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회: 복수 -->
“패천방의 방주인 미력산(微力杣)이 아끼는 제자들입니다.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설명해주다니 도박장에서 먹고 사는 인물치고 상당히 협조적인 게 이상할 정도였다.
“설용이 아버지와는 형님 동생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진짜 무림인을 상대할 수 없어서 이렇게 저 놈들의 패악질을 보기만 할 뿐이죠.”
아무리 무림인이라지만 어린 놈들이 이렇게까지 설치는 이유는 패천방의 미력산 방주의 비호(庇護) 때문이었다.
“이만 가지.”
“가시는 겁니까?”
“얼굴 봤으니 가야지.”
얼굴 한번 익혀뒀으니 이 이상 이들과 마주할 일은 없었다.
“아 그런데 이놈들 스승이랑은 사이가 어떠나?”
“미력산말입니까? 아주 끼고 살죠. 친손자들처럼.”
도박장을 나오자 설용이는 제갈 사혁의 옷깃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꾹 다문 입과 찡그러트린 미간에서 느껴지는 고집은 꺾기 힘들 것 같았다.
“무공 가르쳐달라는 소리 마라.”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원수는 내가 갚을 게요.”
제갈 사혁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며 뛰쳐나갔던 가후를 떠올렸다.
“좋아. 가르쳐주마.”
만약 가후가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해줬다면 어땠을까? 제갈 사혁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설용이를 통해 그것을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용이는 설용이고 제갈 사혁은 제갈 사혁이었다.
제갈 사혁은 다음날부터 설용이에게 소림오권의 기초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이신과 달리 정식으로 받아들인 제자가 아닌 무기명 제자기 때문에 내공심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애초에 가르쳐줄 생각도 없었고.......
“호권(虎拳)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손에 힘을 더 줘야지!”
무엇보다 무공 초식을 가르쳐주는 것은 제대로지만 그 밑바탕이 되는 기초훈련을 아주 대충 가르쳤다. 고작 열두 살, 열다섯에 시작한 이신과는 달랐다. 아이에게 주먹질 하는 법 가르쳐준다고 해서 십대 후반의 만금 형제를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설용이는 정말로 이것을 열심히 익히면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다 믿고 있는지 끈질기게 소림오권의 호권을 열심히 수련했다.
“정말 이걸로 되겠습니까?”
설용이의 보호자인 윤가는 제갈 사혁이 설용이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갈 사혁의 뜻한 바를 듣고 제갈 사혁에게 설용이를 맡겼지만 불안한 마음에 매일 같이 화왕문을 방문했다. 그런데 그 일이 길어져 화왕문 담당자가 휴가를 끝마치고 귀환하게 됐다.
“그래서 가르치는 겁니까?”
처음 만났을 때 화왕문 담당자와는 통성명도 하지 못했지만 제갈 사혁이 귀환하지 않고 설용이의 일을 해결하려 함에 따라 며칠 더 화왕문에 있게 되자 자연스레 통성명을 하게 됐다.
“진만(進萬)대협은 마음에 들지 않은가 봅니다.”
진만.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는 제갈 사혁도 상당히 놀랐다. 진만이라는 이름은 정사대전이 터졌을 당시 혼자서 마교의 경계를 지켜낸 전설적인 무림인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단한 고수는 아니지만 수백만 마교인의 침공을 혼자의 몸으로 하룻밤 동안 막아낸 자.
“나도 마교에 의해 가족을 잃고 복수를 꿈꾸고 있는 처지인 주제에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복수는 안하는 게 좋소.”
“진만 대협도 한번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아이의 결정을.”
“결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보면 알게 됩니다.”
그렇게 소림오권에만 매달리며 무공 초식만 수련하던 어느 날이었다. 제갈 사혁은 설용이를 데리고 만금 형제를 미행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후미진 골목에 도달하자 만금 형제의 앞길을 막았다.
“뭐하는 놈들이냐?”
이 마을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기 때문인지 만금 형제는 전혀 놀라거나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자신들이 누구냐며 떠들어대며 목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패천방의 만금 형제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는 있느냐?”
개구리 가면을 쓴 제갈 사혁은 똑같은 가면을 씌운 설용이를 앞으로 밀어냈다.
“해봐라.”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실전이란 것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설용이를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만금 형제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갈 소협. 무슨 생각이오?]
골목 지붕 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진만이 전음을 보내자 제갈 사혁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만금 형제가 칼을 빼들었다.
