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회: 흑운 공주 -->
제갈 사혁은 항상 이신에게 분노를 제어하는 법보다는 분노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법을 가르쳤다.
“그 쯤 해둬라.”
밤의 색에 물든 검은 대나무 사이로 제갈 사혁이 걸어오자 낭인들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젊은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이 자신들의 어깨를 그리고 나아가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힘 그리고 그 힘을 쏟아내는 방법 또한 상대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적합했다.
“너희의 주인 되는 자에게 전하라. 곧 흑운 공주와 함께 너희 주인 되는 자를 보러 가겠다고.”
귀찮다는 식으로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자 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자존심 같은 걸 챙길 여유가 없었다.
상대가 어떤 자인지는 그 사람의 눈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자신들과 같은 살인자의 눈을 하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사람은 절대 용서를 모른다.
“이신 앉아라.”
낭인들이 떠나자 제갈 사혁은 곧바로 이신을 앉히고 폭류신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내가요상술을 펼쳤다.
내가요상술을 펼치며 동시에 이신의 몸을 관찰하는 동안 제갈 사혁은 스스로가 이신을 통해서 만들어 내려 했던 이신의 육체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폭류신공의 부작용에 크게 영향 받지 않는군.)
폭류신공을 완성시킬 수 있는 육신. 비록 자하신공의 아류라고는 하지만 폭류신공의 약점을 극복하는 순간 자하신공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슬슬 교육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겠어.)
지금은 속성으로 감정을 극단적으로 끌어내 힘을 사용하고 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마음을 다스리는 법도 가르쳐야 했다. 흔히들 말하지 않은가?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괜찮으세요?”
흑운 공주가 걱정이 되어 다가오자 청하가 흑운 공주를 제지했다.
“치료 중에는 건드리시면 안 돼요.”
육신에 흐르는 기의 방향을 보고서 흑운 공주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제갈 사혁과 달리 내가요상술의 주의 점을 모르고 다가가는 흑운 공주의 행동에서 청하는 그녀가 무공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오문 문주 소연자가 제법 알아주는 고수인 것과 그의 후계자가 될 손녀가 무공을 익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흑운 공주는 무공은커녕 내공운영의 이해관계 그리고 무림을 살면서 알아 두어야 할 기본적인 것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갈사 소협 알고 있었어요?)
청하의 전음이 들려올 때쯤 내가요상술을 끝마친 제갈 사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거 되게 심각하다는 거 알죠?”
흑운 공주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보면 상당히 심각했다. 물론 하오문의 중간직이나 고위인사 몇몇도 무공을 익히지 않고 호위를 통해 몸을 보호하지만 하오문 문주라는 자리는 무공 없이 성립될 수 없는 자리다.
하오문은 정보를 쥐고 있고 정보는 곧 힘이다. 정보는 극한의 수련을 통해서 얻는 무공에 비해 힘을 축적하는 방법이 대단히 빠르지만 그만큼 타인에게 빼앗기기도 쉬운 법.
하물며 그것을 지켜야 하는 입장인 하오문 문주나 그에 준하는 자리에 오를 자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이쯤 되다보니 제갈 사혁은 소연자가 노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소연자는.....
(그럴 작정이었나?)
“이제 어떻게 할 거에요? 정말 하오문에 흑운 공주를 데리고 쳐들어갈 거예요?”
“말은 쳐들어간다고 힘을 줬지만 설마요~”
“또 허세 부린 거예요?”
청하가 팔뚝을 꼬집자 제갈 사혁은 묘하게 청하와의 실랑이가 싫지 않은 듯 했다.
“일단 좀 쉬죠.”
밤이 깊어진 만큼 일단 쉴 곳이 필요했다. 외진 곳이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일단 가울이 습격한 마차 쪽으로 가 몸을 녹일 걸 찾았다.
이신과 함께 마차를 부서서 땔감으로 쓰고 물건을 덥고 있던 두꺼운 천으로 체온 유지를 위해 몸에 덮었다.
“으흐~ 춥다 추워!”
제갈 사혁이 한껏 과장되는 행동을 하며 모닥불을 쬐자 흑운 공주는 멍하니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왜 그러시죠?”
흑운 공주의 시선이 느껴졌던 제갈 사혁은 무슨 일이냐며 눈치를 주었고 흑운 공주는 두 손을 가로 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꼭 낯을 가리는 새침한 어린아이 같았지만 동생처럼 챙겨주며 받아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는 게 좋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타인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이래저래 타인의 의도에 끌려 다닐 뿐입니다.”
제갈 사혁이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라며 애써 둘러말하자 흑운 공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자....... 시라면서요?”
제자라면 이신을 말하는 거였다.
“누구요. 쟤요? 그렇습니다. 제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도 소협께 저렇게 배울 수 있나요?”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거라면 안타깝지만 이미 늦었다.
“할아버님이 소연자 어르신인데 무공을 가르쳐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제갈 사혁 역시 하오문의 후계자면서 흑운 공주가 무공을 하나도 배우지 않은 게 이상하긴 했었다.
“사실 할아버지를 본 건 열일곱 살 때였어요. 그때까지 한 번도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었어요. 아니 할아버지가 계셨다는 걸 안 것도 처음이었죠. 저희 아버지는 평범하게 포목점을 하셨는데 하오문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으세요.”
“그렇습니까? 저는 당연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유년시절 무림과는 아주 동떨어져 생활하고 있었다면 지금이 모습은 충분히 설명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림병에 걸리셔서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를 뵙는데 떨리더라고요. 그리고 무림이라는 곳도.”
낯선 환경을 떠나 무림이라는 곳은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곳이다.
“무림은 무서웠어요.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무공 이외에 것을 열심히 배웠어요.”
