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회: 인생무상(人生無常). -->
장백만에 맞아죽자 하오문 후계자 회의는 엉망이 되었고 하오문 수뇌부는 자리를 피하기 급급했다. 그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돌발 상황이 일어나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고 이 일의 뒤처리도 할 줄 몰랐다. 결국 전 문도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하오문 문주의 살인사건은 그날 저녁이 돼서야 정리가 되었고 특정다수의 하오문 문도라는 것 말고는 단서가 없어 수사도 하지 못했다.
하오문 장로들은 결국 따로 자리를 마련해 대책 마련을 하는 한편 예정대로 흑운 공주를 하오문 문주 자리에 앉혔다.
소연자도 그리고 망월 공자와 새 문주로 선출된 장백만 장로도 죽은 이상 그녀 말고 하오문을 이끌어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살 사건과 관련해 종명에 대해서 처벌이 내려졌지만 하오문 문주가 된 흑운 공주는 특별히 종명에 대해 처분을 가볍게 하는 쪽으로 일을 마무리해 하오문 내부에서 새 하오문 문주가 된 흑운 공주에 대한 평판이 크게 올라갔다.
흑운 공주의 하오문 문주 등극과 배후 세력으로 추정되었던 장백만 장로의 죽음 모든 것은 불과 하루아침에 이뤄졌다. 그리고 이 일을 뒤에서 주도한 제갈 사혁은 한가롭게 호남으로 가는 마차에서 호남 분타주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말 안 만나고 갈 거예요?”
“일도 잘 처리했겠다. 배후 세력도 처리했겠다. 뭐가 문제인데요. 눈물 흘리며 작별 인사라도 할까요?”
그래도 며칠 같이 지낸 정이란 게 있는 법인데......
청하는 흑운 공주와 만나지 않고 떠나는 게 못마땅했지만 이래저래 이번 일의 주도권은 제갈 사혁이 잡은 터라 그를 닦달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입에 맞지도 않는 차를 훌쩍거리며 하남 분타주와 마주 앉은 제갈 사혁은 이번 일을 분타주에게 설명해주었다.
“결국 장백만이 이번 일의 배후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문주로 뽑혔으니까. 그게 가장 이득을 보았으니까.”
“단지 그 이유 하나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었다. 단지 제갈 사혁은 미래를 알고 또 그 미래를 참고해 추측을 할 뿐이다.
“그 자리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이 발생했고 그 결과 그 누군가는 흑운 공주와 망월을 죽이고자 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 둘이 죽으면 그 자리는 그 자리를 원하는 자가 앉게 되겠지.”
“..........”
“결국 누가 뽑혔지? 말해봐. 하오문 문주는 누구지.”
달리 이번 일을 타인에게 설명해줄 수 없었던 제갈 사혁은 아주 당연한 정론을 내세웠다. 그렇다고 호남 분타주의 멱살을 잡고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믿어라!’라며 뜬금없이 헛소리를 늘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좌호법 우사가 죽이고자 한 사람은 애초에 소연자가 아니라 망월이다. 문주라는 자리는 망월을 죽여야 얻을 수 있는 자리, 소연자를 죽여 봐야 그 자리는 절대 앉지 못한다.”
소연자는 장백만에게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망월과 소연자가 함께 있을 때를 노려 좌호법 우사가 쳐들어왔다는 것도 약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장백만을 죽였으니 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아아~ 전 이번 일에 대해 정리 좀 해야겠어요. 스승님한테 보고하려면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그런 청하를 보며 차를 훌쩍 거린 제갈 사혁은 미간을 찡그렸다. 뒷맛이 개운하지 못한 게 뭔가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오문 흉조의 집무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습니다.”
흉조의 안색이 좋지 못하자 좌호법 우사는 아편을 피우며 코웃음을 쳤다.
“흥! 네놈이 용의선상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좋은 일 아니냐?”
손에 쥔 호두를 으깨며 좌호법 우사는 가루가 된 호두를 껍질째 입에 털어 넣었다.
“무엇이든 뱃속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말씀대로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겠죠. 다만 아쉽습니다. 장백만 그 친구와는 제법 말이 통해서 그를 하오문 문주로 추대한 것이었는데.”
흉조는 애초에 적당주의(適當主義)였다. 좌지우지할 권력만 손에 넣으면 반드시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않아도 되고 눈의 띄지만 않으면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손에 넣는.
호남 분타주 시절 청하의 밀지를 빼돌리고 그 과정에서 청하의 밀지를 무림맹에 도착하도록 내버려둔 것이 그의 성격을 대변했다.
“그 계집을 살살 구슬리면 될 것 아니냐?”
“뭐 그런 애송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다만.....”
“다만?”
“이번 일에 누군가 개입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분명 호남 분타주와 안휘 분타주가 흑운 공주를 도운 건 사실이지만 그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힘의 차이가 보입니다.”
