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회: 흑운 공주 -->
일이 이렇게 결정되자 흑운 공주는 오전 내내 술을 마시면서 긴장을 풀었다. 아무래도 암살자 속이려면 진짜로 한번 찔러야 하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은 만반의 준비를 위해 따로 준비된 옆방에서 아침식사 후 잠입한 살수 몇 명을 의자에 묶어두었다.
“이름.”
요즘 들어 누구 취조하는 일이 많아진 만큼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이름을 묻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
대답이 없자 머리를 긁적거린 제갈 사혁은 호황을 뽑아서 미련 없이 살수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마른 천으로 호황을 닦아내며 껄렁껄렁한 목소리로 옆 자리에 구속된 살수와 눈을 마주쳤다.
“자 빨리 빨리 하자. 이러지 않아도 애들은 썩어나요. 자. 이름.”
“이름 같은 건 없다.”
이름이 없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망설임 없이 호황을 뽑아들었고 그 순간 다급해진 살수는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소리쳤다.
“원래 이름이 없다 정말이다!”
겁에 질린 살수의 목소리를 들은 제갈 사혁은 간악한 미소를 지으며 탁자 위에 있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살수에게도 술은 건넸다.
일명 채찍과 당근.
직접 술병을 들어 술을 먹여준 제갈 사혁은 천천히 분위기를 잡았다.
“자 이제 말해봐. 의뢰인이 누구지. 누구야 도대체?”
“그건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임무를 완수하면 수급과 함께 본곡으로 가야 한다. 그게 이번 임무의 규칙이다.”
여기서 말하는 ‘본곡’이란 이 살수가 현재 몸담은 조직을 뜻한다. 아무래도 살수를 통해 직접 온 ‘의뢰’가 아닌 조직을 통해 하달 된 ‘임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런 걸 장사로 따지면 암살자는 수급을 제공하고 살수 조직은 수급을 유통한다. 그리고 수급을 확인한 의뢰인이 대금을 지불한다.
“안되는데 의뢰인과 직접 만나야 하는데.”
살수가 흑운 공주를 죽이면 바로 그 시체를 가지고 의뢰인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때야 말로 제갈 사혁의 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 조직까지 따라갈 수는 없었다. 흑운 공주 일도 있고 아무래도 이 작전의 성격상.
“잘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호황을 뽑아들자 살수는 당황했다.
“왜.... 왜 이러는 것이냐!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아니 살려주려 했던 것 아니냐?”
“내가 언제 난 그런 말 한적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제갈 사혁은 망설임 없이 목을 쳐버렸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데..... 하는 수 없지 그 놈이 좀 마음에 안 들지만 그 업계는 그 놈 손바닥 안이니까. 불러오는 수밖에.”
하는 수 없이 제갈 사혁은 따로 전서를 띄워 괄귀를 불렀다. 살수들의 세계에 대해서는 괄귀만큼 정통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작전을 잠시 중단하고 괄귀가 오기를 무작정 기다렸다.
“도련님 오랜만입니다.”
불과 이틀 만에 나타난 괄귀는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를 내세우며 제갈 사혁을 윗사람보다는 친구처럼 대했다.
“어이~”
제갈 사혁은 오자마자 고개를 까딱거리며 괄귀에게 일하라는 눈치를 주었다.
“그나저나 오지마자 일을 시키시다니 너무하시네요. 사람 다루는 게 빡빡하면 밑에 사람한테 까이는 법입니다. 점심시간에 호박씨 까는 용도로 변하고 싶은 건 아니죠?”
사실 처음부터 그냥 괄귀를 데리고 다녔으면 편했겠지만 괄귀는 가주를 지키는 1번 대이기 때문에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심 서찰을 보낼 때도 망설여졌다. 이제 소가주도 아닌데 무풍대를 그것도 1번 대를 오라 가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괄기는 오자마자 제갈 사혁이 시킨 일은 하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가 음흉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속삭였다.
“저 두 사람 중에 누굽니까? 다음 화산파의 사모님은.”
다소 경박한 질문에 제갈 사혁은 인상을 구기며 괄귀의 멱살을 잡았다.
“이 새끼야.”
당연히.
“제일 예쁜 쪽일 게 분명하잖아. 보고도 몰라?”
“제일 예쁜 아가씨라 어디보자~ 그럼 당연히 오른쪽이겠네요.”
여기서 괄귀가 말하는 오른쪽은 흑운 공주였다. 그러자 제갈 사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괄귀가 앉아있는 의자를 발로 차버렸고 갑자기 제갈 사혁이 화를 내자 청하가 다가와 제갈 사혁과 괄귀 사이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싸우고 그래요. 두 사람.”
