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회: 함께 한다는 것. -->
청성파 연무장.
“하아!”
도포를 입은 청년은 맨손으로 철을 휘게 했다.
“역시 대단하구나! 암~ 너야 말로 하늘이 내려준 천재다!”
“그렇죠? 사부.”
스승의 칭찬을 받은 제자는 한껏 들떠 있었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눈물겨운 내리사랑이라며 비웃겠지만 청년의 성취는 그 나이 때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화산파의 제갈 사혁보다 네가 더 훌륭할지도 모르겠구나.”
권법사를 지향하는 자로서 가장 유명한 고수를 떠올린다면 단연 최근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 제갈 사혁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제갈 사혁은 칠객 등을 물리치며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활약을 펼치며 일약 정파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무림인이 되었다.
“제갈 사혁이요.”
“그렇단다. 그 화산파의 후계자........ 응? 이 녀석이 어딜 간 거야?”
눈을 맞으며 한 손에는 검이 아닌 도를 든 제갈 사혁은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대주님. 뭐하시는 거야?”
“조용히 좀 해봐.”
봉황대 대원들이 제갈 사혁을 지켜보는 가운데 손에 든 무기를 휘두르자 앞에 놓인 철심이 반으로 갈렸다.
“오오!”
봉황대 대원들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제갈 사혁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내공을 쓰지 않고도 힘과 속도만으로 철을 벨 수 있다. 이게 우리가 신체를 단련해야 하는 이유다.”
제갈 사혁은 이신을 조금 더 잘 가르칠 수 있도록 그리고 교육자로서 안목을 넓히기 위해 봉황대 임시 대주직을 맡은 만큼 시간이 날 때마다 봉황대 대원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특별한 기술은 없었다. 다만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독학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질문 있나?”
“대주님. 도를 쓰셨는데 그건 왜 그런 겁니까? 대주님은 검을 쓰시잖습니까.”
“좋은 질문이다. 같은 무기로서 그 자체만 보면 도가 검보다 훨씬 단단하다. 오직 한쪽 방향으로만 베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두껍게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즉 내공 없이 이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기도 단단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공을 활용하는 것에 비하면 번거롭고 까다롭지.”
사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실력을 떠나 저마다 내공을 사용할 줄 알기 때문에 내공 없이 물체를 베어내는 기술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검에 내공을 씌울 수 없어도 내공을 이용해 근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 사혁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제갈 사혁 나름의 수업이 끝나자 이신은 따뜻하게 데워진 수건을 제갈 사혁의 목에 감아주었다.
“사부. 방금 그거 꼭 배워둬야 해요?”
“뭐?”
“철을 베는 기술이요.”
“배워두면 좋지. 특히 너 같은 경우에는 이것저것 다 배워두면 좋아.”
이신도 어느 정도 경험이 쌓였고 무공도 숙달되어가는 과정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가르침의 범위를 지금보다 더 크게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가르쳐준 건 어떠냐?”
“뇌제교연 말이에요?”
뇌제교연은 깨달음을 얻은 후 이신을 위해 만든 첫 번째 무공이었다. 때문에 이신에게 제일 먼저 가르쳤고 동시에 이신을 통해 무공의 완성을 보고 싶었다.
“그냥 쓰면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쓰려면 쓸 수 있다고? 녀석 말은 쉽게 한다.”
그러면서 제갈 사혁은 목에 건 뜨거운 수건을 머리에 올렸다.
“여기 온지 며칠이나 됐지?”
“이제 두 달 됐을 거예요.”
두 달 동안 어느 정도 봉황대의 전력을 강화 시켰고 기존 봉황대와 새로 뽑은 봉황대의 결속력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그냥 하나의 봉황대였다. 지난번 임무에서 단독행동을 보인 초영이 아쉽기는 하지만 여전히 초영이라는 인물만큼 봉황대를 이끌기 적당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이 떠나고 외부인사가 대주 자리에 앉는다면 그것도 솔직히 걱정됐다.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봉황대는 현재 그야말로 제갈 사혁의 봉황대였다. 그런데 제갈 사혁이 그만둘 경우 뭣도 모르는 외부인이 개편을 이유로 봉황대를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었다. 자신만 해도 전임 대주인 무허대사의 의중을 파악하려 하지 않고 물갈이를 단행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장담할 수 있었다.
“대주님. 접니다.”
“들어오십시오.”
초영과 달리 걸걸한 목소리의 사내가 들어오자 제갈 사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사손몽(射潠夢)은 현재 봉황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자다. 부하지만 무림인으로서도 선배이고 나이도 무시할 수 없어서 유일하게 존대를 하는 사람이었다. 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 조직의 지도자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올해가 가기 전에 은퇴를 하고자 합니다.”
“은퇴 말입니까?”
봉황대라는 보직은 꽤 이름값이 높은 편이지만 냉정히 놓고 보면 노후를 보장할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추천서를 써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퇴를 할 경우 상관에게 추천서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일종의 신용이 되어 혹여 은퇴 후 다른 일을 할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대게 어느 정도 ‘작은 성의’를 받는다. 분명 좋은 관행은 아니지만 제갈 사혁은 이런 일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은퇴 후에는 무슨 일을 하실 생각입니까?”
