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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의협-126화 (126/262)

<-- 126 회: 절제 할 수 없는 -->

이 부근은 유독 무림인들이 많기 때문에 대낮에 칼을 차고 집단 행동하는 사내들의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당연하단 듯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것은 ‘소란’이 아닌 ‘일상’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밖에 요란하게 시끄러웠지만 제갈 사혁은 애 돌보느라 밖에 정신을 둘 여유가 없었다.

뜨거운 국수 한 그릇을 시켜서 유희를 위해 따로 작은 그릇을 준비했지만 유희는 계속 큰 그릇에다 먹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아~ 진짜 여기 따로 조그마한 그릇 있잖아. 여기에 덜어 먹어.”

“싫어~ 나 큰 그릇.”

안 된다는데 떼를 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나 어렸을 때도 이랬나 싶었다.

“아~ 너 왜 하는 짓이 서희랑 똑같냐? 말 무지하게 안 들어요! 하여간 서희고 유희고.”

그런다고 그냥 놔둬버리면 뜨거워서 잘 먹지도 못하니 어쩔 수 없이 면이 아닌 국물을 따로 다른 그릇에 담아 식혔다.

콧물을 질질 흘려가며 기어이 그 뜨거운 걸 큰 그릇째 먹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은 귀여운 걸 떠나 안타깝기까지 했다.

화산파에서 어린 사제들을 돌본 경험이 있지만 있다한들 애들 보는 일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나중에 혼인하면 딸내미는 낳지 말아야지. 사내놈은 뒤지게 패서 말이라도 듣게 하지 여자애들은.”

문뜩 눈이 마주치자 유희는 해맑게 웃으며 서툰 젓가락질로 열심히 국수를 먹었다.

“요 봐봐! 귀여워서 때리기야 하겠어.”

뜨거운 국물과 사투를 벌이며 겨우 아침을 다 먹자 곧바로 의원을 찾아갔다.

소선이라는 인물과 자신을 혼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소선과 제갈 사혁이 닮아서가 아니라 유희에게 어떤 장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희는 자신의 이름과 소선이라는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 계십니까?”

의원에 도착하자마자 제갈 사혁은 정중히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문 너머로 가래 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환자 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환자라는 말에 관자놀이에 곤약을 붙인 노인이 가래를 뱉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거기 좀 앉아 보시오”

“제가 아니고 이 아이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총각이 건강한 건 내공의 흐흠만 봐도 알 수 있소. 보호자가 함께 있어야 하니 거기 앉아 보시오.”

약초냄새를 풍기며 다가온 의원은 유희의 입속이나 귓속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특별히 잘 모르겠는데...... 한번 속을 잘 제대로 들여다 봐야겠고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손에 내공을 모은 의원은 유희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내공을 사용할 줄 아는 의원에게 왔으니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선. 지금 이 할아버지가 뭐하는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돼.”

“나 심심해.”

아이가 금방 지루함을 느끼자 제갈 사혁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아지에게 당근을 물려주기로 했다.

“얌전하게 있으면 맛있는 거 사줄게.”

“정말?”

“그래.”

진료가 끝나자 의원은 갑자기 곰방대를 입에 물더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건 꼭 무슨 죽을 병 걸린 사람 앞에 두고 하는 행동 같아서 보기 좋지 않았다.

“치매야. 치매.”

“뭐?”

진료 결과로 나온 병명이 너무 황당해서 존댓말 쓰는 것도 깜빡할 정도였다.

치매라니 치매가 어떤 병인데 치매라니?

“선생님. 진료비 은자 1냥입니다.”

“나도 알아.”

“알만한 분이 지금 이러시면 안 되죠. 아니 무슨 은자 1냥이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글쎄 믿든 말든 치매라니까. 그러네.”

하지만 의원의 진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유희의 추정 나이는 불과 6~8세 치매에 걸리려면 추정 나이 뒤에 0이 하나 더 붙어야 한다. 치매라는 건 적어도 제갈 사혁이 아는 한 그런 병이었다.

“나도 그 비싼 진료비 받고 그런 농담 안 하네 이 양반아. 치매야. 확실히 치매야.”

저렇게까지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할 그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선이라는 인물과 자신을 혼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제갈 사혁도 유희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해 이곳에 데려왔으니 지금은 그냥 치매라고 믿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치매에는 약이 없어.”

