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12화 (112/262)

<-- 112 회: 흑운 공주 -->

일단 제갈 사혁은 자신들의 신분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물론 화산파와 무당파라는 신분이 아닌 안휘성 분타의 호위무사라는 신분을 말이다.

“얼떨결에 만들어진 신분이지만 뭐 괜찮아요. 이럴 때 쓰는 것도.”

청하는 찬성했고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았다. 화산파의 제갈 사혁이 흑운 공주를 호위하고 있다는 말이 소문나기라도 하면 흑운 공주를 노리려는 세력은 도망치거나 가면을 바꿔 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신강으로 간 흉조는 자신과 연이 닿아 있는 좌호법 우사를 만나기 위해 그의 개인 별채로 향했다.

“그동안 강령하셨습니까?”

좌호법 우사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탄탄한 근육을 드러낸 채 수련을 하고 있었다. 항상 일 때문에 만나는 좌호법을 아편쟁이로만 봐왔던 흉조는 좌호법을 다시 보게 됐다.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편쟁이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 마교의 호법이라 이건가?)

수련을 중지한 후 콧잔등에 맺힌 땀을 무명천으로 닦아내며 좌호법은 흉조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자네는 여기 오는 걸 싫어하는 걸로 아는데, 내가 잘 못 알고 있었나?”

사실 하오문의 요직에 앉아 있는 흉조기 때문에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날 때는 항상 좌호법 쪽에서 은밀하게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일로 부탁드릴 일도 있고 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찾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흉조는 마치 여인을 소개해주는 중매쟁이처럼 옥으로 만든 여인상을 보여주었다.

“그건 또 뭔가?”

“황제의 무덤에서 도굴한 것입니다. 아마도 황제가 사랑하던 여인이 아닐까합니다?”

하지만 최근 황제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멸망한 왕조(王朝)의 무덤의 경우는 조정에서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곳은 무덤이되 보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어디서 난 물건인가?”

“어디 그런 소리가 나야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는 말은 하오문이 여태까지 보관하고 있던 황제의 보물이라는 소리다.

공식적으로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하오문이 황제의 무덤을 찾는데 일조한 것은 아는 사람만 안다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물건을 몇 개 빼돌렸다 해도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무얼 어떻게 부탁하고 싶은가?”

“호사마가 죽었습니다.”

“알고 있네.”

이미 호사마와 관련해서 이야기가 끝난 참이었다. 흑운 공주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호사마가 강하게 개입할 경우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 않을 터인데?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부탁하러 왔는가?)

흉조가 가지고 온 물건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무슨 의도로 직접 찾아왔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그것이 말입니다.”

“크악!”

사람의 피에서 나는 잔향에 익숙해져 더 이상 그 특유의 향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싸움에 익숙해진 청하는 목을 베어버린 시신에게서 차갑게 고개를 돌린 후 마저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으음~ 몇 번째에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제갈 사혁이 옷장에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청하는 귀찮은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만 잤다. 그러자 제갈 사혁도 말없이 그냥 옷장 문을 닫고 잠을 잤다.

청하는 침대에서 그리고 제갈 사혁은 옷장에서 잠을 잤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바로 청하가 입고 있는 흑운 공주의 옷이었다.

일부러 흑운 공주의 위치를 노출해 암살을 유도하는 건 좋았지만 정말로 흑운 공주를 미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청하가 대신 흑운 공주의 대역을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동안 찾아온 암살자라고는 이렇게 잠들면서도 죽일 수 있는 피라미들 뿐이었다.

“이 작전 정말 성공할 수 있으려나?”

제갈 사혁이 생각해낸 작전이지만 막상 실제로 실행해보니 뭐가 잘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몇 놈 잡아다가 협박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살수의 방문이 끊이질 않아 언놈을 때려잡고 언놈을 붙잡아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검을 쥘 때 보이는 버릇도 달랐다. 그 말은 곧 모든 살수들이 따로 따로 타 조직에서 고용되어 왔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그냥 보이는 족족 목을 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내 계획은 살수가 온다. 그러면 붙잡아서 고문을 한다. 그러면 배후를 캔다! 배후를 캐면 그 놈한테 찾아가 그놈의 멱살을 잡고 협박을 한다. 인데 말이야.”

