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14화 (114/262)

<-- 114 회: 흑운 공주 -->

제갈 사혁과 괄귀는 일단 죽은 살수들의 옷을 벗겨 그것을 몸에 걸친 뒤 반대편 건물에서 대기했다.

홀로 활동하며 의뢰를 받는 독립 살수가 침입하면 반대편 건물을 통해 제갈 사혁과 괄귀가 흑운 공주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그와 행동을 같이 하는 게 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도련님 왔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돼? 그렇지.”

때마침 살수 하나가 번개처럼 급습하자 반대편에서 살수의 옷차림을 본 괄귀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제갈 사혁과 괄귀는 경공을 펼쳐 한 번에 흑운 공주와 일행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 흑운 공주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살수들이 은밀하게 침입하고 또는 갑작스럽게 급습하고 했던 터라 청하와 이신은 절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

제갈 사혁과 괄귀의 존재를 눈치 챈 살수가 또 다른 암살자의 등장에 당황해했지만 괄귀는 살수와 대치중인 이신과 청하 중 청하를 상대함으로서 침입한 자에게 자신들이 아군임을 행동으로 표현했다. 약속된 움직임이 차례차례 나타나자 제갈 사혁은 단검을 꺼내며 흑운 공주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 순간 흑운 공주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눈을 감았다.

(흉터 정도는 생기겠지만!)

자세를 잡은 제갈 사혁은 정확하게 단도를 찔러 넣었다.

“!”

날카로운 단도의 날이 깊숙이 들어가 보이지 않자 흑운 공주의 눈은 전에 보기 힘들 정도로 커졌고 붉은 피는 멈출 줄 모르고 바닥에 흘러내렸다.

“흑운!”

그녀가 뒤에 있는 침대로 쓰러지자 청하는 마치 그녀가 살수인 제갈 사혁의 손에 죽은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절규했고 제갈 사혁은 재빨리 흑운 공주를 어깨에 들쳐 메고 밖으로 나갔다. 처음 이곳을 급습했던 살수는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아 잠시 괄귀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괄귀가 눈치를 주자 그와 함께 빠져나왔다.

“서라!”

연극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청하가 경공을 펼쳐 뒤따라 왔지만 이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자연스럽게 쫓아가지 못한 척하며 떨어져 나갔다.

괄귀와 약속한 대로 근처 저수지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괄귀와 살수가 오기 전에 흑운 공주의 혈도를 제압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앞서 달려오던 괄귀가 노송나무를 발로 차며 일부러 자신이 온 것을 알리자 제갈 사혁은 검을 뽑았다.

“나다!”

그러자 괄귀는 마치 윗사람인 것 마냥 행동하며 제갈 사혁의 행동을 제지했고 의문의 살수와 거리를 좁혀나가기 위한 연극을 시작했다.

“검을 거둬라. 동족 업계 사람이다.”

괄귀는 제갈 사혁에게 자연스레 하대했고 제갈 사혁은 괄귀의 명령에 조용히 검을 거뒀다.

“괄귀라고 하오.”

“괄귀!”

괄귀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살수가 반응을 할 정도로 괄귀의 이름은 살수들 사이에게 유명했다.“그대가 괄귀란 말이요? 그대 앞에서 내 이름을 밝히기 부끄럽지만 나는 해귀(海鬼)요. 광주(廣州)에서 활동했소. 생각보다 젊구려. 들리는 소문으로는 독립을 하자마자 행방이 묘연해졌다 들었는데.”

괄귀가 해귀를 몰라도 해귀는 괄귀를 알고 있었다.

“각자 사정이 있는 법 아니겠소. 그런데 해귀장(長). 의뢰가 겹친 것 같은데 이런 일은 흔치 않소.”

의뢰가 겹치는 경우는 살수들 사이에게 그렇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경우도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는 해귀도 알고 있었다.

“이미 하오문의 흑운 공주를 암살하기 위해 투입된 살수만 수십이오. 나 역시 조용히 암살을 하려했지만 워낙 경호가 단단해 살수 체면에 낭인처럼 급습을 했다오.”

이미 제갈 사혁 일행이 죽인 살수의 수만 두 자릿수가 넘는다. 그러니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우리는 뭐 해귀장이 원하면 임무를 양도해드리겠소. 하지만 함께 의뢰인을 만나서 우리도 이 일에 관여했음을 알리고 싶소. 사실 이번 일은 내가 독립하고 처음 맡은 의뢰요. 그러니 얼굴이라도 내비쳐서 선금 받는 것을 어떻게든 갚을 해야 할 것 아니오.”

수많은 살수들이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하며 독립할 기회를 얻지만 쉽게 독립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처음 의뢰를 맡아 선금을 받고 일에 실패하면 이 바닥에서 좋지 않은 소문나 돈다. 그러면 돈만 먹고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고 돌아 의뢰도 줄고 단체 혹은 개인의 업무에 차질을 빗는다.

살수들의 세계에서 선금이란 신용을 의미였다. 괄귀는 그 점을 노려 능숙하게 업계종사자로서의 동질감에 매달렸다.

“이 일 자체도 문어발식 의뢰 아니오. 그러니 조금만 양보해주시오. 해귀장.”

“사실 나도 독립하고 맡는 첫 의뢰요. 그렇지 않으면 그 먼 광주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소. 그러니 내 도을 수 있는 만큼 돕겠소.”

