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회: 인생무상(人生無常). -->
호싱을 죽인 후 사뿐하게 등을 돌렸다. 그런데.....
“이것 봐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이신과 남궁 미려의 합공에도 왕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두 사람이 왕력을 상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대단한데.)
두 사람의 합을 절묘하게 막아낸 왕력은 강하게 몰아치는 이신에게는 부드럽게 빠르게 치고 오는 남궁 미려에게는 보다 더 빠르게 대응하며 두 사람을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신이 폭류신공을 사용하면 쉽게 끝날 거라 계산했는데 아직 왕력 정도의 노련한 무림인을 상대하기엔 역시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도 폭류신공을 섣불리 사용하지 않고 상대의 기량을 보려 한 것은 칭찬해주마.)
어차피......
“!”
“!”
“!”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지자 이신 남궁 미려 그리고 왕력은 결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제갈 사혁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경험이고 나발이고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
미쳐 날뛰는 맹수처럼 요동치는 내공이 제갈 사혁의 몸을 감싸며 발산되자 돌풍처럼 몰아치는 내공에 대항하려던 왕력은 얼굴이 빨게 지며 쉽게 몸을 가누지 못했다.
“너..... 넌 누구냐?”
남궁세가에서 남궁 미려를 호위하기 위해 붙인 호위무사인줄 알았지만 이 기운은 도저히 호위무사 수준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강호에 이름 난 고수가 틀림없었다.
“화산파.”
“화산파?”
순간 왕력은 머리를 굴리며 화산파라는 단어에서 한 인물을 유추해보았다. 현재 공식적으로 강호에 나온 유일한 인물.
“화산망종 제갈 사혁.”
여전히 그 이름 앞에는 화산의협이 아닌 화산망종이라는 별호가 뒤따랐다.
“뭐 좋아. 마음에 안 드는 게 한 가지 있지만 내 이름을 빨리 생각해낸 점은 칭찬해주지.”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갈 사혁은 매화오행보를 펼쳐 왕력에게 다가간 후 왕력의 어깨를 후려쳐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
왕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도 잡지 못한 채 불의의 일격에 무릎을 꿇었고 제갈 사혁은 무릎 꿇은 왕력의 손을 발로 밟았다.
“묻겠다. 천근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대답해 줄 성싶.... 크악!”
“알아. 사나이 입이 그렇게 쉽게 열릴 리 있나. 그래서 정말 좋아. 너 같은 놈들이.”
그러면서 왕력의 뺨을 기분 나쁠 정도로 살살 때렸다.
“그 단호한 주둥이가 언제까지 자존심을 지키는지 한번 보자고.”
제갈 사혁은 부러진 왕력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왕력은 인상을 구기면서도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았고 제갈 사혁은 더욱 더 손에 힘을 줘 왕력의 자존심을 긁기 시작했다.
“주군께 손 대지마라!”
바로 그때 방립을 쓴 어떤 남자가 제갈 사혁의 눈을 향해 암기를 던졌다.
정확히 눈을 향해 날아오는 암기에 제갈 사혁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날아오던 암기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선 후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제갈 사혁은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여유 있게 암기를 던진 상대의 목을 부러트린 후 별 일 아닌 척 대범하게 표정관리하면서 다시 왕력을 고문하려 했다. 그런데 제갈 사혁 나름의 폼 나는 계획은 암기를 던진 놈을 본 순간 틀어져버렸다.
“너 이 자식! 내가 여기 오지 마라했지!”
암기를 던진 놈의 왼팔에 목이 감겨 있는 종리를 본 순간 제갈 사혁은 짜증이 밀려왔다. 그렇게 따라오지 마라 했는데 결국 이렇게 나타나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예상은 했지만.)
사실 마을 뒷산이고 또 그리 멀지 않아서 따라올 수도 있겠다고 예상은 했는데 하필 인질로 잡힐 건 또 뭔가.
“좋아 진정해 애부터 풀어줘.”
“주군의 안전이 먼저다.”