확실히 그랬다. 애초에 이번 일을 꾸민 것은 전적으로 흉조지만 흉조가 드러낸 행적은 검영단을 이용해 호남 분타를 습격한 일이다. 호남 분타주는 그가 자리에 앉힌 사람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번 일에 대해 걸고넘어지지 못할 테지만, 검영단을 몰살시킨 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흉조 본인도 호남 분타주에게 답을 듣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분명 이번 일을 방해한 누군가가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너를 잡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랬다. 결국 흑운 공주가 살아남은 것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장백만이 죽은 것. 이번 일을 통해 불이익이라 할 만한 것은 이것뿐이었다.
“그 놈이 누군지 몰라도 자기 딴에는 분명 이번 일을 잘 처리했다며 자화자찬 하고 있을 것이다.”
호남 분타주가 태워준 마차를 통해 무림맹에 도착한 청하는 무림맹에 도착하자마자 스승인 성제에게 보고서를 올렸고 제갈 사혁은 이신을 낀 채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무림맹 짬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니까. 이거 봐봐 무림인들의 건강은 생각도 않고 소금 팍팍 친 이 멋진 음식을 역시 요리는 짤 수록 맛있어!”
스스로 합리적이고 냉소적인 척 잘난 채를 하며 밥을 먹는 꼴은 누가 옆에서 보면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을 정도였다.
“제갈 사혁~”
화산파의 후계자. 그 감투 때문이라도 친구가 많을 법 하지만 제갈 사혁의 지랄 맞은 성격 때문에 무림맹 내에서는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굳이 한명 뽑자면 지곤 한 사람 뿐이었다.
“지곤.”
“술 한 잔 할 테냐?”
웬만한 술은 모두 통달했다는 지곤이 술을 마시자며 권하면 이는 분명 보통 술이 아니었다.
“좋은 거냐?”
“육우(陸羽)가 만든 명주지!”
육우는 술이 아니라 다도의 신이라 불리는 차의 달인이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걸 걸고넘어지지 않더라도 지곤이 이렇게까지 표현할 정도면 분명 보통 술이 아니었다.
“좋아. 마시고 죽자!”
“옆에 제자는 나이가?”
지곤이 이신을 가리키자 제갈 사혁은 이신을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이신의 의견을 물었다.
“너 마실래?”
“하지만 전 아직 어리잖아요.”
열다섯 앞으로 성인이 되려면 3년이나 더 남았다. 하지만
“술은 원래 빨리 배우는 게 좋아.”
제갈 사혁 같은 사람이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제대로 된 어른 일리 없었다.
무명천으로 된 마개를 풀자 술에서 생전 맡아보지 못한 단내가 났다. 술을 마시자 식혜처럼 단맛이 나더니 순식간에 화기(火氣)가 올라왔다.
“야 이거 뭐냐? 확 올라온다.”
“사부님이 담그신 술인데 어때 좋지?”
지곤의 스승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술 자체는 정말 진귀했다. 술을 마실 땐 한 번에 목으로 넘기는 제갈 사혁은 이 술을 두 잔째 마실 때는 입 안에 퍼지는 술의 단맛을 즐길 정도였다.
“지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구월상과 남궁 미려도 제갈 사혁과 지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지곤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모임인 듯한데.
“안녕하세요.”
이신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구월상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받아주었고 남궁 미려는 가볍게 손을 들어주었다.
“아.... 그거냐? 설마.”
구월상은 지곤이 마시고 있는 술을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뭐야? 천하의 구월상이 술 앞에서 약한 척을 해?)
구월상은 개방에서 알아주는 호남 (好男)이었다. 지곤만큼은 아니지만 주는 술을 마다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겨우 술 앞에서 약한 척이라니 제갈 사혁 그런 구월상의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그러더니 실없는 사람 같은 말을 내뱉고는 도망쳐버렸다. 도저히 제갈 사혁이 알던 구월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쟤 왜 저래?”
“하하하~ 월상은 이 술을 한번 마셔봤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지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그 놈이 누군지 몰라도 자기 딴에는 분명 이번 일을 잘 처리했다며 자화자찬 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편의 모든 게 이 한마디에 담겨져 있습니다.
미래(소연자 흑운공주 망월공자가 살해당한)를 알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단순히 또 다시 장백만이 하오문 문주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 마치 이번 일이 전부 잘 해결됐다 생각을 하게 됩니다.
회귀를 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잘 풀리지만 그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흉조가 검영단을 이용해 호남 분타를 불태운 내용에서 일부러 흉조의 이름을 노출 시킨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모두 흉조가 꾸민 일이지만 제갈 사혁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계속 장백만을 의심하죠.
그 결과 하오문에서 다시 검영단 습격을 언급할 때 호남 분타주 역시 흉조와의 관계 때문에 흉조의 이름은 언급하지 못했고 제갈 사혁도 이 부분을 두리뭉실하게 넘어갔죠. 처음부터 장백만이 무조건 이 일에 배후라고 믿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