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회: 절제 할 수 없는 -->
혹시 몰라 두 사람의 옷에서 신분패와 소지품 몇 개를 가져온 후 경공을 펼쳐 마교의 경계 지역을 지나 신강에 입성한 제갈 사혁은 콧잔등을 만지며 살기어린 눈빛으로 신강을 노려봤다.
마교의 땅을 가본적은 없지만 지금 자신이 내딛으려 하는 이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었다. 스물아홉 저물어버린 자신의 꿈 그리고 미래이기도 했다.
오직 정파의 승리 정파의 천하만을 위해 달려왔다.
그 목표가 설사 타인이 보기에 덧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가장 빛나던 시절 동경하던 것이었다. 그때의 비해 강해졌을지 모른다. 그때의 비해 여유로워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가버린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무공을 익히고 스물하나 앞으로 또다시 스물아홉이 되더라도 그 시절 가졌던 생각과 열정을 다시는 느낄 수 없다. 더 이상 그것을 목표로 달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강에 들어서자마자 제갈 사혁은 마교를 찾기 시작했다. 거의 하나의 작은 소국(小國)이라 생각해도 좋을 곳이 마교다. 오늘 그리고 내일 유희를 되찾아 오려면 늦어도 이틀 안에는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한다.
이 지역 내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마교의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활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변에 병사들을 위한 휴식처나 마교의 분타가 따로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신강에 들어오긴 했지만 십궁의 위치를 어떻게 찾는담?)
아무데나 들어가서 십궁이 어디에 있는지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를 들어 호북 지역에 가서 제갈세가가 어디냐고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줄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신강이다. 마교의 지배지역에서 십궁의 위치를 묻는다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그만큼 마교는 폐쇄적이다.
제갈 사혁은 일단 이 지역 병사들의 그들의 뒤를 따랐다. 병사들이 근무하는 곳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마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전달임무라던가 하는 것을 떠난다면 그 자의 뒤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제갈 사혁이 병사들의 근무지에 도착한지 두 시진이 지나자 그곳에 어떤 중년 남성이 찾아왔다.
“저 주문하신 물건인데요.”
“어디서 주문한 겁니까?”
“십궁에서 주문한 물건입니다.”
때마침 십궁으로 어떠한 물건이 전해질 예정이었고 운이 좋게 제갈 사혁은 때를 잘 맞출 수 있었다.
(바로 십궁으로 가는 길이 열리다니 운이 좋았어.)
십궁으로 물건을 전하기 위해 병사가 말을 타고 가자 제갈 사혁은 은밀하게 그 뒤를 따랐다. 설사 3일 밤낮을 달린다 해도 뒤떨어지지 않고 쫓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쫓아가자 거대한 성이 보였다.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들어가세요.”
하지만 그 거대한 성을 지키고 있는 자는 고작 단 한명이었다. 그것도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마교의 병사가 성 안으로 들어가자 제갈 사혁은 그곳으로 따라 들어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
순간 자신을 의식하고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 그녀의 한마디에 제갈 사혁은 움찔거렸고 그러는 사이 그녀가 열어준 문은 마교의 병사만을 허락하고 닫혀버렸다.
“나오세요. 비록 눈은 안보이지만 저는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확히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제갈 사혁은 지독한 살기를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방식이 잘못되었습니다.”
“방식?”
혈혈단신으로 마교에 쳐들어온 자신에게 방식 방법 그런 건 사치였다.
“십궁에 도전하는 자. 그리고 그들을 위한 입구는 이곳이 아닙니다.”
십궁에 도전한다니 그건 무슨?
“반대편으로 가세요. 그곳에 문이 있습니다.”
“............”
여기에 온 이상 여기에 존재하는 아니 길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새끼조차 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제갈 사혁은 지금이라도 이 여자를 죽이고 안으로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십궁이라는 말과 함께 십야성주 추백성을 떠올렸다. 이 모든 게 함정이라면 눈이 보이지 않는 여성을 앞세워 일을 도모하진 않는다. 그러한 자였다면 애초에 병사를 이끌고 곤륜파를 정면으로 뚫고 오진 않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은 말없이 그녀가 가르쳐준 곳으로 몸을 돌렸고 그녀는 바람에 자신의 염원을 담아 속삭였다.