종리보다 왕력이 우선이라는 녀석의 말에 제갈 사혁은 호황을 뽑아들었고 이를 본 왕력의 부하는 날이 선 검을 종리의 목에 가져다 댔다.
“사부!”
이신은 내심 제갈 사혁이 왕력을 벨 것 같아 불안했지만 제갈 사혁은 이신을 향해 손을 들었다.
“자 진정해 이걸 뽑은 이유는 휘두르기 위해서가 아니야. 미려. 내게 검을 줘.”
“내꺼?”
남궁 미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구겼지만 제갈 사혁은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말했다.
“어서 내게 줘.”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지만 일단 남궁 미려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 제갈 사혁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어서 가.”
양손에 검을 쥔 제갈 사혁은 왕력에게 가라며 눈치를 주었다.
“허튼 짓 하지 마라!”
왕력의 부하가 두 손에 쥔 검을 보고 경계하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왕력은 인질을 생각해 제갈 사혁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후 천천히 자신의 부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왕력이 손에서 벗어나자 제갈 사혁은 재빨리 왕력에게 종리 아범의 행방을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잡혔다고 들었다. 어디에 있나?”
“말해줘야 할 의무는 없다.”
왕력이 종리 아범의 행방에 대해 함구하자 제갈 사혁은 두 자루의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잊지 마라! 아직 아이가 우리 손에 있다.”
왕력의 부하는 인질인 종리를 언급하며 제갈 사혁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알고 있다. 무기를 그쪽으로 던질 테니 아이를 풀어줘라.”
제갈 사혁이 두 자루의 검을 왕력과 그의 부하를 향해 던졌다.
“이제 아이를 풀어줘라.”
“아이는 우리가 무사히 도망치게 되면 풀어주겠다.”
그런데 그 순간 왕력의 부하는 종리를 풀어주지 않고 왕력을 부축한 채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인질인 종리를 데리고.
“나도 니들이 그럴 거라 생각했어. 합!”
기합소리와 함께 제갈 사혁이 내공을 운용하자 두 자루의 검이 정확히 두 사람의 목을 관통했다. 어차피 이왕 이렇게 된 거 왕력을 죽여서라도 종리를 살려야 했다.
물론 천근과 관련해 왕력을 심문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만 왕력은 무림문파의 문주다. 왕력을 죽인다고 해서 당장 문파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왕력이 안되면 왕력이 속한 문파를 쥐어짜면 될 일.
이신은 서둘러 종리를 구하러 갔고 남궁 미려는 천천히 제갈 사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내가 본 게 분명 그게 맞지?”
평소라면 ‘처음 봤냐?’ 라며 농담이라도 하겠지만 오늘 하루 기력이 너무 많이 쇠해서 힘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당장 움직일 수 없었던 제갈 사혁은 그래도 자신을 제외하면 가장 빠른 이신을 통해 지곤에게 연락을 했고 다음 날 아침 지곤이 청성파 사람들과 함께 사건이 일어난 마을에 도착했다.
조사 결과 왕력이 천근에 대해 알게 된 건 종리 아범의 친구라는 그 상단주가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천근이라는 단어의 가치는 말 그대로 천금(千金)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리의 아버지는......
“아버지!!!!”
근처에 있는 어느 작은 산장에서 종리 아버지의 시신이 발견됐다.
종리는 밤새 아버지의 시신이 담긴 관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이 일로 제갈 사혁과 지곤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저 꼬마는 어떻게 할 거냐?”
“청성파에서 거두겠지. 원래 아들의 속가제자 입문을 조건으로 정보원이 된 거니까.”
그러면서 지곤은 독한 죽엽청주(竹葉青酒)를 들이켰다.
“가능하면 왕력의 일도 처리하고 싶은데.”
이런 일이 있었지만 왕력의 천수검파는 엄연히 정파다. 게다가 천근과 관련된 일은 함부로 발설할 수 없기 때문에 이번 일과 관련해 천수검파를 해코지 할 수도 없었다.