유년시절을 평범하게 보낸 소녀가 꿈을 꾸고 성장할 만큼 아름다운 곳은 아니다. 특히 하오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제갈 사혁은 더욱 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소연자는 애초에 흑운 공주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 없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었다. 그리고 손녀를 마교로 보내려한 진짜 이유는 어쩌면 손녀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교시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제갈 사혁이 마교를 직접 방문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마교는 무림단체라기 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자치단체라고 볼 수 있었다. 마교 안에서 단지 살아가는 것뿐이라면 입교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흑운 공주 본인에게 하오문 문주의 손녀라는 특수성이 있는 이상 마교에 입교를 해야 안전이 보장된다. 결국 소연자가 제갈 사혁과 청하에게 숨기려 했던 것과 호남과 안휘성의 분타주들이 숨기려 했던 것은 흑운 공주의 입교였다.
물론 이해는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 자체가 개인을 행한 그리고 개인을 위한 가장 안전한 보호라 할 수 있었다.
“소저의 뜻은 어떻습니까?”
“네?”
“저희는 소저를 지켜주러 온 것이지 소저의 하오문 문주 등극을 돕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럴 리 없었다. 제갈 사혁은 무조건 흑운 공주를 하오문 문주 자리에 앉혀 이득을 취할 생각이었다.
시작은 호사마의 사천 방문과 그 속내를 알아보는 거지만 이미 제갈 사혁은 성제의 임무 따윈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이 만들어낸 하오문 문주를 통해 하오문을 뒤에서 좌지우지 할 목적으로 이번 일에 뛰어들었다. 목적을 정한 이상 확실하게 그리고 그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만약 이대로 떠나실 생각이라면 보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소저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만약 흑운 공주가 떠날 생각이라면 제갈 사혁은 하오문의 세력 다툼을 핑계로 흑운 공주에게 잠시 협조를 구할 생각이었다. 흑운 공주의 협조를 구해 하오문을 정리한 후 자신과 연이 닿은 호남 분타주를 문주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제에 감히 이런 생각을 가져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하오문 문주가 되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일부러 안타깝다는 듯이 흑운 공주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주......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스며든 감정은 권력이라는 소용돌이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여인에 대한 연민이지만 거짓된 감정 뒤에 숨은 진위는 검은 구름(黑雲) 뒤에 숨어버린 만월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좋습니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저도 돕겠어요.”
정의감 넘치는 청하가 이야기에 끼는 것은 이미 예상한 일, 그녀라면 분명 흑운 공주를 도울 테고 이렇게 되면 일은 쉬웠다. 일단 제갈 사혁은 흑운 공주의 세력을 종합했다.
“호남과 안휘성 뿐이군요.”
하오문은 현재 장로 6명의 장로와 10명의 분타주로 그 지배층을 이루고 있다. 그 중 흑운 공주의 세력은 호남과 안휘성 뿐이다. 상대인 망월의 세력은 다섯 분타주 나머지는 전부 중립을 선언한 상태.
“장로들은 세력에 가담하지 않는 겁니까?”
“하오문 장로들은 공식적으로 중립이지만 또 모르죠.”
제갈 사혁이 아는 한 흑운 공주와 하오문 문주의 제자 망월 이 두 사람 중 누구도 문주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그래서 제갈 사혁이 노리는 것은 바로 하오문의 모래알 같은 결속력이었다. 망월이 죽은 이유도 역시 흑운 공주와 같은 정사대전을 틈탄 암살이다.
겉으로 보기엔 망월 세력과 흑운 세력 그리고 중립으로 보이지만 분명 하오문을 뒤에서 조종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소연자의 생사다. 소연자 살인의 주범은 대외적으로 마교다.
소연자가 마교에 손녀를 숨기려 했고 호사마 역시 소연자의 지인으로서 진심으로 흑운 공주를 도우려 한 것은 사실이나 소연자가 살해당한 것은 마교 때문이다. 물론 이 사실은 새 하오문 문주가 등극한 이후 밝혀진 사실이다.
(마교의 좌호법 우사(右仕). 그 인간이 배후란 말이지.)
마교의 두 호법 중 하나에 의한 죽음. 하오문 문주라는 직함이 가벼운 것은 아니나 그 간판에 비하면 너무 터무니없는 자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좌호법과 연이 닿아있는 하오문 장로나 분타주를 알아내야 하는데 그게 가장 힘들겠군.)
생각을 정리한 제갈 사혁은 흑운 공주에게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일단 흑운 공주에 대한 암살시도는 계속 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암살 시도가 노골적으로 계속돼야 그 긴 꼬리가 잡힐 테니.”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청하가 너무 위험한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자 제갈 사혁도 정말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네, 너무 위험하죠.”
“그럼 다른 방법을 써서.......”
“...... 암살을 하러 오는 암살자가.”
보면 볼수록 느끼는 거지만 절대 겸손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십니까. 출판 준비를 핑계로 펑크를 며칠 째 내고 있는 접니다.
사실 지금 막 글을 썼습니다.
글을 쓴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안돼 C8 3일이나 펑크를 낼 순 없어!" 라고 저의 뇌가 잠을 안재워주더군요.
사실 퇴고 자체는 별거 없습니다. 본문에서 자주 쓰지 않는 쉼표도 삽입하고 뭐 그냥 제가 쓴 글을 읽어보는 수준이죠. 하지만 저는 한가지 일만 할 수 있는 사람이다보니 글 쓸 여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글은 언제나 쓰고 싶기 마련이죠. 그래서 잠도 안자고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이번화는 어떠셨습니까?
대부분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제갈 사혁의 의도를 눈치채셨겠죠.
이번 편은 결말을 뻔하게 가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결말이 뻔할 지언정 그 과정은 뻔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니 화산의협이라는 소설의 기준에서는 그 과정조차 뻔할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