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회: 파죽지세(破竹之勢) -->
이번 임무와 관련해 제갈 사혁은 부관인 초영을 대동하고 이번 임무를 내린 실질적 상부를 찾아갔다.
“자리에 계시나?”
“장로님께 기별 넣어드리겠습니다.”
곧 기별이 닿자 방문이 허락됐고 인위적으로 깨끗하게 어질러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인위적으로 깨끗하게 어질러진. 무언가 표현이 부적절하지만 개방의 장로 규화(叫花)의 방은 실제로 그랬다. 방을 어지럽히고 있는 실질적인 물체들은 모두 종이였기 때문이다.
“으아~ 위가 아파 죽겠고만.....”
배를 훤히 드러낸 채 집무실 책상 위에 누워 있는 규화의 모습이 별나보였지만 제갈 사혁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만들어낸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았다.
“앉게나.”
앉으라고는 했지만 이 집무실에 있는 건 규칙적인 양식으로 어질러진 종이뭉치와 규화가 침대처럼 누워 있는 책상이 다였다. 그 말은 즉 바닥에 앉으라는 말이었고 제갈 사혁은 대수롭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그래. 봉황 대주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인가?”
“무형독이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무형독이 실존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제갈 사혁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을 꼭 하고 넘어가야 했다. 무형독이 발견 됐는데 호위 임무는 3일 후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모른다네. 무형독이 실존하는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내공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었고 제갈 사혁의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종이는 수분을 빼앗기며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 군. 흑사련의 칠객을 오객으로 만들었다기에 뭐 얼마나 대단한 놈인가 싶었는데 이래서야 원~”
감정 조절은 무림인의 필수 소양이라 할 수 있었고 규화는 감정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는 제갈 사혁을 나무랐지만 당사자는 절대 이번 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형독이 실존하는지 모른다니 무슨 뜻입니까?”
“정확히는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그러면서 동시에 한 바퀴 몸을 굴려 책상에서 떨어진 규화는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종이에 코를 풀어 아무데나 던져버렸다.
“무형독은 말이야. 쉽게 강호에 나오는 물건이 아니란다. 꼬마야.”
“!”
지금 이 말이 만들어낸 위화감은 도대체 뭘까?
“.......... 그런 겁니까?”
제갈 사혁이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규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일이 3일 후인 건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령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한 준비지. 여인의 마음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몸만 달랑 가서는 곤란하단 말이야.”
“그럼 3일 후 예정대로 임무를 수행하겠습니까?”
제갈 사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가려 하자 규화는 지나가는 말로 마교에 대해 물었다.
“마교는 어떠한가?”
마교에 대해 묻자 지난날 청해에서 마교로 넘어간 기억을 떠올리며 거만하게 웃었다.
“별거 아닙디다.”
별거 아니라고 말하자 규화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고 제갈 사혁이 사라지자 품속에서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그렇지? 별거 아니지...... 시대는 점점 변하고 있다. 십만대산. 일월신교. 천마의 전설. 한 번쯤 거품을 털어줄 때도 됐단 말이지.”
규화의 집무실에서 나온 후 초영의 태도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 왔다갔다 거리며 질문을 망설이는 태도가 제갈 사혁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아이씨~ 뭐냐? 할 말 있으면 빨리 해라.”
“아니 저 그게 대주님과 장로님이 나누신 대화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어 볼 게 있으면 쭈뼛쭈뼛 거리지 마. 신경 쓰이니까. 뭐가 궁금한 건데?”
“제가 궁금한 건 ‘그런 겁니까.’요.”
설명이 이상하지만 대충 이해를 한 제갈 사혁은 규화와 나눴던 대화에 대해 초영에게 설명해주었다.
“무형독이란 게 말이야. 생각보다 대단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 대단한 물건을 누군가가 만들었다면 만든 후에 소문이 날까? 만들고 있을 때 소문이 날까?”
무슨 질문이 이럴까 싶었지만 일단 이럴 경우 전자였다.
“만들어진 후에 소문이 나지 않을까요? ‘누가 만들고 있다.’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이것 자체만으로 정보나 소문이 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런데 만들어지기 전에 소문이 났어. 왜일까?”
“...........”
초영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고 제갈 사혁은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이름이 뭐지?”
“네?”
“그 무형독을 만들었다고 혹은 만든다고 소문난 사람 말이야.”
“소령이라고 합니다.”
입에서 쑥을 태운 연기를 뱉으며 바닥에 재를 털어 곰방대를 도로 집어넣었다.
“소령이란 사람이 혼자 무형독을 만들려 했다면 무형독이 만들어진 후에 소문이 났겠지. 하지만 만들기 전에 소문이 퍼졌다면 누군가 시켜서 만들고 있다는 뜻이잖아.”
“!”
제갈 사혁이 규화에게 말했던 ‘그런 겁니까.’의 진위를 깨달은 순간 초영은 온 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이번 임무가 내려진 곳은.
“귀주성......”
귀주성. 바로 흑사련의 입김이 닿은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무형독을 만들고 있는 배후는 흑사련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 흑사.......”
흑사련이 무형독의 배후냐는 말에 제갈 사혁은 손가락으로 초영의 입을 막았다.
“함부로 단정 짓지 마.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가는 거니까.”
봉황대 건물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곧바로 봉황대의 전력을 살폈다.
“신입들은 어느 정도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실력이 늘고 있습니다. 곧바로 실전에 투입해도 문제없다고 판단됩니다.”
