되어 보였다.
“그쪽이 이번에 함께 동행한 하오문의?”
괜히 제갈 사혁 일행에 대해 묻자 흑운 공주는 당황해하며 제갈 사혁 일행을 소개했다.
“아! 안휘성 분타주님의 호위무사 분들이에요. 제가 신강에 도착하는 것까지만 보시고 가실 거예요.”
신강까지 동행하는 건 어디까지나 호사마 일행이 신강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이야기지만 말이다.
제갈 사혁은 식사하는 내내 주위를 둘러봤다. 과거에는 흑운 공주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어찌됐든 이번에도 흑운 공주는 죽을 것이다. 제갈 사혁이 나서지 않는 한.
그렇다면 흑운 공주를 살려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호사마에 대한 처리가 문제였다. 미래를 알고 있다 해도 이미 청하를 구해낸 시점에서 많이 틀어져버렸다. 만약 호사마를 처리할 정도의 실력자가 오지 않는다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호사마의 생사였다. 제갈 사혁 본인 스스로가 호사마를 죽여선 안 되기 때문에 이래저래 까다로운 게 많지만 죽이고자 한다면 못 죽일 일도 없었다.
“왜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지? 적습이라도 있을까봐 불안한가?”
너무 노골적으로 주위를 둘러봤기 때문인지 호사마의 이목을 끌었고 이를 옆에서 보고 있던 청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침착하게 감정을 제어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직업병이지요. 저희는 ‘호위무사’니까요.”
분타주의 호위무사라는 점을 언급해 주위를 살피는 둥 하는 행동을 정당화 시켰다.
“그런데 저쪽은 호위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군.”
이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 아이는 도박장 바람잡이입니다. 아가씨의 말동무로 데려왔지요.”
제갈 사혁의 변명과 거짓말은 전혀 망설임이 없었고 이를 듣고 있던 청하는 새삼 제갈 사혁의 대화능력에 감탄했다. 보통 이런 거짓말을 해야 할 경우 2~3초 정도는 대답을 머뭇거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박장 바람잡이가 뭔가?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여색을 즐기고 하오문 문주의 지인되는 자가 그런 걸 모를 리 없었다. 이미 이 질문을 한 시점에서 호사마는 제갈 사혁 일행을 떠보고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출발 전날 동행하게 됐으니 말이다.
여기서는 제갈 사혁의 경험이 필요했다. 바로 안휘성 도박장을 이용했던 경험이 말이다.
“어린아이를 바람잡이로 키우지는 않습니다. 이 아이는 정확히 말하면 아직 바람잡이가 아니지요. 저희 분타의 도박장은 아무래도 남궁세가의 눈치를 봐야하기 때문에 크게 사업을 하지 못합니다. 작고 은밀하게 운영할 뿐이죠. 그렇다보니 바람잡이나 소몰이꾼과 같은 사람에 투자합니다. 질문하신 바람잡이는 손님들의 옆에서 손님으로 가장해 판돈을 올린다거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죠.”
남궁세가의 눈치를 봐야하는 안휘 분타의 특성과 밤놀이를 자주 즐기는 자신의 경험을 섞어 진짜 같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호사마는 그 거짓말에 속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람잡이 같은 거 아무나 시키면 될 일을 이렇게 따로 교육시키다니 대단하군.”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흑운 공주도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하는 제갈 사혁이 정말 대단해보였다.
가시방석 같았던 식사를 끝내고 다시 흑운 공주의 마차에 보인 네 사람은 묘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제갈 사혁 일행은 서로 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셋이서만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흑운 공주와 친한 척 이야기 나눌 수도 없었다.
(청하 소저 말이라도 걸어 봐요.)
이 어색한 침묵이 참기 힘들었던 제갈 사혁은 같은 여인인 청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뭘 어떻게 하죠?)
(자수나 뭐 그런 여성스러운 취미 있잖아요.)
(그런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무당파에서는 오직 무공수련 뿐이었기 때문에 여성스러운 취미라고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저기......”
