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회: 파죽지세(破竹之勢) -->
“일단 최대한 빨리 목적지에 간다. 그리고 임무에 앞서 모든 일은 무형독의 존재여부에 초점을 맞추도록.”
다급해진 제갈 사혁은 봉황대를 재촉하며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대주님. 대상의 호위가.......”
초영의 반응은 예상했지만 그딴 건 지금에 와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무형독의 존재여부가 우선이다. 그것에 비하면 호위 임무는 곁다리에 불과하다. 알겠나? 무형독이다. 무엇이 가장 우선인지 잊지 마라.”
초영은 대주를 보좌하는 부관으로서 이 임무가 호위임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제갈 사혁은 듣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아니 처음부터 일의 순서를 무형독에 맞췄기 때문이다.
“그런.......”
그랬다. 처음부터 제갈 사혁의 오직 무형독의 존재 여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뭐지 이 분위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청하라고 해도 눈치 껏 보고 들은 것으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 갈사 소협은 목적이 따로 있었어. 그 사람답다면 그 사람다운데 말이야.)
자신이 알고 있는 제갈 사혁이라면 ‘어떠한 상황’이 닥쳤을 때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임봉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제갈 사혁과 봉황대는 싸울 준비를 했다.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입구에서부터 무기를 든 무림인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곳은 더 이상 마을이 아니었다. 자신의 피를 흘리고 적의 피를 뿌리는 전쟁터였다.
“적습이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자가 소리를 지르자 지붕 위 기와를 밟으며 삽시간에 무림인들이 모였고 제갈 사혁은 호황을 뽑아들었다.
백팔식광풍쾌검(百八式狂風快劍)을 펼치며 어느 때보다 잔혹한 검세를 펼친 제갈 사혁은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했다.
“고수다! 서둘러 검진을 펼쳐라!”
검진을 펼치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 중 누군가가 무기를 바닥에 던지며 타오르는 전의의 찬물을 끼얹었다.
“나는 그만 두겠어!”
"!"
갑자기 상대방 쪽에서 이탈자가 나오자 봉황대는 물론이고 그의 동료들까지도 그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을 앞에 두고 뭐하는 짓이냐! 그러고도 네가......”
적장이 말끝을 흐리자 그 순간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초영은 어떠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왜 말을 끊은 거지? 귀주 땅에서 흑사련이라는 사실이 감출만한..... 혹시!)
끝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언행을 봐서 짐작하건데 그들은 흑사련이 아닌 다른 단체일 수 있었다.
“너 저 새끼가 누군지 알아?”
그러거나 말거나 싸우기를 포기한 무림인은 갑자기 제갈 사혁을 가리키더니 이를 악물었다.
“저 새끼가 바로 그 제갈 사혁이라고! 무림맹 오대주 중 한명이랑 싸운다했지 제갈 사혁이랑 싸운다는 말은 없었잖아!”
“그게 어쨌다는 거냐? 오대주든 제갈 사혁이든 대업을 위해서 언젠가는 쓰러트려야 할 상대다. 오늘 그것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지!”
“너는 좋겠다. 저 새끼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몰라서. 난 봤어! 막산 상단에서 쟁자수 짓할 때 저 새끼가 싸우는 걸 봤다고! 저 놈은 사람이 아니야......”
그러면서 그는 주머니에서 어떤 종류의 패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너네나 이런 거 좋다고 해먹어라! 난 간다.”
어이없게 한명이 전선을 이탈하자 남은 이들 중 통솔자 역할을 하는 무림인은 눈을 파르르 떨며 외쳤다.
“겁먹지 마라!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기억해라!”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하는 제갈 사혁의 옆구리를 찔렀다.
“악명(惡名)도 이런 악명이 없네요.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얼굴만 보고 도망쳐버리다니 질렸어 아주~”
“범접할 수 없는 저의 위엄에 스스로 물러난 겁니다. 악명이라니요. 그게 바로 명성이죠.”
“흥~ 말은 잘해요!”
막산 상단이라면 서백호 일로 잠깐 엮인 적이 있었고 그때 쟁자수 몇 놈을 살려준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그게 방금 전 그 놈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하고 있나? 봉황대! 바보처럼 서있지 말고 길을 뚫어라!”