“지금부터 약 이틀간 내가 직접 가르치겠다.”
확실히 다가올 미래를 엿보고 또 거기 기반을 두고 봉황대에 들인 자들이기 때문에 개인의 가능성은 어느 누구보다 확실했다. 하지만 이번 임무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 된 제갈 사혁은 직접 자신의 부하들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믿는다면 직접 가르치는 게 나아.)
초영을 포함한 초기 봉황대를 제외하고 제갈 사혁 스스로가 뽑은 새로운 봉황대 그리고 이신을 포함한 채 연무장에 불러낸 제갈 사혁은 초영과 그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부상자 치료에 전념한다.”
“하지만 대주. 임무가 코앞인데 부상이라도 당하면.....”
“부상당하면 그거는 그거대로 괜찮겠지. 임무 땡땡이 치고 침대에 누워 쉴 수 있잖아.”
그리고 그 말은 초기 봉황대를 제외한 신 봉황대의 자존심을 긁기 충분했다.
“와라. 나는 적당히 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정말 침대에서 하루를 보내게 해주겠다.”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이중에서 가장 제갈 사혁을 잘 알고 있는 이신이 시야의 사각으로 이문정주를 펼쳤다.
(역시 내 아들내미! 사부로서 이럴 때가 가장 자식 놈이 사랑스러운 법이지.)
이문정주를 몸으로 받아낸 제갈 사혁은 단단한 돌덩이 같은 주먹으로 이신의 얼굴을 후려쳤고 이신은 저 멀리 날아가 봉황대의 담장에 쳐 박혔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라도 되는 양 수 십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제갈 사혁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앞으로 이틀. 최대한 가혹하게 굴려서 최대한 능력을 끌어올린다.)
그날 봉황대의 연무장을 이루는 담장이 무너진 건 무림맹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되기 충분했다.
임무를 하루 남겨두고 사천 시내 한 구석에 허름한 마라탕 가게를 찾은 제갈 사혁은 정성스럽게 그릇에 어묵. 곤약. 돼지고기. 청경채 등의 재료는 넣고 자리에 앉았다.
“이 정도에 내 사랑을 표현하기 모자란 감이 없잖아 있지만 받아줘요.”
가볍게 사랑을 언급하게 농담을 건네자 마라탕의 주인이 될 청하는 껄끄러운 감정을 느끼고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아침을 대접한다기에 손수 요리라도 해주는 거 아닌가? 기대 했는데.....”
“에이~ 아침에는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그냥 엄마가 해준 밥 먹고 싶지 자기가 밥하고 싶진 않는 법이죠. 그래도 먹어봐요. 제갈 사혁 특제 마라탕이니까.”
그 말과 동시에 청하는 신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의 그릇이 아닌 제갈 사혁의 그릇을 쳐다봤다. 자신의 것과 달리 재료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저기에 들어간 건 소고기와 온갖 비싼 재료뿐이었다.
“왜 그쪽은 통칭 제갈 사혁 특제가 아닌 거죠.”
“이건 그냥 닥치는 대로 넣은 거예요. 제갈 사혁 특제 마라탕과 비교하면 잡탕이랄까.”
“나는 왜 그게 더 맛있어 보이죠?”
“오해에요.”
“나는 왜 내 그릇보다 그쪽 그릇에서 갈사 소협 개인의 애정이 느껴지는 거죠.”
“오해에요.”
해맑게 웃으며 오해라는 말을 연발하자 재빨리 제갈 사혁의 그릇과 자신의 그릇을 바꿨다.
“불만 없죠?”
어린 아이 같은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며 묻자 제갈 사혁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래서 부탁할 게 뭐에요?”
“시간 나시면 귀주성에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나 바쁜데 그리고 스승님이 아무 남자나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거든요. 악운(惡運)이 넘치는 남자는 특히나.”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거죠.”
“그곳에 가면 뭐가 있죠?”
뭐가 있냐는 말에 제갈 사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여유로운 표정으로 청하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나 말고 당신이 좋다는 남자들이 떼거지 몰려올 걸요.”
그 말과 동시에 청하는 미세하게 내공을 흘려보냈다.
“좋아요. 같이 가겠어요. 나 좋다고 쫓아오는 남자가 그 정도는 되어야 여자로서 기가 살죠.”
제갈 사혁의 분위기에 맞추고 그의 시답잖은 언행에 맞추며 그렇게 청하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대화라 할 수는 없었지만 청하에게는 그 어떠한 말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혼자 혹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수십 명의 부하가 있음에도 제갈 사혁은 가장 먼저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자신만만 아니 거만하기 짝이 없는 그가 무림인으로서 그녀를 원하는 그 순간이야 말로 그녀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말하기 늦은 감이 있네요.
며칠 연재를 안했죠. 새해에는 바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가했죠. 하지만 글이 잘 안써져서 쉬었습니다. 오늘은 뭔가 좀 될 것 같아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글을 쓰는데 뭔가 되긴 된 것 같은 느낌이네요. 캐릭터 표현이 특히나.
한 5~6일 쉬었네요. 슬럼프였다고 봐야겠죠.
마지막에 청하를 표현하는 방식이 뭐랄까 초창기 청하의 이미지였던 요조숙녀와 완전히 틀어지지만 이미 그것은 제갈 사혁과 한차례 사투를 벌이며 캐릭터성을 바꿨을 때 각오한 일이니까요. 요조숙녀보다는 제갈 사혁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로 만들다보니 이래저래 고충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