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31화 (131/262)

<-- 131 회: 절제 할 수 없는 -->

“볼 일이라니?”

“십야성주와 싸워보고 싶습니다.”

십야성주. 마교의 십궁을 지배하는 자. 마교의 직책으로 따지면 엄연히 우호법이었다. 교주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마교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자. 그런 자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를 벼려내지 않으려 한다면 강해지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망지성이 십야성주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이미 지난생애를 겪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추백성이 은퇴한다. 지금 이 순간 추백성과 싸우지 않는다면 평생 기회는 없다.

나보다 강한 자가 사라져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것 따위 용납할 수 없었다. 제갈 사혁의 강호는 그런 것이다.

무엇을 위해 무공을 익혔는가? 상기해라.

(싸우기 위해서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떠올려라.

(나와 다른 뜻을 가진 자를 꺾기 위해서다.)

“비록 맹세가 깨지기는 했지만 나는 절대 화산파와 싸우지 않는다.”

여전히 추백성은 소선. 담종 진인에게 입은 생명의 은혜를 들어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닙니까? 댁이 마교고 내가 정파. 그 이유면 싸울 이유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우리가 그렇게 따지기 좋아하는 대의명분 아닙니까!”

그리고 옆에서 이 모습을 본 십궁성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 젊은 애송이에게서 십야성주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음 한켠에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지만 저 애송이가 자신의 두려움을 대하는 그 태도는 실로 사내다웠다. 피하기보다는 부딪힌다. 젊은 혈기가 만들어내는 객기라고 해도 좋았다. 비록 자신은 두려운 게 없어진 나이가 되었지만 두려움과 맞설 수 있는 용기 아니 만용을 지닌 그 젊음이 부러웠다. 자신의 젊은 시절은 그러지 못했기에 더 더욱.......

“저놈 패기보소! 정말 내 후계자 삼았으면 소원이 없겠네. 아~ 구궁성주 미안하오.”

“아닙니다. 저자라면 십궁성주님 마음에 드실 법도 하지요.”

하지만 추백성은 절대 제갈 사혁과 싸울 수 없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자 제갈 사혁은 마교 전체를 들먹이며 추백성을 협박하기 이르렀다.

“만약 이대로 제가 무림맹으로 돌아간다면 이번을 조금 왜곡되게 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치졸하게 그런 걸로 협박하려는 것이냐?”

“협박이라니요. 그냥 사소한 오해가 생겨서 정사대전 정도 사뿐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전 무림에 혈풍을 불러일으킬 정사대전이 사소하다니 어린놈이 쎈 척하려고 선택한 단어임이 분명하지만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달랐다. 정사대전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원하는.

필요하다면 정말로 정사대전이라는 것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럼 본인이 나서겠소.”

그때 마침 나선 이가 다름 아닌 일궁성주였다.

“일궁성주 번천(翻天)이라고 한다.”

그 역시 젊고 강하다. 그 정도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상대로 부족함이 없지만 제갈 사혁이 원하는 자는 이자가 아니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조금만 더 버텨내면 이길 것 같은 그런 자가 아니었다. 당장 자신의 척추를 으스러트릴 정도로 강한 자를 원했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자를 원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그런 자를 꺾어야만 아니 꺾지 못해도 좋았다. 살아남는다면 강해질 수 있음을 알기에.

(뭐 좋아. 네놈을 쓰러트린 뒤 다시 흥정하면 되니까. 일궁성주? 좋아. 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라.)

“환경(環境). 무슨 소란이냐?”

제갈 사혁이 발톱을 드러내려는 그때 기절했던 유희가 깨어났다.

“환경!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무슨 소란이냐?”

분명 그 목소리는 유희였지만 유희의 분위기는 이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특히 말투에서부터 어린아이 티가 싹 사라진 게 꼭 어른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백성을 가리키는 단어인 환경이라는 이름은 추백성의 아명(兒名)이었다. 그와 그의 가족이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누..... 누님.”

“멍청한 녀석! 부르면 재깍 재깍 대답해라. 네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게 하려는 거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모습은 분명 유희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문앞에 있는 사람을 어린 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신 겁니까?”

기억이 돌아왔냐는 말에 유희 아니 주성임은 다 늙은 자신의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많이 커졌구나.”

“누님.”

“알고 있다. 내 상태에 관해선..... 그리고 소선.”

제갈 사혁에게 시선을 둔 주성임은 제갈 사혁을 일부러 소선이라 불렀다. 그리고 제갈 사혁도 주성임이 일부러 자신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선. 그것은 유희였을 때를 기억하고 있음을 제갈 사혁에게 알리려는 단어였다.

“그 정도로 해둬. 여긴 신교다. 필요에 의해 숨겨주고 있지만 발각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유희 아니 주성임이 그렇게 말하자 제갈 사혁은 얌전히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치매에 걸리시더니 갑자기 이런 모습이 되시고.”

“자하신공. 아마도 저기 저 아이가 화산파의 후계자겠지? 저 아이가 가까이 접근하자마자 본능적으로 그리 된 것 같구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은 자하신공을 한 번도 발현한 적 없음에도 자신이 자하신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살짝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며 물어볼 수 없었다. 조금 누그러진 분위기라지만 여기는 적진이다. 말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에도 신중의 신중을 거듭해야 했다.

생각 없는 질문은 뜻하지 않은 약점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소선이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하신공의 진기를 주입해서 내 목숨을 살린 적이 있었다. 환경. 그 일을 기억하느냐?”

“분명 크게 검상을 입으시고 그때 그 분이 누님의 목숨을 살려주신 걸 기억하지만 그게 설마 자하진기라고는......”