정말 단순하면서 제갈 사혁다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점소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청하가 죽인 살수의 시신을 처리했다.

“좋은 아침.”

사람 시신을 치우고 있는데 넉살 좋게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건네자 점소이들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거~ 미안하네, 늘 이렇게.”

“아닙니다. 객잔에서 사람 시신 치우는 게 어디 한두 번 겪는 일이겠습니까?”

그게 말이 된다는 사실이 정말 서글펐다. 점소이들은 정말 1년에 2번 정도 직접 시신을 치운다. 그만큼 무림인들의 객잔 이용행태는 개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만이 없는 건 이 객잔이 바로 화산파와 보험계약을 한 무릉도원 제 2 지점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대충 정리한 제갈 사혁은 좁은 옷장에서 나와 청하를 흔들어 깨웠다.

“청하 소저 내려와서 밥 먹어요.”

“으음~ 밥이요?”

잠에서 덜 깨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이어서 마음이 크게 동하지만 제갈 사혁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다 큰 처녀가 침이나 흘리고 자고 으이고~”

“헤헤~”

평소라면 제갈 사혁의 짓궂은 농담에 재치 넘치는 농담으로 받아줬을 테지만 잠이 덜 깨서 말보다는 살짝 백치미가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순간 제갈 사혁은 이상야릇한 현기증을 느끼며 약 1초간 정신을 잃었다.

지금이 바로 남자들이 어떻게 해서든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멀쩡한 처자에게 술을 그렇게 퍼마시게 한다는 그것! 일명 무방비 상태였다.

“어서 밥 먹으러 갑시다.”

그러면서 제갈 사혁은 흑심이 가득한 손길로 은근슬쩍 청하의 어깨를 감싸며 평소보다 과한 접촉을 일삼았고 청하는 잠이 덜 깨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층 식당으로 내려가자 그곳에는 이신과 청하 옷을 입은 흑운 공주가 있었다.

“잘 잤어요?”

청하가 졸린 눈을 하고 흑운 공주에게 인사를 건네자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눈 밑이 부어올랐다.

“옷장에서 자는 거 힘드네요.”

이신과 흑운 공주가 한방에서 자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흑운 공주는 제갈 사혁과 마찬가지로 옷장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부의 제자로서 사부의 그 계략이나 작전이라는 거 성공한 적을 못 봤어요.”

아침부터 신랄하게 제갈 사혁의 작전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는 이신을 보며 청하와 흑운 공주는 동의했다.

“얘가 사부를 뭐로 보고!”

“솔직히 그러잖아요. 남궁세가에 있을 때도 흑비가 뭐에요?”

흑비로 분장을 해 춘풍지회에 참가했던 일을 들먹이자 제갈 사혁은 이를 갈았다.

“야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무풍대 아저씨들이 다 말해줬거든요.”

“쳇~ 개자식들 쓸 때 없는 말을.”

두 사람의 언쟁을 보며 흑운 공주는 청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두 사람 재미있네요.”

“평소에도 저래요. 워낙 갈사 소협의 행동이 애 같아서.”

장난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적의 암살자를 고문해 꼬리를 잡자는 작전은 일단 실패였다. 삼류 암살자만 하루에도 몇 십 명이 달려드니 그것들 하나하나 고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문을 해서 나오는 것도 없었다.

“그럼 이 작전은 포기하죠.”

제갈 사혁도 별 소득이 없는 작전을 고집만으로 계속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저기 말이에요.”

“왜?”

“흑운 누나가 죽으면 어떻게 되요?”

정말 멍청한 질문이었다. 제갈 사혁이 보호하고 있는 한 흑운 공주가 죽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건 장담할 수 있었다.

“흑운 공주가 왜 죽어? 이신 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러니까요. 죽으면 어떻게 되는 데요?”

“얘가 정말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묻......”

그 순간 제갈 사혁은 한동안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사실을 떠올렸다. 미래에서는 흑운 공주의 죽음과 함께 하오문 문주로 ‘그자’가 뽑힌다. 만약에 정말 이신의 말대로 흑운 공주가 죽는다면 이번 하오문 문주도 그자가 되는 걸까?

