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회: 함께 한다는 것. -->
“대주님. 말씀하신 분이 지금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봉황대 대원이 다가와 보고를 올리자 제갈 사혁은 입이 귀에 걸렸다.
“자~ 그럼 가볼까?”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되자 제갈 사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목표가 있는 곳을 향했다.
“어디 우리 헛똑똑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한번 볼까?”
한편 밖으로 나온 혜아와 이신 그리고 청하 지곤 현석은 무림맹 입구 근처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어디에서 이야기라도 나누죠. 지곤 소협 시간 있죠?”
청하의 물음에 지곤은 사질인 현석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요 녀석이 꼭 제갈 사혁을 보고 가겠다는데 아무래도 당사자를 보기 전까지는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야죠.”
“저... 실례합니다.”
따로 자리를 마련해 친목을 다지려는 그때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낭자 무슨 일이십니까.”
평소에 실없어 보이는 지곤은 요염한 느낌의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 느끼한 목소리로 한껏 무게를 잡았다.
“낭자라뇨. 결혼을 안 한건 맞지만 처녀는 아니랍니다.”
“네?”
그러고 보니 그녀의 품에는 비단에 감싸인 아기가 안겨 있었다.
“쳇!”
지곤은 좋다가 말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청하는 옆에서 그런 지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신은 지곤을 대신해 아름다운 미부를 접면했다.
“무슨 일이시죠?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혹시..........”
“네.”
“제갈 사혁이라는 분을 아세요?”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순간 이신은 빠르게 그녀를 훑어봤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구지?)
가능한 모든 행동을 제갈 사혁과 함께 하는 이신이다. 제갈 사혁이 최근 만난 사람들은 거의 자신을 통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신은 눈앞에 있는 여인을 살짝 경계했다.
(수상한데 왜 이런 사람이 사부를 찾는 거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헌데 누구시죠?”
이신이 제갈 사혁의 지인임을 자처하자 여인은 품에 안긴 아기를 보더니 지금 이 자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릴만한 발언을 했다.
“아가.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겠구나.”
그 발언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 순간 제일 충격 먹은 건 혜아였고 이신은 충격 먹을 틈도 없이 그 여인과 청하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청하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니야. 반응이 없다는 건 그만큼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사부의 제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지? 잠깐 그러면 뭐야 이 사람이!)
사부의 아이를 낳았다면 분명 사모가 되고 사모가 된다는 건.
(내...... 어머니가 되는 건가!)
이신은 거기까지 생각한 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제갈 사혁과 혼인하는 건 청하라고 굳게 믿고 있는 열다섯 순진한 소년에게 지금 이 상황은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떡하지? 어쩌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진짜!)
혜아는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청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 제갈 사혁 이 자식 능력 좋네!”
지곤이 눈치 없이 부럽다는 듯 말하자 이신은 생전처음 느껴보지 못한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이럴 땐 화내야 하는 건가? 이럴 땐 웃어야 하는 건가? 이럴 땐 울어야 하는 건가?)
이신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저 실례합니다. 혹시 제갈 사혁이라는 분은 어딜 가면 만날 수 있나요?”
이번에도 누군가가 제갈 사혁을 찾자 이신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저기 죄송한데 그런 사람 여기 없거...........”
지금 이 순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이고 아버지 같은 제갈 사혁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그때 이신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에도 제갈 사혁을 찾은 사람은 옆에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다만 한 가지 배가 불룩 나왔다는 점만 빼고 말이다. 이번에 나타난 여인 역시 미인이었다. 그런데 배가 나오다니 배가 나왔는데 제갈 사혁을 찾다니?
“무.... 무슨 일이시죠?”
“제갈 사혁 소협을 찾고 있는데 혹시 아시나요?”
“네..... 알고말고요. 그런데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복중의 태아는?”
“그 분과 저의 아이입니다.”
사부의 숨겨진 사생아. 이것 말고 더 이상 받을 충격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쓸 때 없이 묵직한 다음 충격은 뭐란 말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연속으로 휘몰아치는 혼란에 이신은 갑자기 두통을 느꼈다.
“어머 귀여워라.”
그런데 그 순간 청하가 갑자기 첫 번째 여인이 안고 있는 제갈 사혁의 사생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번 안아 봐도 돼요?”
“네. 그러세요.”
안아 봐도 되냐는 말을 하면서 웃고 있는 청하를 보자니 이 순간 제갈 사혁이 종종 사용하는 염통이 쫄깃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 너무 귀엽다. 혜아 소저 뭐해요. 한번 안아 봐요.”
혜아에게 아이를 안아 보라며 손짓하자 혜아는 몸을 비틀거리며 다가와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 안녕 너는 나의 종질이 된단다. 그냥 고모라고 부르렴.”
그러면서 혜아는 기뻐서 흘리는 눈물인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몇 개월이에요?”
청하는 제갈 사혁의 사생아일지도 모르는 아기를 보며 귀엽다고 하는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임신 중인 여인에게 다가가 아이를 품은 지 얼마나 됐냐고 묻기까지 했다.
“이.... 이신.”
“네......... 아가씨.”
“나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드리지 못하겠어. 종질이 생긴 것도 그리고 곧 또 다른 종질이 태어나는 상황도.... 그리고 언니가 둘이나 생겼다는 것도.”
혜아는 힘겹게 이신의 옷깃을 붙잡고 서있을 뿐이었다.