“뭐하는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앞을 막아서고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만금 형제 중 첫째에 해당하는 만백이 칼을 빼들어 설용이의 어깨에 닿는 그 순간까지 설용이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만백의 칼날을 손가락하나로 막아낸 제갈 사혁은 만백의 배를 발로 차 골목 쓰레기 더미로 날려버렸다.
“형!”
동생인 금석이 깜짝 놀라 형을 살피러 가는 사이 제갈 사혁은 설용이를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설용이를 데리고 화왕문에 도착하자 설용이는 빈 장독에 연신 토악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럴 생각이었소?”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제갈 사혁은 설용이에게 공포를 심어줄 생각이었다. 무공을 익혀 복수를 하겠다는 그 생각이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다.
“만약에 저 아이가 맞서 싸웠다면 어찌할 것이오?”
“그럴 리 없지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가능하다면?”
“그럼 '물건' 아닙니까. 그런 놈은 제대로 가르쳐야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절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진만은 알고 있었다.
제갈 사혁. 정도 무림의 후기지수 중 단연 최고라 불리는 사나이. 직접 만나보니 후기지수니 뭐니 하는 애송이가 아니라 동년배 사내와 대화하는 것처럼 능글능글했다.
토악질을 끝낸 설용이에게 제갈 사혁은 대뜸 물한바가지를 부었다.
“계속 할 거냐? 꼬마야.”
아무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라지만 지금 제갈 사혁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 사실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포기해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요.”
고작 열두 살짜리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하긴 부모의 복수를 하는데 이 정도 가지고 포기하면 불효지.)
그렇다고 해서 이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자 마을은 난리가 났다. 패천방 방주는 두 수제자가 밤길에 괴한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제자들을 이끌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괴한의 정체를 찾는다는 미명아래 패천방보다 약한 약소방파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어떤 놈들이야!”
육십이 다 돼가지만 미력산 방주의 노기(怒氣)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럴수록 피해 입는 것은 약소 방파들이었다. 괴한은 무공을 익혔고 이 마을에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무림인이라고는 패천방과 약소 방파의 제자들뿐이었다. 게다가 그들 모두 패천방과 원한이 있기 때문에 미력산의 분노는 중소방파로 향했다.
“도대체 패천방을 향해 칼을 겨눈 놈이 누구냐!”
그 중에는 아무 이유 없이 패천방의 화풀이 대상이 된 방파도 되지 못한 도장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제갈 사혁은 의외의 상황이 전개되자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다소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말 이 난리를 쳤답니까?”
진만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본 중소방파 그리고 마을 도장의 피해는 심각했다. 어느 정도 위세가 있는 방파의 경우 패천방의 제자들과 몸싸움이라도 했지만 문파도 되지 못한 도장들의 경우는 달랐다. 도장 관패가 부서지는 치욕을 겪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겠는데.”
제갈 사혁이 간악한 미소를 짓자 진만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패천방과 사이가 나쁜 방파 중에 조금 실력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걸까?
“보광(寶光) 방주의 상설방(常設幇)이오. 그런데 왜 자꾸 날 대협이라 부르는 것이오. 이래 뵈도 아직 스물아홉이오.”
“그래도 소협보다는 대협이 좋은 거 아닙니까.”
그날 밤이 되자 진만은 제갈 사혁과 함께 내내 붓을 들고 글을 써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걸 왜 쓰는 거요?”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때마침 좋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 새벽이 되자 온 마을에는 똑같은 내용의 벽보가 붙었다.
바로 상설방 방주 보광이 패천방 방주 미력산에게 도전한다는 내용의 벽보였다.
이 사실을 들은 상설방 방주 보광은 버선말로 달려가 패천방에게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말하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 이유는...........
“계십니까?”
제갈 사혁이 화산파의 도복을 차려입고 패천방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화.... 화산파에선 여기에 무슨 일로.”
아무리 이 지역의 패자(霸者)라지만 화산파는 강호무림의 중심 중 하나이며 감히 올려다 볼 수 없는 문파기 때문에 불같은 성격의 미력산 방주는 제갈 사혁의 방문에 깜짝 놀라 상설방 방주를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
“저는 화산파 1대 제자 무진이라고 합니다. 무림맹에서 화왕문 임무를 맡아 며칠 이 지역에 기거했었는데.......”