“살아서 또 뵙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거대한 성을 한참 동안 돌고 돌아 반대편 문에 다다르자 제갈 사혁의 키의 세배에 달하는 거한의 사내 둘이 문 앞을 지켰고 순간 적이라 판단해 검을 뽑으려 했지만 두 명의 거한은 그저 말없이 양 옆에서 문을 당겨 십궁 안으로 제갈 사혁을 안내해줄 뿐이었다.
“...........”
제갈 사혁은 이 두 거한이 조금 전에 만났던 여인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호황에 닿은 손길을 거뒀다. 그리고 십궁의 문이 닫히는 순간 제갈 사혁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제갈 사혁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마교의 무사들이었다.
“환영식 한 번 요란하군.”
그야말로 정면 돌파만이 역경을 해쳐나갈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람을 주제로 그린다고해서 인물화 풍경을 주제 그린다고해서 풍경화라고 부르는데 말이야. 그럼........”
갑자기 시답잖은 농담을 내뱉기 시작한 제갈 사혁. 그것은 그가 가진 특유의 허세고 남다른 자신감 표출방법이다.
“시체를 주제로 그리면 인물화일까? 풍경화일까?”
그 말과 동시에 호황을 뽑아든 제갈 사혁은 육합검법을 펼쳐 수 십 자루의 검을 막아내 기세를 확 꺾었다.
“어떤 그림이 될지는 일단 한번 그려보자고!”
완벽하게 적들의 공세를 막아낸 제갈 사혁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기 위해 가장 약해보이는 궁수들 쪽을 노려 길을 열었다. 그러자 제갈 사혁의 의도를 감지한 여 검사가 혈사육마(血沙六魔)를 펼쳤고 초식이 하나의 틀을 갖추기 전에 매의 발톱과 같은 응조수(鷹爪手)로 팔목을 낚아채 오른팔을 꺾은 후 날아오는 화살의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동료가 당하자 이성을 잃은 몇 명 검사가 제갈 사혁을 몰아붙이자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공격을 흘려보내고 동시에 목을 점혈해 사혈(死穴)을 여는 걸 잊지 않았다.
혈도를 점혈 당한 사람들은 모두 혈관이 검게 물들면서 고통 속에서 호흡곤란으로 숨을 거뒀다.
“하아!”
죽음을 각오한 마교의 무사가 자신을 희생해 제갈 사혁을 붙잡을 요량으로 달려들자 발을 길게 뻗어 허벅지를 압박해 다가오는 것을 막은 후 손뼉으로 목을 쳐 기도를 막았다.
제갈 사혁의 행동 하나하나는 고수가 하수를 가지고 노는 듯 가벼워 보이고 여유롭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아니하며 그 행동 하나 하나는 불필요한 동작 하나 없이 오직 살인을 목적으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내공을 극도로 끌어 모아 있는 힘껏 앞에 있는 사람을 발로 차자 격산타우(隔山打牛)의 묘리를 응용한 듯 공격을 맞은 이도 그리고 그와 부딪힌 이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어디선가 천이 날아와 제갈 사혁의 목을 감자 순간 움직임이 멈췄고 창사가 긴 창대 들고서 황소처럼 달려왔다.
“이걸로 끝이다!”
뿔처럼 단단한 창은 창대가 휘면서 부러졌고 이 모습을 본 마교의 무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당황했다.
“도검불침(刀劍不侵).......”
“그럴 리 없어! 이렇게 젊은 나이에? 그런 자가 마교 내에 있다는 소문은 못 들었어! 말도 안돼!”
그 순간 제갈 사혁의 발끝에서 표미각(豹尾脚)이 펼쳐졌다.
“저 초식은 화산파다.....”
“정파다! 그는 마교인이 아니야!”
정파라는 말에 마교의 무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이는 제갈 사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야? 내가 온 줄 모르고 있었나?)
십야성주 추백성도 자신의 정체를 모르고 있지만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화왕문 그리고 청해 지역인 만큼 정파인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추백성의 부하라 할 수 있는 자들의 이 반응은 도대체?
(뭐야. 뭐라는 거야?)