“학사관은 휴학하고 그냥 집으로 갈래.... 데려다 줘.”
“네. 아가씨. 여긴....... 여긴 사부님이 알아서 하겠죠.”
두 사람은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떠나버렸다. 그 두 사람에게는 이 상황을 올바르게 정리할 수 있는 정신도 의지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애들한테는 충격이 좀 컸겠네.”
이신과 혜아가 떠나자 제갈 사혁은 슬렁슬렁 어디선가 나타났다.
“야 너! 왜~ 야! 이게!”
지곤은 연신 야! 너! 왜~ 이게! 등을 짧고 연속적으로 내뱉으며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표현했다.
“?”
그런데 그때 누군가 제갈 사혁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지곤의 사질인 현석이었다.
“뭐냐? 꼬마야.”
“제갈 사혁이세요?”
제갈 사혁이세요? 라니 제갈 사혁을 쓰러트리겠다고 소리치던 조금 전과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넌 누구냐?”
“존경합니다.”
“뭐?”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꼬마가 존경한다고 하자 제갈 사혁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사숙. 가요. 우리 이제.”
“제갈 사혁을 만나면 척추를 뽑아버리겠다며 뽑아 봐. 거기 있잖아.”
“저렇게 예쁜 누나들을 부인으로 삼을 정도면 이미 싸우지 않아도 남자로서 진거라고요!”
현석의 마음이 바뀌자 지곤은 제갈 사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간다. 그리고 나중에 재수씨들 소개 좀 시켜줘라.”
“그런 거 아니야. 멍청아.”
“아니기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지곤은 제갈 사혁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제갈 사혁은 괜히 지곤에게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그런 걸로 치고 넘어갔다. 지금부터 제갈 사혁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청하 소저?”
제갈 사혁은 청하의 눈치를 살폈지만 청하는 여전히 아기를 안고서 싱글벙글거렸다.
“아이가 참 귀엽죠?”
아이가 귀엽냐는 질문에 제갈 사혁은 청하가 이 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생각하고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실......”
“갈사 소협이랑 하나도 닮지 않아서 참 귀여워요.”
“네?”
아기를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돌려주며 청하는 눈을 깜빡이며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무슨 장난이에요. 이건.”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갈 사혁은 초영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초영은 제갈 사혁의 애인 혹은 정인을 연기했던 두 사람에게 다가가더니 세 사람은 두 팔을 들어 서로를 얼싸 안았다.
“오랜만이야. 언니들!”
“보고 싶었다. 막내야!”
“많이 야위었네.”
단순히 근처에서 돈을 주고 고용했을 거라 생각했던 그 두 사람이 초영의 언니들이라는 사실에 놀랐지만 제갈 사혁은 청하에게 집중했다.
“알고 있었단 말이죠?”
모든 게 완벽했는데 알고 있었다니? 제갈 사혁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충격이었죠. 처음에 나온 사람까지는 ‘설마 갈사 소협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였는데 두 번째에서 ‘이거 뭐지?’ 라고 생각했어요. 확실하게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죠. 한명도 아닌 두 명이나 갈사 소협과 정을 통했다는 이야기를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요.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 차례대로 정해진 순서마냥 같은 공간에 나타난다는 건 상식적이지 못하니까요.”
“지금 뭔가 남자로서 되게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오해가 아니 처음부터 오해랄 것도 없었지만 잘 풀린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대주님.”
“어?”
“가족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오후 업무는 나 혼자 할 테니 다녀와.”
초영이 자리를 뜨자 제갈 사혁은 왠지 둘만 남은 이 상황이 어색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튼 그 다음부터는 정신을 차렸고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해본 결과 이 상황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결과를 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여자가 좋아할 구석이 한군데도 없잖아요. 얼굴은 잘생겼지만 성격이 나빠. 성격이 나쁘니까 하는 짓도 이상해. 하는 짓이 이상하니까 정 떨어져.”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자 제갈 사혁은 심장에 못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나 울어도 되요?”
울어도 되냐는 말에 청하는 제갈 사혁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분명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당신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을 느꼈다. 언제부턴가 청하는 자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기보다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이 마음을 색깔로 따지면 분홍색이라기보다 진한 붉은색이었다.
“그러니까 진짜에요? 충격 같은 거 받지 않았어요?”
“충격?”
팔짱을 끼고 충격이라는 단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청하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충격은 내가 아니라 갈사 소협이 받아야죠.”
“내가 왜 충격을 받아요.”
바로 그때였다. 청하는 제갈 사혁의 멱살을 잡았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것 봐~ 충격 받았네.”
사뿐하게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는 청하를 보며 제갈 사혁은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그거 뭐죠?”
방금 그거 뭐냐고 묻자 청하는 한쪽 눈을 찡긋 거리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또 해줘요?”
“아..... 아니요.”
“봐요. 충격 먹었네.”
정상적인 남자라면 아니요. 라고 답할 리 없었다.
============================ 작품 후기 ============================
원래는 더 오글거리게 상황전개를 할 수 있었는데 무협이라는 특성의 한계상 표현하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러브코메디 같은 설정과 쉬어가는 느낌의 에피소드는 이번 화로 끝입니다.
이제 중심스토리를 내일부터 달려야죠.
(라고 말해도 아직 어떤 식으로 전개할지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 정리 해야 할 건
청성파의 그 꼬맹이는 뭔가?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