정체를 밝히며 말끝을 흐리자 패천방 방주인 미력산과 상설방 방주 보광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림맹으로 귀환하는 날. 우연히 벽보를 보고 패천방 방주님의 고강한 무공을 견식해보고 싶어서 아무 말 없이 무례를 범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지금 그것에 관해 상설방 방주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던 차에 화산파의 그것도 차기 장문진인으로 유명한 제갈 사혁 무진이 방문하자 미력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투 날이 언젭니까? 정말 기대가 되는데.”
“그것이......”
이 말을 듣고 있던 상설방 방주 보광이 당황해하자 제갈 사혁은 상설방 방주의 손을 마주잡았다.
“명예를 건 두 분의 결투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무림맹의 귀환은 미루도록 하지요. 이 지역의 패자를 결정하는 일이 아닙니까. 제가 참관인으로 참석한다면 무림맹에서 두고두고 화제가 될 겁니다.”
무림맹까지 들먹여가며 제갈 사혁은 두 사람을 압박했고 상설방 방주에게 이길 자신이 있었던 미력산 방주는 호탕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하하하하! 무진 소협 기대하셔도 좋소.”
[바.... 방주!]
보광이 급히 전음을 날렸지만 미력산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광을 바라보는 미력산의 눈동자 속에는 명예욕이 소용돌이 칠 뿐이었다. 이렇게 패천방 만금 형제 습격 사건은 패천방과 상설방의 대결이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지만 아무도 이것에 토를 달지 못했다.
대결 당일이 되자 지붕 위에서 결투 장소가 될 패천방 연무장을 내려다본 진만은 제갈 사혁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것과 설용이의 복수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의 머리로는 제갈세가 사람의 머릿속을 알 수가 없군.”
그건 진만이 제갈 사혁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아마 제갈 사혁을 알고 있는 그 누군가가 이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제갈 사혁만큼 단순한 사람이 없다고.
결투 날이 되자 상설방 방주 보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
딸아이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의 어깨를 만지자 그는 이를 악물었다. 만약 자신이 잘못된다면 그 천하의 썩을 놈들이 딸아이를 가만히 놔둘 리 없기 때문이다.
“걱정마라. 이 아버지는 지지 않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 일의 원흉이었던 벽보가 패천방의 소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부자연스러운 일들을 납득할 수 없다.)
그 화산파에서 왔다는 망나니만 아니었으면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했다. 한편 결투를 앞둔 패천방 방주 미력산은 자신의 제자들 그리고 수제자인 만금 형제들을 앞에 두고 술잔을 들었다.
“자자 마셔라!”
그 모습은 도저히 결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자의 태도라 보기 힘들었다.
“오늘 상설방을 이기면 우리는 이 지역의 완벽한 지배자가 된다. 그리고 화산파의 차기 후계자가 와 있으니 오늘 우리의 힘을 보여준다면 무림맹에 들어가는 것도 꿈은 아니다.”
“방주님 그런데 그 벽보는 누가 붙인 겁니까?”
제자 한명이 이번 사태의 원인인 벽보에 대해 묻자 미력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흥! 상설방 방주 놈이 만백이 일로 해코지 좀 했다고 꾀를 부린 거 아니냐.”
분명 만금 형제 습격사건이 터지자마자 범인을 찾겠다고 다른 문파들을 해코지 한 것은 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상설방 방주가 이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이 있다면 누구라도 이번 일이 상당히 부자연스럽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입 밖에 내뱉지 못했다. 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스승도 아니고 무엇보다 상설방 방주에게 자신들의 스승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의 말대로 이번 일이 잘 돼 제갈 사혁의 눈에 든다면 무림맹 가입도 꿈은 아니었다. 진짜 정파의 한축을 담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에서는 제갈 사혁이 갑자기 계획을 바꿨습니다. 여기서 저는 제갈 사혁의 줏대 없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태까지 제갈 사혁이 무슨 계략을 꾸미면 제대로 된 적이 없었는데 만약 계략이 성공한다면 제갈 사혁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잘 이용해서 성공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 예로 본문에 나오지만 몇몇 사람들이 패천방과 상설방의 대결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채지요.
오타쪽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로 써주셔도 되는데 저의 창피함을 조금이라 줄여주시기 위해 쪽지를 보내주시다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쪽지로 잘 부탁드립니다. 댓글로 써주셔도 되지만 댓글로 써주시면 전 아마 창피해서 방바닥을 구르고 구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