어색한 침묵이 힘들었던 것은 흑운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오자 제갈 사혁과 청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흑운 공주에게 대화를 유도했다.
“말씀하세요.”
“어떤 질문을 하셔도 다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어렸을 때 두 분은 어떠셨어요?”
대화를 풀어나가기 가장 적당한 주제였다. 취미가 다를 수 있고 취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누구나 어린 시절을 겪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먼저 청하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에서 지냈던 일과 스승을 만나고 또 스승의 제자가 되었던 일까지.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죠.”
“운명적이네요.”
“사제관계는 항상 운명적이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제갈 사혁 쪽으로 넘어오자 청하의 눈치를 보던 제갈 사혁은 갑자기 뜸을 들이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루는 용화장이라는 곳에 잠복을 했습니다. 마교의 세작이 있다는 증거가 있었거든요.”
용화장이라는 말에 청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수하라는 아름다운 소저의 소개로 잡일꾼이 되어 용화장에 잠입한 저는 어느 날 용화장 심부름으로 멀리 가게 됐는데 돌아오는 길이 너무 어쩔 수 없이 객잔에 머물게 됐습니다. 돈이 없어서 방 하나만 잡게 됐는데 피 끓는 청춘이었던 두 사람은 그날 밤.......”
“그런 일 없었거든요!”
제갈 사혁의 농담에 청하는 있는 힘을 다해 한손으로 제갈 사혁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신과 흑운 공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청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수하가 저에요. 저도 잠입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때 갈사 소협과 처음 만났죠. 이때 갈사 소협은 갈사 혁이라는 가명을 쓰셨어요.”
정확히 말하면 제갈 사혁이라고 말했는데 청하가 잘 못 알아들은 게 이 애칭이 만들어진 계기였다.
“아~ 그래서 청하 누나는 사부를 항상 그렇게 불렀던 거네요.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 그 날 밤 그~ 피 끓는 청춘 이야기는 진짜인가요?”
“그럴 리 없잖아요.”
제갈 사혁의 조금은 경박한 농담에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인위적이었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으악!”
이야기꽃이 활짝 만개할 때 쯤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그 순간 마차가 멈췄다.
“무슨?”
흑운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제갈 사혁은 흑운 공주를 제지했고 청하와 이신에게 눈치를 주었다.
“알았어요.”
청하가 제갈 사혁의 뜻을 알아채고 흑운 공주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신은 흑운 공주의 왼쪽에 앉아 보호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 사혁은 천천히 마차 문을 열었고 곧 쇠붙이가 만들어내는 요란하고 익숙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문을 통해 흑운 공주를 데리고 도망쳐요.”
“이 마차는 문이 하나라 다른 문은 없어요.”
“무슨 소리에요? 문이야 만들면 되죠.”
그 말을 이해한 청하는 반대쪽 벽을 발로 차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었고 모두 반대편 구멍으로 빠져나가자 제갈 사혁은 마차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 두 사람의 대결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구경했다.
암살자 특유의 검은 두건과 검은 옷을 입고 난입한 암살자는 암살자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난리를 쳤다. 호사마를 따라온 마교인들을 전부 베더니 급기야 밖으로 나온 호사마와 싸우기까지 했다. 아무리 봐도 은밀하게 상대를 처리하는 암살자와 거리가 멀었다.
(암살이란 건 말이지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살해하는 걸 말하는 거야 이 미친놈아.)
두 사람의 대결은 역시나 암살자 쪽이 우위에 서있었다.
(역시 호사마보다 강하네.)
호사마의 검법은 시종일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르고 베기보다는 간결하게 찌르는 동작이 많았다.
(눈으로 다 보기 힘들 정도야. 그걸 전부 막아내다니 대단한데.)
하지만 이것을 방어해내는 암살자 쪽도 제법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제갈 사혁은 암살자의 검법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마교의 검법의 일종인 벽산파(壁山破)를 펼치는 순간 그것을 방어해낸 암살자의 검초는 만화귀천(卍花鬼穿)이었다. 그리고 이 초식은 다름 아닌
(배극구검!)
