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회: 절제 할 수 없는 -->
화왕문. 이름만 들어보면 무슨 문파나 될 것 같지만 상하관계는 상관과 부하 개념이기 때문에 무림맹의 하부단체라 보는 게 옳았다.
“도착하면 대장 노릇이나 하면서 시간 보내야겠네.”
어차피 하부단체 소속이면 화왕문 책임자가 직책이 아무리 높아도 기본적으로 출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치기 때문에 거기 가서 편하게 대장 노릇이나 하다가 무림맹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뭐야 이거......”
꼬박 3일 씩이나 마차 안에서 보내고 도착한 화왕문은 제갈 사혁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조직이 아니었다. 화왕문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은 딱 한명 뿐이고 그 한명도.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도착하자마자 전임자는 제갈 사혁에게 화왕문을 강제 인수인계 해버렸다.
“이봐 이게 도대체 뭐야?”
“뭐긴 뭡니까. 인수인계지.”
전임자는 한 40대 초반 정도로 무림맹의 병사임이 분명했지만 무사치고는 몸이 물렁물렁한 게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머리카락도 너저분하고 수염도 지저분한 게 생긴 걸만 봐선 그냥 동네 아저씨였다.
“그럼 당신은?”
“휴가 갑니다.”
휴가라니 제갈 사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정사대전이 터지네 마네 하는 판국에 아무리 말단이라지만 휴가라니? 게다가 휴가를 얻은 사람치고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꼭 휴가가기 싫은 사람처럼.
“무림맹에서 정식 공문도 떴고 아무튼 위에서 내려준 휴가니까. 복귀할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고는 정말 떠나버렸다.
제갈 사혁은 텅 빈 화왕문 마당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짓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상상했던 상황과 너무 많이 달랐다.
“뭐지.... 이게 아니잖아. 내가 상상했던 건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이 아니라고!”
처음 화왕문에 오면 기존 화왕문 세력과 마찰을 일으키며 동시에 무공을 선보여 기강을 확실히 잡아 부하로 만들어버린 후 대장 노릇을 하려 했던 게 제갈 사혁의 계획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화왕문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보이는 화왕문 사람이라고는 딱 한명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무림맹에서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나버렸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안 돼! 나한테 제발 이러지 마.”
현실을 부정하며 마당 한 가운데에 누운 제갈 사혁은 자신의 양 손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장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청하 소저~”
그녀가 자신을 위해 직접 짜준 장갑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안 돼. 마음 굳게 먹어야 해.”
하는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람이라고는 한명도 없지만 화왕문을 맡은 이상 일을 확실히 하는 수밖에.
“윗대가리들이 뭔 생각으로 이러는지 모르지만 해주겠다 이거야.”
일단 서고로 들어가 화왕문의 근무일지를 살폈다. 하지만 근무일지는 단 한 장도 정확히 작성된 게 없는 백지였다.
“뭐야 이거?”
근무일지가 백지라는 것을 확인한 제갈 사혁은 다른 잡서들도 뒤져봤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작성된 게 없었다. 청해와 신강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니 이 정도면 직무유기 사항이었다.
“이런 미친 이래놓고 휴가를 가?”
제갈 사혁은 휴가에서 복귀하는 놈을 곤죽으로 만들어 군기를 잡아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정신 상태를 가지고 정도 무림의 평화는 절대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서고 뒤지는 걸 포기한 제갈 사혁은 침실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전임 담당자가 휴가를 떠났기 때문에 생활용품은 그대로 남겨두고 가 생활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사는데 불편한 건 없겠네.”
두 다리 쭉 뻗고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벽에 붙어 있던 벽보가 떨어졌다. 벽보는 꽤나 낡아 보였고 오랫동안 이 방에 붙여 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어디 보자 뭐라고 쓴 거야.”
<화왕문은 적습을 아군에게 알리는데 그 목적이 있다.>
대충 읽어보니 화왕문의 규율 같은 거였다. 대충 무림맹에서 정해준 것 같았는데 유일하게 맨 밑줄에 다른 글씨체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가 원해서 온 곳이다. 후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자.>
“.............”
이것을 방금 전 휴가를 떠나버린 전임자가 쓴 건지 아니면 그 전전 전임자가 쓴 건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이곳에서 직무유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지원한다는 건 죽음을 각오한다는 의미. 어쩐지 휴가를 떠난 그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살기를 포기한 자에게 휴가라니.
“좋을 리가 없지.”
날이 저물자 곡창에 먹을 게 없다는 걸 안 제갈 사혁은 하는 수 없이 마을로 향했다. 경계지역이라서 마을까지 가려면 산을 한번 넘어야 했지만 경공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무림인에게는 그냥 좀 다녀오기 귀찮은 정도였다.
“!”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제갈 사혁은 순간 엄청난 기운을 느꼈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엄청난 기의 파동은 제갈 사혁으로 하여금 감히 대적할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뭐지 이 엄청난 기운은!)
그리고 그 기운에 순간 정신을 빼앗겨 멍하니 서있는 사이 달려오던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짧은 비명소리였지만 부딪힌 사람은 여자였다.
“죄송합니다.”
미안하다면서 뒤도 안돌아보고 서둘러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소매치기네.”
...... 소매치기였다.
