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48화 (148/262)

<-- 148 회: 파죽지세(破竹之勢) -->

만반의 준비를 마친 제갈 사혁은 귀주성에 가기 하루 전날까지 훈련을 했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고 봉황대는 제갈 사혁의 훈련을 잘 따라주었다. 가볍게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며 밖으로 나오자 초영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보고는 조금 그런데.......”

속이 비칠 듯 말 듯 한 얇은 천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장난기가 발동한 제갈 사혁은 두 손으로 자신의 상체를 가렸지만 초영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서류를 읽어나갔다.

“정보부에 따르면 흑사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 건 정보도 뭣도 아니야. 그 부분은 생략해.”

지난 생애에서 무형독은 분명 흑사련의 청사단 단주라는 놈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흑사련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같은 보고는 들으나 마나였다.

“내가 시킨 일은 잘하고 있어?”

“네. 명령하신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흑사련도 우리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을 거야.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는데 시작부터 요란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무당파의 손님은 이신 공자와 함께 가셨습니다.”

무당파의 손님이라면 청하 이야기였다.

“아~ 그쪽은 신경 쓸 것 없어 원래 말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이니까.”

“알겠습니다.”

“나가봐.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그럼.....”

초영이 문을 닫고 나가려 하자 제갈 사혁은 초영을 붙잡았다.

“아! 예쁘게 차려 입어야 해.”

“꼭 그렇게 입어야 하나요?”

“당연하지 명령이야.”

초영은 살짝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제갈 사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재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제갈 사혁이 허리에 등에 활을 차고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채 평소와는 다른 복장을 하고 나오자 얼마 후 초영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밖으로 나왔다.

“예쁘네.”

“이런 걸 예쁘다고 하나요?”

제갈 사혁처럼 머리카락을 끈 하나로 묶은 초영은 말 그대로 남장을 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내가 여장을 하면 이상하잖아.”

“그렇다고 제가 남장을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에이~ 다들 이 정도는 하고 갔잖아.”

적진에 들어가는 이상 변복은 필수였고 변복을 하는 이상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았다.

일단 귀주성에 각자 다른 시간과 다른 복장을 한 채 나눠서 가기로 한 후 약속된 장소에서 모이기로 한 상태였다. 무림맹에서 말을 타고 사천성과 귀주성의 경계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성문을 지키는 나라의 병사들에게 신분을 나타내는 신분패를 건네줌으로서 어렵지 않게 경계를 통과했고 경계를 통과 한 순간부터 누군가의 감시가 뒤따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각 성의 경계 출입 자체는 국가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흑사련에서 어찌 할 수 없는 거지만 귀주성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는 이야기가 달랐다.

[대주님.]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따라온 초영이 흑사련의 눈을 느끼고 전음을 날렸다.

[알고 있다.]

제갈 사혁은 예상했던 대로 흑사련의 눈이 뒤따르자 곧바로 기루로 향했다. 기루 안으로 들어오는 제갈 사혁은 술을 마시며 손님인 척 했고 얼마 후 기루로 따라 들어온 초영은 제갈 사혁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자리로 이동하던 중 일부러 제갈 사혁이 있는 쪽으로 넘어지며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소.”

초영이 사과를 하자 제갈 사혁은 처음 만난 사람처럼 행동을 했고 두 사람은 마치 술집에서 만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합석을 했다.

“나는 사천에서 온 권가라고 하오.”

“하남성 출신의 초... 영찬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예정된 움직임과 예정된 대화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가 느끼기 부자연스러울지언정 타인이 느끼기에는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초 소협은 귀주에는 무슨 일이오?”

“일 때문에 왔습니다.”

“그렇소? 나도 일 때문에 왔소. 소협도 칼밥 먹는 사람이오?”

그렇게 두 사람은 제갈 사혁과 초영이 아닌 사천의 권가와 하남성의 초영찬이 되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며 은근히 그 과정에서 어렸을 적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함으로서 거짓된 자신을 진짜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렇군.]

흑사련의 눈이 사라지자 제갈 사혁은 술상을 물리고 곧바로 자신들을 감시했던 자들을 역으로 추적했다. 그리고 초영은 그길로 봉황대 대원들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아무리 흑사련이라고 해도 일반인을 성 입구에서 감시할 만한 재간은 없다.”

아무리 무림단체의 인원이 차고 넘친다 해도 하루에 수천 명이 오고가는 성의 경계에서 일일이 사람들을 감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의 경계에서 타지인을 감시한다는 것은 이번 일과 크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방금 전 감시한 쪽에는 이상이 없다.”

자신을 감시하던 흑사련 인물을 뒤쫓아 성의 경계 부근에 있는 객잔에 뒤따라 온 제갈 사혁은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구별해내 방 안을 어림짐작했다.

