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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의협-129화 (129/262)

<-- 129 회: 절제 할 수 없는 -->

다음 층으로 올라가자 용무늬가 새겨진 기둥과 넒은 복도 그리고 그 가운데에 웬 중년의 남자가 서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그 남자와 제갈 사혁 둘 뿐이었다.

“이제부터는 일대일이라 이거지?”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이를 갈고 있을 때 뜬금없이 중년의 남자는 포권을 취했다.

“..................”

서로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지만 먼저 인사를 한 이상 제갈 사혁도 예의를 갖춰 포권지례를 올렸다. 적대 관계를 떠나 인사란 그런 것이었다.

인사가 끝난 후 남자는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제갈 사혁의 눈을 어지럽히며 왼발 뒤꿈치로 머리를 정확하게 찼다.

“!”

쓰러지지 않으려고 억지로 버텼지만 코피가 흘러내렸다. 코피라니 이번 생애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서 신기할 정도였다.

(코피라니 별일이군.)

혈관을 압박해 코피를 막은 후 쇳덩어리처럼 단단한 그의 발차기를 손으로 밀어내듯 옆으로 흘렸다. 그러자 상대는 방향을 틀어 말이 뒷발굽으로 걷어차듯 쳐올렸고 제갈 사혁은 매화장법(梅花掌法)으로 상대의 발바닥을 감싸듯이 막아내 충격을 흡수했다.

공격이 목적인 장법을 방어형태로 사용한 것은 순전히 임기웅변 발휘한 것에 불과하지만 제대로 된 방어가 아니기 손목이 심하게 저려왔다.

(엄청나군. 역시 십궁이라 이건가? 밑에 있던 오합지졸하고는 차원이 달라.)

상대는 여전히 변화무쌍한 발재간을 보이며 정신적으로 압박해왔고 거기에 휘둘린 제갈 사혁은 눈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쫓기 급급했다.

(젠장!)

허초와 변초를 적절하게 섞어가며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뒤 발을 높이 들어 올려 제갈 사혁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큭.....”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기다렸다는 듯 발끝을 예리하게 세워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큰일이다. 귀가!)

귀에서 이상한 이명이 들리자 제갈 사혁은 당황했다. 순간 호황을 뽑을까 생각도 했지만 곧 죽어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권법이야 말로 자신의 주된 특기! 절대 다른 방식으로 이기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기세를 빼앗기면 다음은 없다!)

또 다시 어지럽게 발을 놀리며 다가오자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로 상대의 발을 먼저 붙잡았다. 그런 뒤 간결하게 무릎에 장타를 날리고 뒤로 재빨리 물러섰다.

(관절에 타격이 제대로 들어갔다면 분명 반응이 있을 거야.)

공격을 당한 직후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듯이 뒤따라가 공격당한 오른발로 제갈 사혁의 옆구리를 후려쳤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은 확실한 감을 잡았다.

(발차기에 힘이 없다!)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제갈 사혁은 허초와 변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으로 맞아가며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가장 자신 있는 거리에서 상대를 괴롭혔다.

복부를 내준 그는 발을 앞으로 쭉 뻗어 제갈 사혁과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이미 제갈 사혁은 모든 상황판단을 끝낸 후였기 때문에 더 이상 공격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단 옆구리를 쳐서 움직임을 봉쇄하고!)

권법사의 정석을 보여주는 하단 찌르기로 옆구리를 일부러 빗겨 치면서 통증을 유발하고 그로인해 두 팔로 방어를 단단히 하면 발을 밟아 상대의 허를 찔렀다.

“허!”

발을 밟힐 줄은 꿈에도 몰랐던 사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릎이 반쯤 굽혀졌고 복부를 단단하게 감싸던 팔이 내려오자 제갈 사혁은 흡정마공의 묘리를 이용해 복부를 움켜쥐었다.

“파(破)!”

제갈 사혁에게 모든 내공을 빼앗기고 육신을 보호하고 있던 외공이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 빗겨 맞은 옆구리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고 그것은 그로서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아악!”

외공이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내공을 필요로 하진 않지만 몸에 내공이 흘러야만 자연스럽게 유지가 된다. 외공은 완벽하게 익히고 나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의식하지 않아도 몸에 일부가 되는데 이것을 억지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들려면 온 몸에 내공이 한줌도 남지 않게 만들면 된다. 그렇게 되면 외공이 풀리고 평범한 육체가 되어 외공으로 경감시켰던 통증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이자처럼......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배를 움켜쥐며 비명을 지르자 제갈 사혁은 무심하게 그를 지나쳤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살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의를 갖추고 인사를 나눴으니 적이지만 사람의 도리를 할 뿐이다.

그 앞을 지나쳐 다음 방으로 가자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비록 한쪽 귀에서 이명이 들려 온전히 음색을 감상할 순 없지만 기가 막힌 소리였다. 게다가 악기를 연주하는 이가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사내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난 이호(二胡) 켜는 여자가 그렇다 좋더라.”