청하가 인상을 구기자 괄귀는 사람 좋은 얼굴로 분위기를 누그러트렸다.
“아닙니다. 제가 도련님께 빌린 돈이 있는데 그 일로 이렇게 정말 별거 아닙니다. 돈 문제라는 게 원래 다 그렇잖습니까. 주먹도 오고가는 거고.”
“여기 전세 냈다고 그렇게 해서 막 그렇게 싸우진 마세요. 보는 눈이 있으니까.”
제갈 사혁이 누군가한테 돈을 빌려줘서 그로인해 싸운다는 말 따위 전혀 믿지 않지만 일단 제갈 사혁의 체면을 생각해 모른 척 해주었다.
“도련님.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닙니까. 내가 말한 제일 예쁜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렇게 화를 내시면 안 되죠.”
“네 눈깔이 옹이눈깔인 건 잘못이 아니고? 야! 이거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무조건 나오는 답 아니냐?”
“그건 우리 엄마한테 따져야죠. 날 이렇게 낳아줬는데 그리고 말은 바로 합시다. 아무리 저 소저가 예뻐도 무조건은........”
그렇게 말하면서 괄귀는 은근슬쩍 제갈 사혁과 어깨동무 하면서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털어 돈을 꺼내갔다.
“그나저나 소문대로네요. 엄청 미인인데요.”
“이 새끼가 진짜 너 내 주머니에서 손 안 떼!”
“여기까지 오는데 경비가 얼마나 들었는데 쩨쩨하게! 아가씨 이야기는 농담한번 해봤어요. 무당파의 청하 딱 봐도 소문처럼 절세미인이네요. 우얼~ 이제 남궁 미려만 보면 소원이 없겠네.”
청하가 미인이긴 하지만 괄귀가 청하를 알아본 건 어디까지나 청하가 허리에 찬 도(刀)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그 옆에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단 말이죠.”
흑운 공주가 마음에 든다면서 흑운 공주를 보는 눈은 절대 사랑에 빠진 남정네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건 아무리 봐도 포식자의 눈이었다. 설마하니 흑운 공주를 자빠트리고 싶다던가 하는 뭐 그런 음흉한 상상이라도 하나 싶어서 주의를 주려했지만 곧 괄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는 순간 차라리 흑운 공주에게 흑심을 품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지네요. 난 그 사람이 너무 너무 보고 싶은데 제 어렸을 때 소원이었거든요.”
평상시에는 사람 좋은 호인인척 하지만 근본은 역시 살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증오로 가득 찬 눈.
“아서라.”
아무래도 괄귀는 소연자와 원한이 있는 듯 보였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괄귀의 전직은 살수고 소연자는 하오문의 문주다. 엮이려면 얼마든지 엮일 수 있는 음지의 사람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때가 아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묵은 원한일 뿐입니다. 지금 저는 무풍대 아닙니까.”
“소연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냐? 지금은 가만히 있어봐. 다 때가 있는 법이야.”
그러면서 제갈 사혁은 괄귀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도련님......”
그러지 말라고 할 뿐이지 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점이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자자~ 일단 일하자고 일.”
일단 제갈 사혁은 현재 상황과 자신이 세운 작전 그리고 작전과 맞아 떨어지지 않은 부분을 설명해주었다.
“작전은 완벽하네요.”
괄귀는 제갈 사혁이 세운 작전이 완벽하다 했지만 역시 의뢰인을 직접 만나지 않는 점이 문제였다.
“계속 죽이세요.”
“뭐?”
“제 자랑 같아서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저처럼 이 바닥에서 제법 알아주는 놈들은 언젠가 독립을 하거든요. 독립한 놈들은 따로 조직이 없어요. 그런 놈들이 올 때까지 다 죽이세요. 혼자 다니는 놈이 나타나면 그때 하세요.”
“그 새끼가 혼자 다니는 놈인 건 어떻게 아는데? 잡아서 협박해? ‘어이~ 뒈지기 싫으면 우리 연극에 동참 좀 하십시오. 당신의 역할은 지나가던 살수 1입니다.’ 이렇게?”
“도련님. 낭인하고 문파에 몸담은 무림인하고 구분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멍청아! 걔들은 아무리 옷을 삐까뻔쩍하게 입어도 행동 하는 거부터 차이가 나.”
“저도 보면 압니다. 혼자 다니는 놈하고 조직에 묶인 놈하고는.”
역시 괄귀였다. 이쪽 계통이 훤하다보니 말 한마디로 일을 해결했다. 사실 제갈 사혁이 괄귀를 부르지 않았다면 제갈 사혁은 이 작전을 접고 호남 분타나 안휘 분타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괄귀의 말대로 따로 다니는 살수를 만나기란 힘들었다. 오죽 상황이 미지근했으면 저녁마다 나누는 대화가.