“천근과 관련된 천수검파 사람만 추려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애초에 뜻대로 안되면 천수검파를 은밀하게 쥐어짜내려고 했으니까.”
“그 전에 왕력을 죽인 건 어떻게 할 거야?”
“사건을 조작해야지. 어찌 되었든 천수검파도 정파니까.”
화산파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번 일을 천수검파의 잘못으로 매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무림맹에서는 명문정파와 삼류방파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는 터라 이번 일을 그대로 드러내면 자칫 무림맹의 기둥이 흔들릴 수 있었다.
“천수검파 문주 왕력은 정체불명의 적들과 싸우다 당한 걸로 해둬.”
왕력의 죽음은 청성파나 다른 연줄을 이용하면 그럴싸하게 꾸밀 수 있었다.
“남궁 미려와 나는 친척이니까 말 맞추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내가 잘 말해서 남궁세가와 함께 뒤처리를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천수검파는?”
“그쪽은 걱정 하지 마. 우리 같은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이번 일을 조사하겠다고 하면 천수검파 쪽에서는 우리를 믿고 맡길 거야. 청성파는 분위기에 휩쓸린 척 끼어들어서 우리를 살짝 거들어줘.”
제갈 사혁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일을 은폐하려 했고 이번 일을 뒤에서 사주한 지곤도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
천근이 발견되면 그것은 청성파에 맡기면 될 일. 천근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나 제갈 사혁은 천근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일이 터진 건 그로부터 3일 후였다.
천수검파 문주 왕력의 죽음이 전 무림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여론은 들끓었고 그 범인을 찾는데 강호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이번 사건을 조사하는 곳은 화산파 청성파 남궁세가 그리고 제갈세가였기 때문에 사건을 뒤흔들만한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천수검파 왕력 문주의 장례식은 아침부터 시작해 저녁 늦은 시간까지 무림맹의 주관 아래 사천당가의 사유지에서 거하게 치러졌다.
“저기 저 꼬마가 왕력의 아들입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가운데 괄귀가 다가오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키신 대로 알아본 바로는 이번 일에 대해서 왕력과 그 측근인 그의 호위만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계속 감시할까요?”
“계속해. 1년 정도는 꾸준히.”
“알겠습니다.”
“이런 일을 시킬 사람이 너 뿐이라 부려먹고는 있다만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어느새 괄귀가 사라진 후였지만 듣고 갔으리라 믿었다.
시신이 운구 되는 것으로 보여주는 장례가 일단락되자 제갈 사혁은 침울한 얼굴로 왕력의 아들에게 다가갔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희 아버지를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다면....”
사건 상 제갈 사혁은 왕력이 흉수들에게 당한 후 우연히 그 장소를 발견한 목격자로 되어 있었다.
열 살도 안돼 보이는 아이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젖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를 다독이며 떠나려던 차, 왕력의 부인이 제갈 사혁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소협께서 그 사람을 발견해주시지 않았다면 이름 없는 산에서 쓸쓸히 죽어갔을 겁니다.”
슬프지만 그래도 예의를 지키며 감사를 표현하자 제갈 사혁은 부인의 손을 잡아주었다.
“흉수는 반드시 그 정체를 밝혀 문주님의 복수를 해드리겠습니다.”
“정말...... 정말 우리 아빠 복수 해주는 거죠.”
아이가 울면서 아버지의 복수를 부탁하자 제갈 사혁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약속하마.”
“이거 형 줄게요.”
아이가 준 물건은 그냥 평범한 손수건이었는데 왕력의 이름이 수놓인 것으로 보아 그의 유품인 듯 보였다.
유품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제갈 사혁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온 뒤 횃불 속으로 손수건을 던져버렸다. 비록 거짓이지만 아이에게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 해주겠다며 약속한 뒤 돌아서는 제갈 사혁의 얼굴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 작품 후기 ============================
개싸움처럼 보이는 건 제가 항상 그렇게 보이도록 쓰니까요.
아무리 먼치킨이라고 해도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나야지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양학은 가볍게 1:1은 무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