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회: 흑운 공주 -->
의지가 담긴 칼은 제갈 사혁의 수족이 되어 메마른 땅에 피를 뿌렸다.
“죽어라......... 끄악!”
자신의 용기를 시험하던 몇몇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이었다.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검을 뽑았던 하오문의 무인들은 어찌해야 할 줄 몰라 하며 도망치기 급급했다.
“돌아와라! 도망치지 마라!”
주인 되는 자의 처절한 외침에도 자신의 목숨이 중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도망친다면 두 팔과 두 다리를 지킬 수 있었다.
부하들이 모조리 도망치자 그들의 주인 되는 자는 무릎을 꿇었고 호황은 제갈 사혁의 칼집에 그리고 괄귀의 검은 그자의 무릎과 무릎사이에 꽂혔다.
“히익!”
“내 이름이 뭘 것 같냐?”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냐며 묻자 그는 벌벌 떨면서 제갈 사혁의 눈치를 살폈다. 젊은 나이이고 이기어검을 다룬다면 분명 그자 밖에 없었다.
“호..... 혹시 마화천(魔華穿) 대협이십니까?”
제대로 얼굴도 들지 못한 채 떨고 있는 그를 향해 제갈 사혁은 전에 보기 힘들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름이 뭐냐?”
“종명(棕命)이라 하옵니다. 대협.”
종명이라는 자의 이름을 들은 제갈 사혁은 그대로 종명의 복부를 발로 찼다.
“마화천이 이렇게 젊으냐. 새꺄!”
패악한 발길질에 무자비하게 당한 종명은 그대로 기절해버렸고 그런 제갈 사혁을 보며 괄귀가 말했다.
“마화천은 서른일곱입니다. 생긴 건 완전 20대죠. 이기어검하면 가장 먼저 그를 떠올릴 겁니다. 흑도섬이 마화천보다는 최고라 쳐주지만 이기어검은 무리죠.”
일을 대충 마무리한 제갈 사혁은 흑운 공주의 혈도를 풀고 윗옷을 벗어 기절한 흑운 공주의 몸이 더 이상 식지 않게 해주었다. 흑운 공주를 종명이 타고 온 마차에 태우고 죽어버린 마부를 대신해 마차를 몰았다.
“기절한 놈은 네가 알아서 데려오고 ‘마무리’ 해.”
“네네. 분부 대로합죠.~”
깐족거리면서 대답한 괄귀는 제갈 사혁에 의해 팔과 다리가 아니 숨통이 붙어 있는 하오문의 무사들을 차갑게 바라보며 피가 진득진득하게 말라붙은 자신의 검을 들었다.
“자자~ 날도 추운데 빨리 빨리 끝내자.”
살아 있는 자들의 숨통을 끊는 일에 미안한 마음 따윈 없었다. 그저 이번 일이 끝나면 제갈 사혁을 들들 볶아 새로 검 한 자루를 사겠다고 생각할 뿐, 일을 마무리하는 괄귀에겐 지루하고 귀찮은 뒤처리 일 뿐이었다.
마차를 타고 청하와 이신이 있는 무릉도원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서둘러 흑운 공주를 자리에 눕히고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혈도를 제압한 것뿐인데 별 일 있겠습니까.”
“아니요. 그 손 말이에요.”
그러면서 청하는 제갈 사혁의 왼손을 살폈다. 이제 막 상처가 아문 듯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예전부터 신기했어요. 상처가 하루 만에 낫는 거.”
“몸 하난 튼튼하니까요.”
그러면서 청하는 제갈 사혁의 왼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왜 그랬어요?”
흑운 공주를 단도로 찌를 때 흐른 피는 제갈 사혁이 스스로 자신의 왼손을 찔러서 낸 자신의 피였다.
“배에 흉터 생기면 말이에요.”
“으음~”
“나중에 이 일이 끝났을 때 흑운 공주가 고맙다며 보상으로 옷이라도 벗어주면 안 예쁘겠구나 싶어서요. 아깝잖아요.”