“너 말 잘했다. 생각해보니까. 흑운 공주를 한번 죽여야겠는데.”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 이조차도 이용해먹지 못하다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흑운 공주를 죽이자는 말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은 청하였다.

“진짜로 죽이자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죽이자는 거죠.”

늘 그렇지만 저렇게 뭐가 있는 척하며 빙~ 둘러서 말하는 버릇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똑똑한 척 하지 말고 바로 바로 말해줄래요. 이미 작전 하나 실패했으면서 뭐 있는 척 하지 마요.”

“암살자가 엄청나게 오잖아요. 하루에도 한 평균 3명?”

“그렇죠.”

실제로 오늘 아침까지 암살자가 왔던 걸 생각하면 하루 평균 3~4명 정도는 오는 편이었다. 아침에 죽였으니까 아마 앞으로 2~3명 더 남았다고 봐야했다.

“그럼 우리가 암살자로 분장을 해서 흑운 공주를 찌릅시다.”

“에?”

“급소만 피하면 안 죽어요.”

“결혼도 안한 처녀 몸에 멀 찔러넣어요?”

“푸웃~”

의도하지 않았지만 조금 야릇한 농담처럼 들렸기 때문에 차를 마시던 제갈 사혁은 그만 정면에 있던 이신에게 마시던 차를 뱉었다.

“사부!”

“미안.”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바로 잡은 제갈 사혁은 작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암살자가 오면 청하 소저가 그 녀석과 싸웁니다. 그럼 그때 암살자로 분장한 이신과 제가 쳐들어오면 이신이 청하 소저를 쓰러트리고 제가 흑운 공주를 찌르는 겁니다. 일단 이렇게 일을 벌려 놓으면 진짜 쪽에서 무슨 행동을 취하겠죠.”

“무슨 행동이요?”

“뻔하잖아요. 임무완수의 확실함을 더하기 위해 시체를 가져가야 한다던가? 뭐 대충 시체를 가져가면 어디서 의뢰인과 만나지 않곘어요?”

“그러다 만약에 목을 자르려고 하면요?”

이게 문제였다. 암살자들은 보통 사람을 죽이고 임무완수의 증거로 암살 대상의 목을 가져가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멍청하게 죽은 사람의 시신을 들고 가는 살수는 없었다.

“그럼 그 새낄 그냥 죽이면 되죠.”

“그럼 헛수고잖아요?”

“왜 헛수고에요? 우리 공주님 만나고 싶어서 난리치는 사내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한마디로 시체를 가져가도록 해서 살수 단체의 뒤에 숨어 있는 자의 정체를 밝히겠다는 말이었다.

“잘 될까요?”

이 작전도 저 작전도 제갈 사혁이 짰다는 점에서 청하는 절대 제갈 사혁을 신뢰할 수 없었다.

“날 좋아하는 만큼만 믿어줘요.”

“요만큼?”

요만큼을 나타내는 검지와 엄지 간격이 엄청나게 신경 쓰였지만 청하가 이 정도로 가볍게 농담을 한다는 것은 이미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 작품 후기 ============================

퇴고 작업 중에 글을 쓰는 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글(연재)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없이 오직 퇴고에만 매달렸죠. 그것도 내일이면 끝날 것 같습니다.

이번화의 의도는 계략 실패입니다.

제갈 사혁의 계략이 실패한 게 솔직히 한두번이 아니지만 "아~ 이건 안돼겠어 포기..." 이런 느낌이랄까요?

회귀물의 느낌도 나도록 미래를 이용한다는 점도 살짝 삽입을 했고

(회귀물의 특성을 그동안 아껴왔다기 보다 자제한 게 사실이지만.)

평소보다는 잘 섞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클라이막스입니다. 이번 에피소드 엔딩만 수차례 바꿨습니다.

청하의 성격이 너무 바뀐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가벼워진 건가?

솔직히 말해서 청하를 그렇게 많이 등장시키진 않았으니까요.

이신이야 솔직히 15살이면 사춘기라 "그 나이때 다 그렇지 뭐" 이런 느낌이었는데

청하는 아무래도 좀 더 고민을 하고 성격을 제대로 정착 시켜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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