제갈 사혁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정신을 차린 봉황대는 적들을 향해 돌진했고 곧바로 난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초영과 소수의 몇몇 대원의 빠르게 마을을 향해 달렸다. 호위 대상인 소령을 찾기 위해서였다.
“초영. 대주님의 명령 없이 함부로 움직여도 되는가? 뒷일은 어떻게 할 건가?”
함께 온 동료가 단독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자 초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지금은 호위 대상의 생존을 확인하고 그녀를 보호하는 일이 우선이야.”
제갈 사혁의 명령은 없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 내린 명령은 뭐죠? 우선순위는 그대들의 대주가 아니에요. 무림맹의 명령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요.]
제갈 사혁이 무형독의 존재여부에 초점을 맞춘 그때 청하가 초영에게 살짝 말해주지 않았다면 초영은 아마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현장에서 상사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그 이유를 잊으면 안 된다.
(무당파의 청하라고 했던가?)
그리고 초영과 봉황대의 몇몇이 행동을 계시하자 그 모습을 지켜본 제갈 사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초영.”
제갈 사혁이 아는 한 초영은 책임감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절대 자신의 자리를 떠나 단독행동을 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사람이 저렇게 튀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누군가 옆에서 살살 구슬렸을 때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할 사람은 봉황대 내부에 없다.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제갈 사혁은 본능적으로 청하를 쳐다봤다.
청하는 입을 뻐끔 거리며 ‘멍청이’ 라고 입모양을 만들어 내며 웃었고 제갈 사혁은 복잡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뭐 좋아. 소령을 구하러 가는 과정에서 무형독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는 실수는 저지르지는 않겠지. 뭐가 됐든 목적만 이뤄지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순간 호황의 이빨이 사선을 그리며 뼈와 살을 뜯어냈다.
“으앗!”
난전 속에서 한명이 제갈 사혁을 향해 창으로 찌르고 들어오자 그 순간 창을 든 자의 손목에 화살이 박혔다. 그 화살의 주인공은 이번 물갈이를 통해 봉황대에 유일하게 남게 된 사무직 전환자였고 처음 겪는 난전 속에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훌륭하다.)
제갈 사혁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잠시라도 칭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칭찬이 앞으로 그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그나저나 저 검진이 너무 거슬리는군.”
처음에는 막산 상단에서 만났던 쟁자수가 있다기에 어디 무슨 뜨내기들 한보따리 모아다 엮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들은 제대로 된 검진을 치고 있었다.
“대주님.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한철로 된 거대한 방패를 든 봉황대 대원이 방패를 앞세워 멧돼지처럼 뛰어들자 처음에는 무식한 돌진공격이 먹히는가 싶었지만 검진을 이루는 대형이 자유자제로 바뀌며 공격을 흘려냈다.
방패를 들고 뛰어 들어간 대원은 그만 검진 한 가운데에 발을 들여놓은 꼴이 됐고 이를 본 이신이 재빨리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이런!”
수십 자루의 검이 자신을 꿰뚫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고 그 순간 그를 향해 날아오던 수십 자루의 검은 이신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끼여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했다.
“아저씨 빨리!”
이신의 목소리에 반응한 봉황대 대원은 이신이 손가락으로 검을 붙잡고 있을 때 거대한 방패로 적들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이 이루던 검진이 무너졌고 봉황대 대원들은 이때를 노려 강하게 상대를 밀어붙였다.
이신은 양손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제갈 사혁에게 두 손을 보였다.
“사부처럼은 안 되네요.”
자신처럼 도검불침이 아닌 이상 피가 흐르는 건 당연했다.
“주먹 쥘 수 있지?”
“문제없어요.”
“그럼 싸워.”
“당연하죠.”
주먹이 쥐어지는 한 싸운다. 두 주먹을 무기로 삼는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검진이 무너지자 그들은 각자 개인의 검술을 펼치며 상황에 맞게 대응했고 제갈 사혁은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공수전환이 빠르다. 검진도 그렇고 이런 행동들도 그렇고 역시 뜨내기들이 아니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들이 흑사련이라고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이곳이 흑사련의 세력이라고는 하나 사파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냄새. 후각의 의미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고 제갈 사혁이 무림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더니 몸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분명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밥은 밥통이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든 걸까요.
저녁에 부랴부랴 쓰다가 하루를 공식적으로 넘겨버렸네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