이들은 제갈 사혁이 화산파 문도라서 놀란 게 아니라 무림맹으로 대변되는 정파인이라서 놀란 것이었다. 즉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제갈 사혁이 이곳에 올 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렴 어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들이 동요하고 있는 이때야말로 크게 한번 치고 나갈 기회였다. 제갈 사혁은 호황을 왼손에 쥐고 십사수매화검법(十四手梅花劍法)을 오른손으로는 금나수를 펼쳐 인질을 붙잡고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비켜라 모두!”
“저리 비켜!”
십궁의 문을 지키고 있던 거한 둘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달려오자 제갈 사혁은 거한의 거대한 손을 피한 후 다른 한명의 등 뒤에 올라탔다. 그러자 궁수들은 지체 없이 화살을 쐈고 날아오는 화살 하나를 낚아챈 제갈 사혁은 거한의 등에 올라탄 채 목덜미에 있는 급소에 정확히 화살을 찔러 넣었다.
“끄악!”
“너 이놈!”
동료가 당하자 다른 한명의 거한이 거대한 손으로 제갈 사혁을 움켜쥐려 했지만 제갈 사혁은 거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집중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생쥐처럼 도망치지 마라!”
“도망? 가소로운 놈!”
종아리를 찌르고 한쪽 무릎을 꿇자마자 제갈 사혁은 그의 눈을 노리며 사선으로 베었다.
“으윽!”
두 눈을 잃으며 동시에 엄청난 통증으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거한의 사내는 자신의 동료도 알아보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모든 것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혼전(混戰)으로 변할수록 모든 힘의 균형은 제갈 사혁에게로 기울었다.
“어.... 어어억!”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목에 찔러 넣은 검을 거칠게 뽑아내자 이름 모를 마교인은 생애의 마침표를 찍었다.
“죽어라!”
한쪽 팔을 잃고도 기어이 제갈 사혁의 숨통을 끊기 위해 왼손에 단검을 움켜쥐고 달려오는 여 검사의 이마를 빠르고 강하게 쳐 목을 부러트린 제갈 사혁은 주위를 둘러봤다.
시체더미 사이를 자세히 보니 궁수 한명이 살아 있었다.
“히익!”
제갈 사혁이 다가오자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고 제갈 사혁은 손을 뻗어 강하게 벽으로 몰아붙였다.
“살려주세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자였다. 남자라고 해서 죽이고 여자라고 해서 죽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 여자아이였다.
어리다고해서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짐승을 살려줄 제갈 사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 최소한 변명을 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조건을 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몇 살이냐?”
“허... 허..... 열일곱 헉... 살이요.”
벌벌 떨고 있지만 혹시라도 대답이 늦어지면 죽임을 당할 것 같아서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최대한 또박 또박 대답했다. 그러자 제갈 사혁은 주위에 널 부러진 화살 하나를 가져와 그 소녀의 두 손에 꼭 쥐어주었다.
“자...... 잘 잡고 여기를 찌르는 거야.”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소녀는 화살을 움켜쥔 채 움직일 줄 몰랐고 제갈 사혁은 소녀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가슴을 향해 인도했다.
“자....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게. 어서 찔러봐.”
점점 제갈 사혁의 가슴을 향해 강제로 이끌리자 소녀는 빌었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달라며 빌자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등에 걸고 있는 활을 빼앗아 부러트려버렸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제갈 사혁이 떠나자 소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죽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가 떠난 뒤 알 수 있었다. 죽이지 않는 대신에 그가 빼앗아 간 것은.......... 두려움과 맞설 수 있는 용기였다.
============================ 작품 후기 ============================
이번편은 꽤나 집중해서 썼습니다.
감기 때문에 아파서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일어나보니 11시라서 죽어라 썼습니다.
이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아파서 하루 늦다니 죄송합니다.
저도 정말 유리몸이라 감기에 걸리면 이렇게 속수무책이네요.
이번편은 진짜 책에 한번 실어보자! 라는 느낌으로 기합을 팍팍 넣었습니다.
쓰면서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제갈 사혁의 어떤 점에 포커스를 맞춰야 할까?
처음에는 뭐 보모? 다정한 남자? 뭐 이런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극악무도죠.
물론 제갈 사혁의 전매특허인 본성 혹은 광기도 빼놓을 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