“알겠습니다.”

“그래도 웬만하면 자극적인 음식은 주지 마.”

유희를 데리고 나온 제갈 사혁은 약속대로 당과를 사줬다.

“나 힘들어.”

힘들다고 해서 안아서 데리고 다니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보모가 따로 없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치매라고 하지만 이 아이는 고작 10년도 살지 못했다. 평생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니 이래서는 이 아이가 너무 가여웠다.

화왕문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화왕문 망루 위에 올라가 마교의 경계초소를 살피고 보고일지를 작성했다. 그런데 그때 제갈 사혁의 정수리를 향해 정확히 화살이 날아왔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꼴사나울 정도로 몸을 던져가며 몸을 피했다.

“이 새끼들이 미쳤나 지금!”

이 화살은 마교의 망루 쪽에서 누군가가 제갈 사혁을 노리고 쏜 것이 분명했다.

“어떤 새끼야?”

서둘러 반대쪽 망루를 살펴보자 웬 노인 한명이 활을 들고서 제갈 사혁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요것 봐라?”

요즘 무림맹과 마교의 분위기로 봤을 때 서로간의 도발은 자중해야 한다지만.....

“개새끼들 다 죽었어!”

..... 제갈 사혁은 그 정도로 어른이 아니었다.

즉시 옆에 있는 낡은 창 하나를 들어 마교의 망루 쪽으로 던졌다. 비록 창던지는 솜씨가 형편없어 망루에 닿지 못하고 무식하게 쭉 뻗어나갔지만 상대편에게 그깟 화살 한발에 기죽지 않았다는 뜻을 전하긴 충분했다.

“어디서 까불어!”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도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교의 경계초소 분위기는 전쟁을 준비하는 그런 느낌이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십야성주가 난리를 치면서 왔다는데 이유가 뭐지?”

현재 무림맹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십야성주 추백성의 행방이다.

이번 사건의 장본인인 추백성은 곤륜파를 통해서 정파의 경계를 뚫었고 현재까지 그 행방이 묘연한 상태.

“오려면 조용히 올 것이지.”

사실 말이 좋아 정파의 경계고 마교의 경계지 마음만 먹으면 마교 교주도 조용히 오고갈 수 있 수 있는 곳이 바로 무림의 경계였다. 절대 못갈 곳 아니고 못 올 곳 아니라는 소리다.

그냥 암묵적으로 서로의 영역을 정하고 넘어오지 않을 뿐이지 강제성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쳐들어오는 경우도 없었다.

경계근무를 끝내고 내려온 제갈 사혁은 아침에 빼먹은 기초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매번 빼먹지 않고 틈틈이 기초훈련을 해야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할래.”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던 유희는 제갈 사혁이 하는 기초훈련을 따라했고 발차기 동작을 똑같이 따라하려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이런 거 따라하는 거 아니야. 봐봐 옷에 흙 다 묻었네.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으이구! 손 좀 봐. 피 나잖아.”

유희의 옷을 털어주면서 문뜩 제갈 사혁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게 됐다. 이대로 소선이라는 자를 못 찾으면 이 아이를 화산파에 데려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보자.”

기를 전신으로 퍼트려 유희의 상태를 살펴본 제갈 사혁은 유희가 무공을 배우기 매우 적합한 몸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도청 사숙께 맡기면 잘 돌봐주시겠지.”

아무래도 도청 진인은 대사형 무원의 일도 있고 하니 유희를 제자로 삼으면 제자를 향한 안타까운 그 마음이 조금은 메꿔 질 것 같았다.

“유희.”

“왜 소선?”

“글쎄 난 소선이 아니래도. 뭐 아무튼 소선을 못 찾으면 나와 함께 가자.”

“응. 난 언제나 소선과 함께야!”

치매에 걸린 아이를 어디에 쓰겠냐만 어디에 꼭 쓰려고 데려가려는 건 아니었다.

아직 어린 아이이고 아이를 보호해줄 울타리가 없다면 어른은 기꺼이 아이의 울타리가 되어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줘야 한다. 그게 어른이니까.

마당도 쓸고 망루에도 올라가 마교의 분위기도 살피고 수발 들어줄 부하는 없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만약 유희가 없고 혼자 지냈다면 분명 제갈 사혁은 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뭔가 일을 저질러도 크게 저질렀을 것이다.