(총 4명이 있다. 방의 구조로 봤을 때 1인실의 좁은 방이니 일단 빠져나가기 전에 급습한다.)

방문을 박차고 나간 제갈 사혁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좌측에 있는 자가 검에 손을 쥐는 순간 호황을 던져 창문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를 베고 우측에 있는 자가 암기를 던지는 순간 그것을 피하며 검에 손을 댄 좌측 인물이 검을 뽑은 순간 빠르게 방 안으로 파고 들어가 처음 죽였던 인물 그 다음으로 창가에 가장 가까운 자의 목을 의십팔질(點衣十八秩)로 움켜쥐어 부러트렸다. 그리고 맨 처음 제갈 사혁을 공격한 나머지 두 인물이 한꺼번에 덤벼들자 보다 빠르게 보다 정교한 움직임으로 급소를 제압했다.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 이뤄진 것들이지만 제갈 사혁에게는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몸 상태가 좋군.”

바로 그때였다. 어떤 종류의 빛이 제갈 사혁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목에 칼이 들어온 것도 아니고 단지 거울에 햇빛이 반사되어 나오는 빛일 뿐인데도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빛은 뭐지? 어떻게 대응해야하지?)

순간 바닥에 조각난 거울이 보였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제갈 사혁은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위기상황에 머리를 재빨리 굴려 바닥에 있는 거울을 주워들었다.

“젠장.....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군.”

제갈 사혁은 그 거울로 햇빛을 반사해 신호를 주었다. 다행히 이러한 신호의 종류는 제갈 사혁이 지난 생애에 정사대전을 거치면서 알고 있던 종류였고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감시자들에게 신호를 보냄으로서 상황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긴 이 많은 사람들을 감시하는데 고작 감시인원이 4명일 리 없지. 좀 더 주의해야겠어.”

위기 상황을 잘 넘긴 제갈 사혁은 일단 죽은 시신의 몸을 뒤졌다. 흑사련이라는 건 알지만 이들이 소속된 단체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건가?”

이들의 몸에서 나온 물건 중 무기와 암기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똑같은 형태를 지닌 물건을 확인한 제갈 사혁은 그 중 하나를 품속에 넣어 조용히 객잔을 빠져나왔다. 그길로 봉황대가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 향한 제갈 사혁은 소금장수. 농부. 재주꾼 등으로 변장한 봉황대와 만날 수 있었다.

“대주님. 오셨습니까.”

거한의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자 제갈 사혁은 흑사련 무사들에게서 가져온 물건을 건네주었다.

“자네. 이 물건이 뭔지 아나?”

거한의 사내는 물건을 유심히 살피더니 감을 잡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가?”

“백사대의 물건입니다.”

“백사대?”

“네.”

백사대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갑자기 광소를 터트렸다.

“흐하하하! 아~ 이래서 우리가 백사‘단’이구나. 저쪽이 백사‘대’고.”

제갈 사혁은 무림맹의 백사단을 떠올렸고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 챈 봉황대 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사는 예로부터 요물이지만 영수로도 표현됩니다. 흑사련 무력단체 중 백사대가 제일 처음 생겼고 우리는 다섯 단체 중에 가장 늦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백사라는 고유명사를 포기할 수 없어서 그때부터 백사단만 단이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이번 일과 상관은 없지만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풀린 터라 어째 속이 시원했다.

“저기 갈사 소협.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이신과 함께 재주꾼으로 변복한 청하가 이야기가 딴대로 흐르는 걸 막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관인 초영을 불렀다.

“위치는 어디야?”

“임봉 마을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경공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적들의 눈에 띄게 됩니다.”

“언젠간 띄게 되어 있어. 그러니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호위대상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원래는 천천히 산악지대를 통해 은밀하게 이동하려 했지만 방금 전 백사대 대원들을 죽이고 왔기 때문에 흑사련에 꼬리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것도 이번 임무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인 제갈 사혁에 의해서 말이다.

============================ 작품 후기 ============================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죠. 하지만 가상의 인물이 변하는 건.....

처음 기획한 대로 청하는 요조숙녀에 제갈 사혁 쪽에서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그녀는 별 관심이 없다는 식이 기본 틀이었지만 무협의 히로인이라기에는 너무 잘못 잡은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안하려고 했는데 화산의협과 별 관계도 없지만 저의 전작.

즉 그 글의 여주인공 컨셉에서 따온 캐릭터가 바로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은 현대 판타지고 여긴 무협이다보니 그 여주인공에서 컨셉만 따온 청하의 한계가 무협과 현대 판타지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한 거죠.

그래서 바꾸는데 망설인 것도 사실이고 여전히 바꾸길 잘했다 생각은 하지만 지조 없이 내가 설정을 바꿨구나 하는 자괴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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