“치매에 걸려 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 감각만은 기억하고 있더구나.”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주성임은 치매에 걸렸을 때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아이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더니 그 후로 몸이 이렇게 되었다.”

어린 시절이라고 하지만 그 시절은 주성임에게 가장 따스했던 시절.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한 여인의 염원이 마침내 이뤄진 순간이었다.

“장로님. 환골탈태를 넘어 반로환동을 이루신 걸 축하드리옵니다.”

십궁성주가 반로환동을 축하하자 주성임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젊어진 것은 좋으나 무림인으로서 축하할 일이 절대 아니오.”

“네?”

무림인으로서는 축하할 일이 아니라니 그 무슨?

“나는 더 이상 무공을 익히지 못하오.”

주성임이 더 이상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는 말에 제갈 사혁을 포함한 모두가 당황해했다. 분명 전설의 반로환동을 이뤘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주성임이야 말로 무공을 익히는 모든 무림인의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내공을 모아 보려했지만 내공이 모이지 않소. 단전에는 이상이 없지만....... 내 짐작하건데 반로환동을 이루면 그것을 이룬 밑바탕인 무공을 잃는 것 같소.”

주성임의 말을 잘 풀이해보자면 반로환동. 젊음을 다시 되찾는 대가로 모든 무공의 근원을 잃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다시 젊어진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좋으나 무공을 잃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젊어진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이지만 그 대가치고는 너무 비싸지 않소.”

“누님.”

주성임도 무림인인 이상 그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알겠군. 반로환동..... 그런 것이었어.”

갑자기 제갈 사혁이 무언가 알겠다는 듯 말을 꺼내자 모두의 시선이 제갈 사혁에게 닿았다.

“반로환동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건 반로환동 자체가 실존하기 때문입니다.”

단어가 존재하는 건 그것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말은.

“반로환동을 이룬 고수가 생각보다 많을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반로환동. 그것을 이뤄낼 정도로 엄청난 고수가 다시 젊어졌다는 소린데 왜 우리는 한 번도 그러한 자를 본적이 없을까요?”

그러고 보면 반로환동을 이룬 고수가 강호무림에 커다란 족적(足跡)을 남겼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분명 그만한 고수라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 고수가 정말로 주위에 넘친다면 마교는 이미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무림맹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흑사련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무림을 보세요. 어디 한군데 사라졌습니까?”

확실히 그들이 생각하는 ‘반로환동을 이룬’ 고수가 실존한다면 현 강호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 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무공을 잃기 때문이죠. 여태까지 쌓아올린 걸 젊음과 맞바꾸기 때문이죠. 그리고 다시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기 때문이죠.”

결국 반로환동을 이뤘다고 해서 천지를 뒤흔드는 무림인이 탄생하는 건 아니었다.

“만약 저 같았으면...... 접시 물에 코를 박았을 겁니다. 무림인이 아닌 인생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제갈 사혁이 과장되게 표현한 거지만 대충 그 느낌만큼은 여기 있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럼 이야기는 대충 여기서 정리하고 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십야성주.”

정말 지겹도록 말이라고는 안 통하는 쇠고집이 따로 없었다.

“이놈이 아직도.....”

추백성은 질렸다는 표정이었고 십궁성주는 역시나 하는 표정이었다.

“환경. 이야기는 나도 들었다. 싸워줘라.”

“누님.”

“소선은 이제 없어. 소선이 없는 화산파에 맹세를 지킬 필요는 없다. 우린 일월신교다. 싸울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신교가 아닌 다른 것을 부정한다. 그것이 대의고 명분이다.”

그에게 같은 은혜를 입고 그를 사모하기 까지 했던 자신의 누님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추백성은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라. 꼬마야. 매운 맛을 보여주마.”

살기가 뻗어 나오는 추백성의 모습에 제갈 사혁은 휘파람을 불며 떨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감췄다.

(흐하하하! 이걸 원했어!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그런 자와의 싸움을 원했어!)

“나는!”

제갈 사혁의 외침과 함께 전신의 기가 요동쳤다. 제갈 사혁의 내공은 피 맛을 본 호랑이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 나이에 품고 있는 내공이 상상을 초월하는 구나. 아마 나보다 더 많겠지? 하지만 꼬마야. 절제할 수 없는 강함은 강함이 아니다.”

“아니 당신이 틀렸어!”

절제할 수 없는 그것이야 말로......

“강함이다!”

============================ 작품 후기 ============================

본문에서 십궁성주가 구마준만 언급한 것은 송수겸까지 일부러 쓸 필요가 없어서 입니다.

원래 뭐든 처음이 임팩트있죠.

구마준하고 송수겸을 이겼다며? 이런 식이면 뭔가 어필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구마준을 이겼다며? 이런식으로 쓰니까 구마준이 뭔가 대단한 것 같고(실제로 대단하지만) 그를 꺾은 제갈 사혁이 더 거물처럼 느껴지더라구요.

반로환동의 정체가 나왔습니다. 결국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는 길이 아닌 무림인의 길을 포기하고 젊어지는 방향이죠.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추백성은 이기어검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가능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갈 사혁이 추백성보다 강한 건 아닙니다.

이기어검이라는 것 자체는 굉장히 좋아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승리를 보장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강해지는 한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이기어검을 쓰지 못해도 이거어검을 쓰는 사람보다 강해질 수 있다를 제갈 사혁이 아닌 제갈 사혁의 적수들에게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화산의협은 파워밸런스가 많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저는 때리고 피하고 맞는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무공과 내공을 표현하기 보다는 주먹과 주먹의 상투적인 폭력을 표현함으로서 모든 승리는 강인한 육체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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