설마하니 배극구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과거 금광수가 사용했고 최근에는 그 무공이 살막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바로 그 배극구검이었다.
제갈 사혁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인생 언저리에는 항상 배극구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살막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순간 고민이 됐지만 제갈 사혁은 곧 마음을 바로 잡았다.
(집중하자. 지금 중요한 것은 흑운 공주를 살리는 거다.)
금광수니 살막이니 제갈 사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과거의 편린은 너무나도 많지만 이럴 때 일수록 목적을 확실히 해야 했다.
(내 일을 방해하면 죽인다. 그것에는 변함이 없다.)
제갈 사혁이 막 결심을 한 순간 배극구검의 잔월검결(殘月劍決)이 호사마의 관자놀이를 그대로 베어버렸다.
주위를 둘러본 암살자는 주변에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머리를 긁적거렸다.
“도망쳤나보네.”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는 상당히 젊은 듯 보였다.
“쫓아가면 금방 잡겠지 뭐~”
말투에서는 특유의 여유가 느껴졌는데 이런 종류의 여유로움은 제갈 사혁이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강함을 과신할 때 보이는 일종의 허세였다. 바로 제갈 사혁 같은 사람이 보이는.....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든 제갈 사혁은 암살자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그러자 살기에 반응한 암살자는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하고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누구냐?”
“.................”
어둠을 등지고 제갈 사혁이 나타나자 위 아래로 제갈 사혁을 훑어보던 암살자는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듯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뭐야 아직 살아 있는 놈이 있었나?”
암살자는 그대로 기지개를 펴며 허리 운동을 하더니 갑자기 단검을 꺼내 제갈 사혁에게 던졌다. 하지만 그 순간 제갈 사혁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던 단검은 제갈 사혁의 미간에 닿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얼레? 뭐야 이거 야 뭐 한 거냐? 너.”
“말투나 행동에서 사람을 얕잡아 보는 게 느껴지는데 말이야. 그건.........”
멀리 떨어져 있던 제갈 사혁은 순식간에 암살자의 눈앞에서 검을 휘둘렀다. 상대를 베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암살자도 그 자리에 서서 제갈 사혁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너보다 강한 사람한테 하는 게 아니다. 꼬마야.”
그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암살자의 얼굴을 가린 천이 찢어지며 그 얼굴이 드러났다.
============================ 작품 후기 ============================
이번 이야기는 아무래도 초창기에 생각을 해둔 이야기라서 1화부터 천천히 읽으며 썼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설정이나 이름들 때문에....
그 중 하나가 배극구검인데 오늘 글 쓰다가 정신차려보니 배극구검을 배극국검이라 쓰고 있었습니다. 내 정신 좀 봐....
회귀물 특성도 살리려고 노력했고.
이 소설을 쓰던 중에 갑자기 이야기가 안풀려서 게임을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헉! 농O 이럴 수가" 라는 인터넷 기사를 누르게 됐고 인터넷 기사에 라면 이야기가 나오길래 인터넷으로 라면이 먹고 싶어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게 되고 라면 주문한 쇼핑몰에서 디즈니 DVD를 판매 광고가 나오길래
"아! 미녀와 야수 OST가 좋았었지 참~" 이라고 생각을 해 미녀와 야수 OST를 듣다가
디즈니 타잔에 나오는 히로인 제인이 꽤나 예뼜다는 사실과 타잔에서 타잔이 나무를 타는 동영상(그 유명한 장면)을 보니 갑자기 스노우 보딩 게임이 하고 싶어졌고 스노우보딩 게임을 검색하는 중에 인기 검색어 노블레스를 보고 노블레스 눌러서 오늘 자 노블레스를 보는데 다 보고 나서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전 과연 뭘 한 걸까요?
가끔은 제 자신이 제갈 사혁처럼 목적을 확실히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