“난 오늘 3명.”
“갈사 소협 그것뿐이에요? 오늘 6명 잡았는데.”
“전 1명이요.”
제갈 사혁과 청하 그리고 이신은 저녁마다 자신이 잡은 살수의 목을 계산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림인의 생명경시가 대단하다지만 저녁 밥상머리에서 할 대화는 아니었다.
“그런 말 안하면 안 돼요? 나 이야기에 못 끼겠어요.”
흑운 공주가 이야기가 끼지 못하는 것을 투정부리자 청하는 뒤에서 흑운 공주를 안아주며 달랬다.
“미안해요. 우리 무슨 말할까요.”
“경제와 조정의 정책에 대해.”
제갈 사혁이 갑자기 경제가 어쩌고 조정의 정책이 어쩌고 이야기를 꺼내자 청하는 젓가락을 던졌고 젓가락에 맞은 제갈 사혁은 일부러 아픈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괄귀는 제갈 사혁이 나름대로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련님 나름대로 재미있어 보이네.”
그러면서 괄귀는 붓과 벼루를 꺼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뭐하시는 거예요?”
이신이 다가오자 괄귀는 서둘러 이신의 입을 막았다.
“쉬잇~ 이 공자.”
괄귀는 청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주군께서 궁금해 하셔서 도련님 몰래 그려 가려고.”
여기서 말하는 주군이란 제갈 사혁의 백부인 제갈 민을 뜻했다.
사실 괄귀가 청하 초상화 제작하는 일은 그의 비밀 임무였다. 지난 번 제갈 사혁의 뒤를 따랐다가 호남 하오문 분타 화재사건의 뒤처리 때문에 떨어지게 된 다른 조가 제갈세가로 복귀를 했을 때 제갈 사혁의 정인이 관한 이야기로 병영이 떠들썩했다. 결국 그 일이 상부에 까지 올라가게 되고 이번에 제갈 사혁이 괄귀의 차출을 원하자 이때를 노리고 괄귀에게 비밀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이 공자는 청하 소저가 마음에 듭니까?”
“네.”
“어떤 분입니까?”
“착한 사람이요.”
너무 흔한 답변이어서 내심 실망했다. 하지만 역시나 도련님의 제자.
“사부 같은 사람한테는 딱 어울리죠. 사부는 다정해요. 다정하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은 아니니까.”
괄귀는 품에서 책을 하나 꺼내주었다.
“주군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저한테요?”
사적으로는 사부의 백부지만 전혀 일면식이 없어서 무슨 선물 같은 걸 받을 사이는 전혀 아니었지만 선물이라니 고마웠다.
“농서이씨(隴西李氏) 족보입니다. 이신(離身)이라고 쓰지만 그건 도련님이 지어준 거고 이신(李身)이잖아요. 원래는.”
자유로워지라는 뜻에서 제갈 사혁이 한 글자 바꾸긴 했지만 이름 자체를 바꾼 건 아니었다.
“제갈세가의 종친들은 모두 조정에서 일하는 공직자들이라 공자의 뿌리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원래 제가 근본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주군께서 찾아주셨죠. 제 성은 홍씨였습니다. 알고 보니까. 형제도 있더라고요. 별로 사용하진 않지만 말이죠. 받아두십시오. 언젠가 공자께서 가정을 이루시면 자식에게 가르쳐 드려야하지 않습니까.”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신은 여태까지 노비였고 그 사정을 알기에 찾아주었다.
“저까지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기쁘면서 에두르며 표현하는 것도 제갈 사혁과 많이 닮았다.
============================ 작품 후기 ============================
청하와 제갈 사혁의 페어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습니다.
사실 사랑 이야기가 정말 중요하죠. 모든 이야기는 사랑이 있어야 할 정도로
메인 커플인데 이제야 감을 잡다니..... 청하와 제갈 사혁의 관계를 너무 일찍 서두르고 싶지 않았고 청하가 진짜 무슨 주인공 옆구리 따뜻하게 해주는 역할마냥 보이는 것도 싫어서 그동안 너무 청하를 등장 시키지 않았더니 이런 부작용이.
청하에 대해서는 사실 지금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랑스럽게도 보여야 하고 또 자기 주장도 강해야 하고 제갈 사혁처럼 쉽지 않아서 참....
원래는 12시 땡치고 올리려 했는데 7K밖에 되지 않아서 올리지 않았습니다.
공지를 띄웠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퇴고 끝난 직후라 정신이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