악기를 연주하던 여인은 연주하다 말고 제갈 사혁과 눈이 마주치자 앞방에서 중년의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제갈 사혁은 그 인사에 맞춰 포권지례를 올렸다.

서로간의 인사가 끝나자 여인은 이호를 켜기 시작했고 그 순간 여인의 주변에서 이상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뭐지?)

어디 불이라도 났나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먼지!)

그렇다는 말은.

“젠장! 음공(音功)인가?”

악기를 들고 있을 때부터 혹시 음공인가 싶었지만 역시 음공이었다.

제갈 사혁은 서둘러 호신강기를 펼쳤지만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이럴 땐 호신강기가 아니라 내공으로 귀를 보호할 막을 형성해야 했다. 하지만 제갈 사혁이 단 한 번도 음공을 사용하는 고수와 대결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뭐야? 왜 호신강기가?)

음공은 익히기가 힘들고 노력보다는 재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까다로운 무공이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고수의 경우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그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진정한 음공이라 부르긴 힘들다. 어디까지나 흉내 내기일 뿐.

그만큼 접하기 힘든 것이 음공이고 만나기 힘든 사람이 음공을 수련하는 무림인이다.

(호신강기가 안 먹히다니 도대체 뭐가 잘 못 된 거지?)

온 몸에 근육이 떨리고 몸속에 흐르는 피가 근육의 떨림에 반응하며 혈액순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마치 몸 전체에 쥐가 난 것 같았고 이대로 있다간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윽!”

절대 타인에게 꿇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무릎이 꿇리며 제갈 사혁은 몸속을 뒤흔드는 진동이 더욱 더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음공이란 무공 그 자체로서는 대단하지만 무적은 아니야.)

이를 악물고 버티려했지만 그런 차원의 오기는 통하지 않았고 결국 힘없이 쓰러지며 무적을 단언하던 그의 육신은 힘없이 쓰러졌다. 그런데 그 순간 제갈 사혁의 눈에 어떤 무언가가 보였다.

(뭐지? 통통 튀는 게 꼭 구슬 같은데.)

자세히 보니 구슬이 아니라 먼지나 모래 같은 것들이 음공에 반응해 통통 튀고 있었다.

“!”

바닥에 누운 채 음공에 짓눌리던 제갈 사혁은 바닥에 닿은 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이명 때문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규칙적인 형태의 진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을 압박하는 음공의 진동이 아닌.........

(박자다! 바닥에 튀는 모래알의 박자에 맞춰 내공을 끌어올려보자.)

음공이 만들어내는 박자에 저항하기 보다는 그 박자에 맞춰 튀어 오르는 모래알처럼 숨을 쉬는 것도 눈을 깜빡이는 것도 모두 흐름에 맡기자 완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음공의 압박에서 벗어나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제갈 사혁이 온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인은 음공의 유형을 바꾸기 위해 잠시 연주를 멈췄고 제갈 사혁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음공의 유형을 바꾸는 이 순간이 자신에게 온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기어검을 펼칠 때처럼 대기 중에 있는 내공을 장악하며 모든 신경을 이호의 현(絃)에 집중 시켰다.

(끊어져라!)

무언가를 향한 염원은 마음의 검이 되어 질긴 악기의 현을 끊어냈다. 그리고 이호의 팽팽하던 현이 끊어지면서 동시에 여인의 옷도 함께 아래로 흘러내렸다.

난생 처음 보는 여인의 알몸은 사랑하는 이일 거라 생각해왔던 제갈 사혁에게는 몹시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애써 침착했다. 이런 날을 위해 어린 시절 춘화(春畫)를 사서 침대 밑에 숨겨두지 않았던가?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간 제갈 사혁은 옷을 벗어 여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악기 값은 나중에 내 앞으로 청구해. 직접 받으러 오면 나야 좋고 한번 만나나 보자고 이호 켤 줄 아는 여자가 이상형이니까.”

머리에 피가 쏠리며 긴장한 것을 감추기 위해 한 농담이었지만 여인은 입을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 앞이 십야성주겠지?”

여인의 침묵은 긍정의 의미였고 제갈 사혁은 드디어 추백성을 만난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온 몸이 떨렸다.

이 문 너머의 사람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 알 수 있었다. 문 너머로 느껴지는 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을 압도적인 힘을.

“어디 그 잘난 낯짝이나 한번 다시 봅시다.”

============================ 작품 후기 ============================

원래 당초 계획은 기관진식(기계적인 함청)도 있고 뭐 그런 걸로 구상하려 했는데 쓰고 보니 마음에 안들어서 지웠습니다.

제갈 사혁이 기관진식에 당황하면 뭔가 우스워 보이기도 했고....

마지막에 음공과 대전하는 부분에서는 일부러 넣어보고 싶었습니다.

제갈 사혁이 음공의 소유자와 싸워본 경험이 없어서 당황하는 모습을..... 그리고 마지막에 추파를 던지는 것도 꼭 넣어보고 싶었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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