시답잖은 아저씨 농담. 평소라면 등이라도 세게 후려쳐주겠지만 그런 짓궂은 농담이 사실은 그냥 순수한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한 어린 남자애 같은 행동이란 걸 잘 알기에 오늘은
“잘했어요.”
그 왼손에 입을 맞춰 주는 것으로 보답해주었다.
얼마 후 괄귀가 도착하자 잠에서 깨어난 흑운 공주와 함께 종명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종명....”
“아는 사람입니까?”
“할아버지 편이었어요. 이 사람은.”
할아버지 편. 즉 자기편이라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했다는 사실에 흑운 공주는 충격을 먹은 듯 두통을 호소했다.
“하오문 문주의 사람이라면서 왜 그녀를 배신했지?”
“.......”
말하기를 망설이자 제갈 사혁은 종명의 멱살을 끌고 가 밖에 있는 동동주 항아리를 열고 항아리에 종명의 얼굴을 넣었다. 손으로 항아리를 툭툭 치며 괴로워하자 항아리에서 종명을 꺼낸 제갈 사혁은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종명을 보더니 갑자기 다시 항아리에 얼굴을 넣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보다 빨리 구해주었다.
“말해.”
“망월 공자가 죽었습니다.”
“망월 아저씨가 죽었단 말이에요?”
망월의 죽음은 지난 생애 흑운 공주의 죽음 후 이뤄진다. 하지만 지금 흑운 공주는 살아 있고 망월 공자는 죽었다. 그렇다면 현재 남아 있는 자는 후계자가 확실한 흑운 공주다. 그런데 왜 문주의 측근이 흑운 공주를 배신한 걸까?
“문주께서도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
그 말에 충격 받은 흑운 공주는 주저앉았고 흑운 공주를 부축한 청하는 흑운 공주를 침실로 데려가려 했지만 제갈 사혁은 그런 청하를 제지했다.
[갈사 소협!]
청하가 전음으로 눈치를 주었지만 제갈 사혁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하면 안 된다.
“문주는 왜 죽었지?”
애초에 하오문 문주의 죽음도 예정된 일이기 때문에 별로 신기할 건 없었지만 제갈 사혁은 형식상 물었다. 이번에도 과연......
“마교의 좌호법 우사가 문주님를 죽였습니다.”
“그럼 망월 아저씨도 그자가 죽였나요?”
흑운 공주가 힘겹게 입을 열자 종명은 또다시 대답을 망설였고 제갈 사혁은 종명의 뒷덜미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어 그를 압박했다.
“사실은 망월 공자를 구하기 위해 문주께서 덤비시다 돌아가셨다.”
하지만 제갈 사혁이 아는 한 문주의 죽음 이후 흑운 공주와 망월 공자가 차례로 죽는다. 그것도 하루 간격으로 문주는 좌호법 우사에 의해서 나머지 둘은 살수의 손에.
“좌호법이 망월을 죽이러 온 게 확실해? 문주인 소연자를 죽이러 온 게 아니었나?”
“아니오. 분명 망월 공자를 죽이러 온 후에 그 길을 문주께서 막아서다 변을 당하셨소.”
내심 흑운 공주와 망월 공자가 후계자 자리를 다툰다기에 망월 공자와 소연자의 사이가 나쁘진 않을까? 하는 진부한 생각을 했던 터라 제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소연자 이야기가 신선하기까지 했다.
“공주 내 공주를 죽이려 한 것은 사실이나 지금이라도 도망치시오. 마교의 좌호법이 뜬금없이 쳐들어와 문주와 공자를 해했소. 정말 이유 없이 왔을 거라 생각하오? 이미 하오문은 마교에게 넘어간 것이오!”
일반적으로 보기엔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제갈 사혁에게 이건 그냥 좌호법 우사의 인맥정리였다. 좌호법 우사는 심심해서 하오문에 온 것도 아니고 소연자 망월 사제(师徒)가 마음에 들지 않아 죽이러 온 것도 아니다. 분명 하오문 내부의 어떤 부탁을 받고 움직였다. 밑에 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상식을 초월한 거물이 직접 나섬으로서 아무런 뒷이야기가 없도록 직접 그리고 보다 확실하게.