살수라고는 하나 결국 인간이다.

사람을 대놓고 죽인다하여 비정(非情)하지 않고 사람을 은밀히 죽인다하여 무정(無情)하지 않는 법. 사람을 대놓고 죽이는 무림인과 사람을 은밀하게 죽이는 암살자 모두 다 똑같은 것이다. 결국 동등한 입장에서 감성에 매달리면 마음이 있는 한 흔들리게 되어 있다.

“그럼 들고 가기 힘들 테니 여기서 목을 베겠소.”

해귀가 흑운 공주의 목을 베려 하자 괄귀는 몸으로 막아서기보다 침착하게 제갈 사혁을 가리켰다.

“새끼 까마귀를 키우고 있소. 이런 일을 하나하나 보고 배워야 하지 않겠소? 그러려면 이 정도 고생은 해야지.”

괜히 몸으로 막아섰다가는 꼬투리 잡힐 수도 있기 때문에 괄귀는 제갈 사혁을 제자라 칭하고 고생 좀 시키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밝혔다.

“요새는 까마귀한테 그런 것도 시키오?”

“나야 어렸을 때 팔려온 몸이지만 이놈은 원해서 살수가 된 놈이오. 양지에 있던 놈이라 정신상태가 해이하니 이런 것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야해서 말이오.”

“좋을 대로 하시오. 원래 양지에 있던 놈은 음지에 익숙해지기 어려운 법.”

대부분 살수는 어렸을 때 팔려온 아이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번에도 괄귀는 동질감을 내세워 해귀를 납득시켰다.

해귀는 따로 독립을 한 개인 업자기 때문에 예상대로 어느 숲으로 들어가 의뢰인을 만났다. 의뢰인의 마차에서 시종 한명이 따로 나오자 해귀는 제갈 사혁의 어깨에 짊어진 흑운 공주를 가리켰다.

“약속했던 하오문의 흑운 공주요.”

마차에서 나온 시종은 흑운 공주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다시 마차로 들어가더니 주인 되는 자와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나왔다.

“죽은 게 확실합니까?”

시종이 묻자 해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받으시오.”

약속한 의뢰 완수금을 전해주려는 순간 갑자기 숲에서 병사들이 튀어나와 활을 쐈다.

“!”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오자 빗발치는 화살을 피하지 못한 해귀는 급소에 화살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제갈 사혁과 괄귀는 검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뭐냐 네놈들은?”

괄귀가 으름장을 놓자 병사들이 다음 화살을 장전했고 의뢰인의 마차에서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중년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하하하하~ 어리석은 놈들 돈에 눈이 멀어 흑운 공주를 해하다니!”

“누구냐. 넌?”

제갈 사혁이 정체를 묻자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손을 올려 언제든 병사들이 화살을 쏘도록 준비시켰다.

“내 이름은 알아서 뭐할 것이냐. 이제 곧 하오문 차기 문주를 죽인 죄목으로 죽을 놈들이.”

“자신의 죄를 우리에게 뒤집어씌울 셈이군.”

어쩐지 닥치는 대로 암살자를 고용한 것부터가 수상하다 싶었다. 처음부터 놈들은 흑운 공주를 처리하고 그 죄를 암살단체나 개인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다.

“하오문이 누명을 씌운다고 해서 어떻게 될 정도로 암살단체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텐데.”

흑운 공주를 죽이기 위해 고용해놓고 이제는 그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니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정말이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법이란 말이야.”

남자의 팔이 내려가자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고 괄귀는 필사적으로 제갈 사혁과 흑운 공주를 보호하려 했지만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아니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도련님? 이거 설마.”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 이름이 뭐냐?”

제갈 사혁이 다시 한 번 남자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이를 악물고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사술에 불과하다! 겁먹지 말고 다 함께 쳐라!”

화살이 안 되자 이번엔 칼을 빼들고 달려드니 그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괄귀.”

“네. 도련님.”

대답은 하고 있지만 괄귀조차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흑운 공주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게 검을 다오.”

“네?”

검을 달라고 했지만 제갈 사혁의 검은 이미 제갈 사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검을 달라는 소리인데 그걸 받아서 뭘 어떻게....

“설마?”

양손에 검을 쥔 제갈 사혁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졸개들을 검으로 베어버리고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말했다.

“네가 누구인지 묻지 않으마.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하마.”

그 순간 제갈 사혁의 손에서 벗어난 두 자루의 검이 보여준 것은 꿈이었다. 무림인들이 그토록 바라는 전설적인 경지.

이기어검(以氣馭劍).

마음만으로 검을 다룬다는 전설적인 검술.

제갈 사혁의 나이 스물 하나 아니 제갈 사혁의 나이 지천명. 드디어 이뤄냈다.

“내 이름을 말해봐라. 내가 누굴 것 같으냐?”

============================ 작품 후기 ============================

출판 준비를 위해 수정하던 중 제갈 사혁의 사망 당시 나이를 스물 일곱에서 스물 아홉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니까 제갈 사혁의 나이는 현생에게 스물 하나 지난생애에서 스물 아홉입니다.

딱 오십줄이네요.

제갈 사혁의 경우 보셔서 아시겠지만 깨달음이라기 보다 오히려 자신의 업 그리고 자신의 번뇌를 무시함으로서 다음 단계를 열어나갔죠. 한번은 꼭 이런 식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세상을 달관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집착하고 욕망을 감추지 않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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