“아..... 이게 뭐야?”

빨래를 하고나서 제갈 사혁은 청하가 짜준 장갑이 조그맣게 줄어 버린 걸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뭐지 이거 왜 이래? 설마 마교 놈들의 계략인가?”

뜨거운 물로 빨아버리면 털실이 줄어버린 다는 걸 모르는 제갈 사혁으로서는 절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지 유희나 줄까.”

청하가 자신을 위해 직접 짠 장갑이지만 자신이 끼지 못하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소중한 것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

제갈 사혁이 빨래를 널고 있을 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이것 봐라~”

유희가 보란 듯이 문을 열고 나오자 그 모습을 본 제갈 사혁은 떡하고 입이 벌어졌다.

“야!”

방문을 열고 나온 유희는 제갈 사혁의 옷을 입고 있었고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제갈 사혁은 입에 거품을 물고 유희를 쫓아다녔고 뒤에서 제갈 사혁이 쫓아오자 신이 난 유희는 옷을 질질 끌고 다니며 온 마당을 쓸고 다녔다.

“잡았다. 요놈!”

“꺄하하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간신히 유희를 잡은 제갈 사혁은 마당에 대자로 뻗었다.

“한번만 더 한번만 더해!”

“더는 안돼요~ 이 아가씨야. 이리와. 왜 이랬어. 얼굴 좀 봐봐 콧물 범벅이네.”

아직 빨래도 다 못 널었지만 일단 목욕부터 시키는 게 순서였다.

(그리고 또 처음부터 빨래를 해야겠지 에효~ 내 팔자야.)

제갈 사혁이 빨래 걱정을 하고 있을 때 화왕문이 위치한 산 아래에는 오늘 아침 온 마을을 뒤지고 다녔던 사내들이 하나 둘 모였다.

“이것 좀 보십시오.”

방립을 쓴 사내가 우락부락한 노년의 사내에게 낡고 지저분해진 옷을 보여주자 노년의 사내는 인상을 구겼다. 분명 비바람에 쓸린 자국 때문에 엉망이 됐지만 자신들이 찾고 있던 자가 몸에 걸치고 있던 그 옷이었다.

“어디에서 발견했나?”

“산 중턱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냐?”

“이 산꼭대기에 화왕문이라고 무림맹의 소규모 분타가 있습니다.”

무림맹. 그딴 건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일에 비하면 한 없이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그는 누가 무어라 해도 마교의 십야성주 추백성이었다.

“무림맹 따위가 무서웠다면 내 직접 경계를 넘어오지도 않았다. 방해하는 것들은 전부 죽여 버려라.”

“존명!”

명령을 받은 무사들은 산짐승처럼 능수능란하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추백성이 따랐다.

한편 흙먼지를 뒤집어쓴 유희를 씻기느라 정신이 없던 제갈 사혁은 화왕문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코 풀어야지 흥.”

“흥!”

“좋았어. 아주 큰 놈이 나왔네. 으이구 더러워~”

“나 안 더러워!”

“그럼 이게 누구 코에서 나온 거야 이게?”

제갈 사혁이 놀려대자 유희는 얼굴을 찡그렸고 그런 유희를 보며 제갈 사혁은 볼을 잡아당겼다.

“맨손으로 다니니까. 넘어지면서 이렇게 다치잖아. 이거 껴.”

“이게 뭐야?”

장갑이 뭔지도 모른다니 이쯤 되면 치매라기보다는 그냥 많은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한 그 나이 때 어린 아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래서는 꼭 이 아이가 ‘아이’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꼴이잖아.)

“끼고 있어 손을 따뜻하게 해주니까.”

“우와~ 따뜻해.”

============================ 작품 후기 ============================

반로환동

네. 맞습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식으로 접근하려 합니다.

유희라는 이름에 드래곤의 유희를 떠올리셨는데 유희라는 글 자체는 한문입니다.

생각하고 계시는 그 뜻이 맞고요.

이번 편은 보모에 가까운 제갈 사혁입니다. 평소의 모습과 달라 굉장히 이질적이지요.

언젠가 제갈 사혁이 어린 사제들을 돌봤다고 언급을 했는데 그 대사를 이용해서 이번 에피소드를 꾸몄습니다.

치즈라면을 어제 처음 만들어 먹었는데 괜찮았습니다. 의견 주신대로 계란은 안 넣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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