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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근 사건 아니 천수검파(天水劍派) 문주 왕력 살인사건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림맹주 강서가 임기를 훌륭하게 끝마치고 무림맹 장로들의 투표로 신임 맹주가 새롭게 선출되었다. 제갈 사혁의 예상대로 무림맹주는 비검파(緋劍派) 문주 판가량이 오르게 되었고 비록 정사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판가량은 맹주 연설에서 사마무림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내비치며 정도 무림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우리는 항상 대비해야 합니다. 언제 청해를 뒤집고 마교인들이 나타날지 모르며 사천성 밑에는 흑사련의 무도한 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맹주 취임식에서 이런 종류의 연설은 대부분 맹주 자리에 오르면 자신에 대한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행사의 일환처럼 하는 것들이지만 판가량은 실제로도 흑사련과 마교를 대하는데 있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명문정파 출신의 맹주가 아니지만 무림맹 장로인 사숙에게 부탁까지 해가며 뒤에서 판가량을 지지했다.
“역시 판가량이야. 시대는 변해도 사람의 편견은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맹주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조직에 기강을 잡으려는 듯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다.
그 개편의 중심에 있는 게 바로 출사는 반드시 의무적으로 한 달에 세 번 이상의 임무를 나가야 한다는 출사에 대한 의무제도와 실적 개편이었다.
사실상 출사제도는 각 문파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고 있는데 그 점을 이용하여 무림맹 내에서 놀고먹는 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갑작스러운 개편으로 인해 무림맹 안에서 크고 작은 말들이 많았지만 지난생애와 달리 전임 맹주였던 강서와 화산파의 노골적인 지지를 받고 이번 맹주 위에 오른 판가량이기 때문에 정치적 위상이 지난생애와 달리 매우 막강해져서 실제로 대놓고 불만을 표하는 곳은 없었다.
같은 중소방파 출신의 무림맹주를 세워 뒤에서 쉽게 득을 취하려 했던 자들에게는 사실상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사부는 괜찮아요.”
“나야 뭐 전적 화려하지. 저런 건 실력 없는 놈들이나 걱정하는 거야.”
제갈 사혁은 그런 면에서 걱정이 없었다. 공식적인 출사 임무는 아니라지만 흑사련 칠객에 속한 인물 중 두 명을 이긴 것이 크게 먹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연이은 칠객 격파는 누가 무어라 해도 정파 최고 실적이었다.
때문에 제갈 사혁에게는 새로운 무림맹주가 뽑히기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오늘은 뭐하고 시간을 보낸 담~”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신임 무림 맹주의 이러한 개편이 무리하다는 의견이 넘치는 가운데 일이 터졌다.
출사 중 한명이 임무완수 사실을 허위로 기재한 것이다. 이 일이 크게 번져 대대적인 조직감사가 시작되었고 몇 곳의 크고 작은 중소방파가 강제 적출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임 맹주의 칼바람이 무섭네.”
강서와 달리 판가량은 결단력이 대단했으며 무림맹은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해 크고 작은 성장 통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무림맹이 내부적인 일로 떠들썩할 때 기다렸다는 듯 일이 일어났다. 청해에 위치한 곤륜파가 신강에 위치한 마교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마교와 곤륜의 대립이야 청해와 신강이라는 지역 위치상 술자리 안주꺼리도 못 될 만큼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가 다름 아닌 현 십야성주 추백성(追白星)이기 때문이다.
추백성은 아직 구궁성주에 머물고 있는 망지성 이전에 십야성주로 전 무림에 그 이름 석 자를 남긴 희대의 고수.
마교의 이름난 고수가 직접 움직여 애먼 곤륜의 경계를 뚫었다는 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제갈 사혁은 이 일이 발생하자마자 백호 대주이자 화운산에서 비밀리에 망지성과 만나 대결을 하던 혜성을 찾아갔다.
“곤륜계집!”
백호대주의 집무실 문을 발로 차자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우글거리는 땀내 나는 소굴 한 가운데에서 무기를 손질 중인 혜성이 보였다.
“이야기 들었냐? 화산망종.”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십야성주가 곤륜의 경계를 허물어트렸다니 두고만 보면 정사대전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그 사람은 뭐래?”
제갈 사혁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망지성을 돌려 말했고 혜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와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임무 발령계를 냈으니 곧 우리 백호대는 공식적으로 곤륜을 방문할 거다. 원하면 같이 데려가 줄 수도 있다.”
백호대와 같이 움직여? 별로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분명 마교가 곤륜파를 공격한 것은 사실이나 굳이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은 사건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 시작되긴 한 것 같은데 전혀 감이 오지 않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경계 발령이요?”
백호대주인 혜성을 찾아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 사혁은 무림맹의 장로직을 수행하고 있는 도오 진인에게 불려갔고 공식임무를 받았다.
“이번에 곤륜에서 터진 사건이 단순한 무력도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오대주들만 움직이면 되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이번 일에 숟가락을 올려야 할 것 같구나.”
제갈 사혁은 이번 일로 청해에 위치한 무림맹 방파로 임시 발령이 났다. 무림맹에 의해서가 아닌 화산파에 의해서......