(하는 짓만 보면 정말이지 보고배우고 싶을 정도야.)
아무튼 하오문은 마교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하오문을 뒤에서 조종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마교의 힘을 빌렸을 뿐이다. 일이 이쯤 되자 제갈 사혁은 종명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힘으로서 종명을 압박하려 했다.
“내 이름은 제갈 사혁이라고 한다.”
“화... 화산망종!”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의 주먹이 종명의 얼굴에 날아오며 잇몸을 으스러트렸다.
“한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흑운 공주는 인상을 구겼고 괄귀 역시 자신의 상관이 이토록 성정이 나쁘다는 걸 인지하며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내 이름은 제갈 사혁이다. 그리고 니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거야.”
종명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문주와 그 후계자가 죽었으니 하오문 문주를 선출해야겠네? 그렇지.”
“문주가 죽었는데 바로 문주를 뽑아요. 그건 너무 이르지 않나요?”
청하의 질문은 상당히 감성적이었다. 하오문 문주가 물론 한 문파를 대변하긴 하지만 하오문은 고인(故人)의 대한 예의 따윈 없다. 문주가 죽으면 곧바로 다음 문주를 뽑는다. 그게 하오문의 문주라는 자리다.
“하오문은 무림문파이지만 무관이 아닙니다. 근본은 장사치. 문주가 죽자마자 상황판단하고 이 박쥐새끼가 흑운 공주를 죽이려 한 것부터가 증거죠.”
그러면서 제갈 사혁은 종명의 머리를 툭툭 때렸다.
“다음 하오 문주의 선출은 언제냐?”
“앞으로 닷새 후 장소는 하오문 본파.”
하오문 본파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휘파람을 불었다. 하오문 본파는 그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전설적인 장소기 때문이다.
“안내해. 단 너희 하수인 자격이면 충분하겠지.”
어차피 흑운 공주의 후계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번은 가봐야 할 곳이었다.
[명심해라. 널 구할 수 있는 사람은 하오문 내부에 없어. 내 손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너를 살리고자 하는 것도 나를 죽이고자 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다. 필요하면 살리고 필요 없어지면 죽겠지. 그러니까 대가리 잘 굴려]
이미 이기어검이라는 평생 볼까 말까한 경지를 구경한 이상 그 누구에게서도 도움 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종명은 도망치기를 포기했다.
흑운 공주와 함께 종명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청하는 흑운 공주를 많이 위로해주었다.
“하아.... 이젠 정말 모르겠어요. 이대로 하오문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하오문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제갈 사혁은 갑자기 흑운 공주의 두 손을 잡았다.
“피하면 안 됩니다. 그게 당신의 할아버지를 죽인 자들이 원하는 거예요. 맞서 싸워야 합니다. 당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부하? 그들은 이미 저기 저 종명처럼 얼굴을 바꿨습니다. 몇몇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을 겁니다. 하오문은 소연자님의 전부입니다. 하오문을 지키는 건 할아버지의 의지를 지키는 겁니다. 포기하지 말아요.”
제갈 사혁은 흑운 공주에게 할아버지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면 동기부여를 해주었다. 절대 흑운 공주가 이대로 하오문 계승을 포기하도록 할 수 없었다.
(하오문은 내꺼야. 그러기 위해선 당신이 필요해.)
할아버지를 죽인 흉수에게 맞서 싸워? 할아버지의 의지를 지켜? 그런 건 다 개소리다. 제갈 사혁은 오직 흑운 공주를 통해 하오문을 뒤에서 조종할 그림자가 될 생각뿐이었다.
============================ 작품 후기 ============================
“나중에 이 일이 끝났을 때 흑운 공주가 고맙다며 보상으로 옷이라도 벗어주면 안 예쁘겠구나 싶어서요. 아깝잖아요.”
일이 끝난 후.
"저를 도와드렸으니 저의 몸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대협께 드릴 수 있는 건 이것 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넌 남자잖아!"
후기라서 한번 써봤습니다.
칙칙한 남자들의 모임에 나가서 먹은 거라고는 고기 뿐입니다.
다행히 술은 안마셔서 다녀오자 마자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