소매치기를 당한 제갈 사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지 속으로 손을 넣더니 비단으로 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사람은 항상 준비가 철저해야 해.”
잠시 소매치기에 정신이 팔렸지만 방금 전 느꼈던 기운의 행방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시기에 그만한 기운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다니 모르긴 몰라도 이 근방에 마교의 고수나 그에 범접하는 자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괜히 찾아봤자 일만 꼬이고 좋은 꼴 못 볼 테니.”
정도 무림의 평화도 좋지만 지금은 자신의 배고픔과 편의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야채와 돼지고기를 사서 그 길로 화왕문으로 향했다.
“부엌은 좁아서 안 되겠고 어디보자~”
저녁 먹을 자리를 찾던 제갈 사혁은 마당에 냄비를 세우고 불을 피운 후 물에 된장을 풀어 돼지고기를 삶았다. 껄렁껄렁한 자세로 앉아 냄비에 배추를 썰어 넣고 어느 정도 고기가 익자 물을 반쯤 버리더니 간장을 넣어 고기를 조리기 시작했다.
“맞다. 밥 짓는 거 깜빡했네.”
밥이 없다는 걸 요리가 거의 완성돼서야 알아챈 제갈 사혁은 지금이라도 밥을 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뭐야? 쌀이 없잖아. 이런 개새끼가 쌀은 사놓고 가야 할 거 아냐!”
쌀이 없다는 걸 안 제갈 사혁은 너무 화가나 애꿎은 벽을 발로 찼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대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화왕문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요?”
밖으로 나가보니 웬 어린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아이는 옷을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꼬마야. 부모님 어디계시니?”
방금 전까지 쌀이 있다 없다로 화를 잔뜩 낸 제갈 사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나이는 한 일곱 살 정도였는데 아무리 집이 가난하기로 서니 아이의 옷을 못 사 입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미심쩍은 건 옷을 안 입은 건 그렇다 쳐도 마을에서 화왕문까지는 상당히 멀었다. 분명 아이 혼자 오진 않았을 텐데.
“일단 이거라도 입자.”
“소선(小船).”
“응?”
윗옷을 벗어서 덮어주려는데 여자아이는 갑자기 제갈 사혁을 소선이라 부르며 제갈 사혁의 품에 안겼다.
“소선.”
누군가의 이름인 듯 한데 아마도 아이의 지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꼬마야. 난 소선이 아니야.”
“소선.”
하지만 아이는 계속 제갈 사혁을 소선이라 불렀고 점점 밤이 깊어지자 제갈 사혁은 일단 아이를 하룻밤 이곳에서 재우기로 했다.
“소선. 잠이 안 와.”
“그래 그래 아무렇게나 불러라. 아 그러고 보니 꼬마야 이름이 뭐니?”
“유희(遊戱)잖아. 날 잊어버린 거야? 소선.”
이름이 유희라니 어린 아이 아명(兒名)으로는 딱이었다.
어느 정도 대화는 가능하지만 유희는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고작 자신의 이름과 소선이라는 누군가의 이름.
“일단 내일 옷 좀 사 입히고 소선이라는 자를 찾아보는 게 낫겠네.”
하지만 아이가 제갈 사혁 자신과 소선이라는 인물을 혼동하고 있다면 머리를 크게 다쳐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다고 봐야했다. 정말로 그 소선이라는 인물과 자신이 닮았을 리는 없을 테니까.
다음날 아침 제갈 사혁은 유희를 데리고 마을로 향했다.
“일단 옷부터 좀 사자.”
포목점에 들러 옷을 사려 하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과 동네 아줌마들이 유희에게 관심을 보였다.
“어머 귀여워라. 총각 딸이유?”
딸이냐는 말에 제갈 사혁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소선은 내 낭군님이야!”
“나.... 낭군?”
낭군님이라는 말에 포목점 주인과 동네 아줌마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고 제갈 사혁은 신분패를 꺼냈다.
“저는 소선이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거 보세요.”
신분패와 제갈 사혁의 얼굴을 번가라가며 보던 여인들은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 저 아이가 왜 총각을 소선이라고 부르는 거죠?”
“낸들 압니까. 아무튼 애가 입을 옷이나 좀 주세요. 그리고 소선이라는 사람도 좀 찾아봐주고 찾으면 저기 화왕문에 연락 주십시오.”
옷을 사 입히고 급하게 포목점을 나온 제갈 사혁은 소선이라는 자가 유희의 정인이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했다.
“뭐야 그럼 소선이라는 놈은 도대체?”
유희가 제갈 사혁과 소선이라는 자를 헷갈렸다면 소선이라는 자의 나이는 대충 20 초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소선 소선.......”
“?”
“나 배고파.”
배고프다는 말에 의원을 만나기 앞서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제갈 사혁과 유희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허리에 검을 찬 무리들이 마을을 쓸고 다녔다.
“서둘러. 장로님의 행방을 찾아라! 치매에 걸리신 분이니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한다.”
============================ 작품 후기 ============================
어제 하루 종일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만 생각했더니 어떻게 잘 떠오르긴 했습니다.
역시 생각을 두고 두고 해야 합니다.
PS. 저녁에 치즈라면을 만들 생각인데 치즈라면에 계란 넣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