감히 사문의 명령에 항명할 생각은 없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감정을 속일 수 없었다.
“스승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인가요?”
“장문사형께서는 이번 일로 정사대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시고 계신다.”
20여 년 전 터졌던 정사대전을 직접 겪었던 세대에게 정사대전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할 재앙이었다. 하지만 제갈 사혁처럼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은 한번 쯤 터져줬으면 하는 게 바로 정사대전이었다.
(이번에 정사대전이 터지면.......)
특히 제갈 사혁 같은 경우는 더욱 그 입장이 복잡했다.
결과적으로 용화장에서 청하를 구해내 정사대전을 막았다. 그땐 그게 옳은 일이었고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청하라는 사람을 얻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태어나지 전에는 정사대전을 겪는 중이었고 그 결과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만 했다.
“믿을 사람이 너뿐이니까. 확실하게 해두고 싶으신 거야.”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기는 하지만 등 떠밀 듯 떠밀려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었다.
“화왕문(花王門)이다. 가서 며칠 있다가 오면 되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단순히 며칠 놀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마교와의 전면전이 터질 때 가장 먼저 쓸리는 곳이었다.
명색이 화산파의 후계자고 또 후계자를 그런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일이 화산파 입장에서도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닐 테지만 명문정파인 이상 할 때는 그 어느 문파보다 확실하게 했다.
발령이 결정되자마자 제갈 사혁은 그날로 짐을 쌌다.
“뭐 빠트린 건 없어요?”
자칫 정사대전의 첫 전장이 될 수 있을 곳으로 향한다는 말에 청하가 찾아와 제갈 사혁의 짐을 싸줬다.
“대충 챙긴 것 같습니다.”
“정사대전 같은 게 쉽게 터지겠어요. 그냥 며칠 놀다온다고 생각해요. 갈사 소협.”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지만 지난 날 그 정사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당사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굉장히 기분이 묘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날 저녁 떠나기로 했고 제갈 사혁은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없는 동안 청하에게 이신을 부탁했다.
“이신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그리고 이신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호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말이 뭐라고?”
“내가 뭐 잘못했냐? 미쳤냐? 너 이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아니지 틀렸어! 내가 뭐 잘못했냐가 아니라 그래서 내가 뭐 잘못했냐? 따라 해봐 그래서 내가 뭐 잘못했냐?”
“그래서.... 내가 뭐 잘못했냐?”
진지하게 작별을 고하며 떠나도 모자를 판에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제갈 사혁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한편 그 사람다워서 마음이 놓였다.
“도대체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청하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딴지를 걸며 있는 힘껏 제갈 사혁의 등을 때려주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통해서 그가 안심하고 떠날 수 있도록.
“아참~ 이거 받아요.”
청하는 제갈 사혁에게 털장갑을 껴줬다.
“청하..... 소저.”
이름 모를 짐승의 털로 짠 칙칙한 장갑이지만 분명 청하의 마음이 들어간 따뜻한 장갑임은 분명했다.
“청해는 여기보다 더 추우니까.”
“이런 건 언제?”
“언젠가 주려고 준비해두고 있었어요. 내공으로 뭐든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옷 단단히 입고 다녀요. 무공이 항상 모든 일에 있어 만능은 아니니까.”
떠나는 마차 위에 몸을 실은 제갈 사혁은 멀어져가는 정인의 모습을 두 눈에 담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며 손을 흔드는 두 사람 사이에는........
“청하 누나.”
“응?”
“저거 방금 전에 돈 주고 사온 거잖아요. 게다가 사부 주려고 산 것도 아니고 그냥 누나가 끼고 싶어서 산건데.”
제갈 사혁이 모르는 은밀한 비밀의 대화가 오고갔다.
“뭐 어때.”
“사부는 분명 청하 누나가 직접 짠 건 줄 알 걸요.”
“응. 분명 그럴 거야. 그렇게 오해하도록 내가 말했으니까.”
그것조차도 일부러 노렸다니 늘 바르고 성실한 청하만을 기억하는 이신은 이런 청하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곁을 떠나야하는 남자한테는 저런 작은 희망이라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비밀로 해야 한다.”
“사부를 속이다니 비겁해요.”
“여자의 거짓말은 남자의 희망이야. 잘 기억해두렴.”
그리고 그 거짓 희망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대참사의 도화선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감기에서 그나마 자유로워졌습니다. 다 나은 건 아니고 아직도 약을 먹고 있습니다.
저는 감기 중에 유독 목감기를 정말 심하게 탑니다.
그런데 몇일 쉬어서 그런지 재충전했다는 느낌보다는 하다가 안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글 쓰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오전 9시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몇번을 하다가 이제야 쓴 게 이겁니다.
나름 비장의 에피소드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려야 하는데 사실 소제목을 바꿨지만 이번 편의 소제목은 인생무상이 맞습니다. 그냥 분위기 좀 바꿔보고 싶어서 일부러 소제목을 바꿨을 뿐이죠.
아무튼 힘내서 써보겠습니다.
PS. 공지에 댓글 달렸나요? 제가 그 댓글을 못 읽었는데 죄송합니다.
일단 연재를 시작하려면 공지를 내려야 해서 생각 없이 지워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