“상단에 쟁자수가 될 생각입니다. 분명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봉황대를 하면서 만날 적들에 비하면 확실히 그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집안 어르신이 상단을 크게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곳에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사손몽과의 면담이 끝난 후에도 봉황대 대원들의 방문은 이어졌다.
“최근에 좀 뭐랄까..... 검에 자신이 없어지고 남들이 창을 쓰는 걸 보니까. 창을 들면 더 강해질 것 같긴 한데.....”
“창이 쓰기 쉬운 물건인건 맞는데 그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잖아. 다시 생각해봐. 전쟁터에서나 창이 쉽게 먹히지 무림인 특유의 1:1에서는 벼락치기로 배운 실력 가지고 어림도 없다.”
무림인으로서 진로 문제라던가. 이런 저런 고민들이 줄을 이었다. 제갈 사혁이 젊은 나이지만 실제로는 지난생애와 합해 중년 남자와 비슷한 나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담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아우~ 오늘은 상담이 꽤 길어졌네.”
“수고하셨습니다. 대주님.”
초영이 뒤처리를 하자 제갈 사혁은 의자에 깊게 눌러앉았다.
“초영.”
“네. 대주님.”
“내일은 잠시 자리 좀 비울 테니 알아서 해줘.”
“잘 처리하겠습니다.”
서류정리까지 끝내고 하루 업무를 끝낸 제갈 사혁은 무림맹에서 나와 주루로 향했다.
“여기에요. 여기.”
청하가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자 제갈 사혁은 청하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봉황대로 간 뒤에는 같이 술 마시기도 힘드네요.”
“빨리 후임을 정해야 하는데 말이죠.”
대주 같은 한 조직의 수장보다는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출사가 확실히 편했다.
“성제 진인께서는 어디에 계시죠? 같이 왔잖아요.”
“스승님. 저기 계셔요.”
반대편에서는 한껏 차려입은 성제 진인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술독을 쌓아 술내기를 하고 있었다.
“내일 모래 불혹(不惑)이면서 저러고 계시네요.”
“그러고 보니 얼마 안 있으면 새해네요. 나도 이제 스물 둘인가.”
제갈 사혁의 음성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왜 그래요?”
“그게........... 아니에요. 아무것도.”
잠시 고민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술잔을 들이키는 모습이 제갈 사혁답지 않게 싱겁지 짝이 없었다.
“내일 참배라도 갈래요. 가까운 청성파 어때요?”
각자 무당파와 화산파로 갈리지만 종교적 의미로 도문은 하나기 때문에 딱히 참배 장소를 가리지는 않는다.
“내일은 종친회가 있어서요. 조금 힘들 것 같아요.”
“종친회요.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대단해보이네요. 친척들 다 모이죠? 부럽다.”
종친회라는 걸 말로만 들어본 청하는 종친회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렇게 부러워 할 것 없어요. 제갈 세가는 손이 귀해서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다 아는 사람들이라 거기가면 젊은 사람들은 집안 어르신께 잔소리 한번 씩 듣는 게 일이에요. 특히.....”
“특히?”
“아니에요. 아무것도.”
오늘따라 왜 이리 싱거운 소리만 하는 건지 도저히 제갈 사혁답지 않았다. 술을 마신 뒤 청하와 이름 모를 사람 두 명을 모아 마작을 두었다. 그렇게 주루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제갈 사혁은 새벽에 호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괜찮겠어요?”
스승인 성제 진인을 등에 업고 있는 청하의 모습이 딱해보였지만 청하는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무림인이 술에 취할 리 없잖아요. 스승님은 그냥 취기를 느끼고 싶어 하는 것뿐이에요. 실제로는 멀쩡하니까. 다녀와요.”
제갈 사혁이 떠나자 청하의 등에 업혀 있던 성제는 갑자기 등에서 내려와 몸을 풀기 시작했다.
“스승님?”
“우리도 가볼까?”
“어디를요?”
“어디긴 사문에 가봐야지. 이럴 줄 알았으면 사혁군에게 태워 달라 할 걸 그랬네.”
별안간 갑자기 무당파에 간다니? 그렇다고 이런 일로 실없는 소리할 사람도 아니었다.
“사문에는 왜요?”
“왜긴 정초에는 바쁘니까. 장문사숙 얼굴 미리 보고 가는 거지.”
============================ 작품 후기 ============================
지난편에 대해 브리키오님이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심리상태를 잘 표현하고 싶었는데 후기에도 나와있듯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제갈 사혁 뿐만 아니라 전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갈 사혁에 대한 표현만 제대로 해도 그것보다는 잘 썼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원래 제가 글을 쓰는 방식이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주인공 시점에서 글을 쓰던 버릇이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3인칭은 헛갈립니다.
대충 눈치 채셨겠지만 가끔씩 보면 작가 시점이 아니라 제갈 사혁 시점으로 나올 때도 더러 있습니다.
지난 편은 미숙한 주제에 이것저것 하려다가 이도저도 안된 그 결과물입니다.
단 이제 무림맹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은 사실 저도 쓰기 전에 고민을 많이했습니다.
고민 끝에 '제갈 사혁이 무형독의 출처를 알았다' 라는 사실에 중점을 두었을 뿐입니다.
무형독은 사실 제갈 사혁을 죽게 만든 물건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제갈 사혁 빼기 무형독은 살막! 이렇게 심플한 구조로 가는 것을 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