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61화 (161/262)

<-- 161 회: 낙인 -->

“너 여자랑 입맞춰봤냐?”

“잊고 있나본데 나부터가 여자야.”

“너랑은 사내랑 이야기 하는 것처럼 편해서 말이야.”

회의 중에 옆 자리에 앉은 혜성에게 제갈 사혁이 건넨 말은 참으로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봉황 대주. 회의에 집중 했으면 좋겠소만.”

회의를 주도하는 건 가장 연장자인 백사 대주였다.

“백사 대주님은 입맞춰보신 적 있으십니까?”

“왜? 궁금한가? 궁금하면 지금이라도 나랑 입 맞춰 보시게!”

“됐습니다!”

백사 대주의 농담에 제갈 사혁은 미간을 찡그렸고 옆에서 혜성이 제갈 사혁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고작 그런 걸로 건방 떨지 마라. 저 아저씨 부인만 셋이다.”

“부인만 셋!”

가장 이상적인 부인의 숫자인 삼부인이라니!

“백사 대주님.”

“뭔가 봉황 대주?”

“형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자네......... 회의에 집중하게.”

가장 연장자이기 때문인지 백사 대주는 조금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농담 할 때는 하지만 일할 때는 너무 확실해서 탈이었다.

“신년맞이 동원 훈련은 어떠신가?”

백사 대주가 오대주 통합 훈련의 제의하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저었다.

“봉황대는 재끼겠습니다. 내부 훈련만으로 벅찬 상태라서 말입니다.”

“꽤 인재를 모았나봐? 내부 훈련에 집중하는 걸 보면.”

황룡 대주가 주먹으로 어깨를 때리는 식의 장난을 걸어오자 제갈 사혁은 맞받아쳐주며 자신감을 한껏 뽐냈다.

“실전도 훈련도 잘 흡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년 행사로 훈련이라니 그런 짓 했다가는 하극상이 일어날 겁니다.”

“그럼 다음 안건이네........”

오후 회의도 끝나자 황룡 대주는 혜성와 제갈 사혁 두 사람과 어깨동무를 나란히 했다.

“한잔 해야지? 선배도 온다는데.”

오대주 전원이 참석하는 술자리를 갖자는 말에 제갈 사혁과 혜성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난 싫어.”

“술은 좋아하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서 말입니다.”

“오라버니!”

세 사람이 술자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갑자기 젊은 여인이 달려와서는 백사 대주의 품에 안겼기 때문이다.

“누구야? 동생인가? 엄청난 미인인데!”

황룡 대주는 물론이고 제갈 사혁도 고개를 한번 쯤 돌려볼만한 미인이었다.

“셋째 부인이야.”

“뭐?”

“말도 안 돼! 저런 아저씨한테 저런 미인이! 진짜 선배 부인이라고?”

황룡 대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제갈 사혁은 백사 대주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언니들이 기다려요.”

“허참~ 미안하게 됐네. 볼 일이 있다는 걸 깜빡했군. 이왕 이렇게 됐으니 술자리는 다음으로 미루세.”

미안하다면서 팔짱을 낀 채 다른 두 명의 미인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백사 대주는 그야말로 남자들의 꿈이며 머나먼 이상향이었다.

“저기 있네. 백사 대주보다 한 살 위의 첫째 부인과 동갑인 둘째 부인 그리고 한 살 아래의 셋째 부인. 그 명성이 자자한 재화자매(才華姉妹)야.”

“왜 재화자매야?”

“왜긴 저 세 사람이 진짜 자매니까. 그렇지.”

“말도 안 돼! 저 선배한테 저렇게 미인이 셋이나 있을 순 없어!”

황룡 대주는 믿을 수 없다는 연신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사 대주는 머리도 대충이고 수염도 꼭 산적마냥 길러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저 아저씨 한 인물 했어. 공동파에서 가장 잘생긴 인물을 뽑으라면 단연 저 아저씨였으니까. 수염도 얼굴 때문에 부인들이 억지로 도둑놈마냥 기르게 한 거지 잘 정리하면 지금도 한 인물 할 걸.”

각 오대주의 숙소는 같은 방향이기 때문에 한동안 세 사람은 길을 함께 걸었다.

“대주님!”

대주님이라는 말에 제갈 사혁을 제외한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을 제외하면 그 두 사람의 부관은 전부 남자였다.

“우리 애네. 무슨 일이야?”

“임무가 내려졌습니다.”

“아이씨~ 아니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임무야!”

황룡 대주는 짜증을 냈고 부관은 미간을 찡그렸다. 보통 오대주들에게 내려지는 임무라는 건 대부분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는 힘든 임무기 때문이다.

“시용문(始宂門). 수뇌부의 경호입니다.”

특히 무림맹 중심 문파나 하부 문파 경호 등의 정치적인 임무가 주를 이뤘다.

“안 하면 안 되냐?”

무림맹 전력의 한축을 담당하는 대주로서는 정말 책임감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지만 황룡 대주의 부관 역시 안하고 싶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흑랑 대주직이 공석이라서 임무가 골고루 내려지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한쪽이 흑랑대를 대신해 임무를 더 받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 대주직이라는 게 위에서 임무가 내려오면 무조건 해야 하는 자리라서 임무를 많이 받는다고 월급이 오르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야. 좀 돌려 막자.”

황룡 대주가 임무를 넘기려 하자 혜성은 난색을 표했다.

“난 안 돼. 지난 임무 보고서도 아직 안 썼어.”

혜성이 거부하자 황룡 대주는 제갈 사혁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제갈!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내가 왜 당신 친굽니까? 나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고만.”

“사회에서 만나면 10살 정도는 그냥 친구 먹는 거지! 혜성이랑 나랑 2살 밖에 차이 안 나는데 둘이 이렇게 친구잖아!”

사실 무림에 서로 스승들 간의 배분이라는 것도 있고 여러 복잡한 것들이 작용한다. 그 중에서 특히 제갈 사혁은 족보가 많이 꼬인 상태였다. 봉명공과 제갈 사혁의 사형인 무원 그리고 혜성이 친구인데 봉명공과 제갈 사혁이 서로 친구라서 혜성과도 말을 놓고 지낸다. 그리고는 배분 상으로는 봉명공이 제갈 사혁의 스승과 같은 위치다.

임무를 맡기 싫어서 생떼를 부리는 황룡 대주를 보자니 속이 좋지 못했다.

“좋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단! 다음에 술자리에서 황룡 대주님이 전부 내시는 겁니다.”

제갈 사혁은 일부러 술값 이야기를 꺼내 황룡 대주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지금 서있는 곳은 무림맹의 사람들 다 보는 공개된 장소다. 때문에 상급자인 황룡 대주가 하급자인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 모양새가 그의 체면을 깎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아. 이번 일만 맡아주면 사천에서 가장 비싼 곳으로 안내하지.”

좋게 말하면 사회생활 잘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약아빠졌다.

“뭐야. 그 임무 아니 뭡니까. 그 임무라는 게.”

“하대 하셔도 됩니다. 봉황 대주님.”

“아닙니다. 황룡 대주님의 부관이신데 하대할 수는 없죠.”

황룡 대주의 부관에게 하대를 했다가 서둘러 고치는 것도 의도된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더 호감을 살 테니까.

“그럼 이번 임무에 관해서는 오늘 밤 제가 초영을 통해 임무관련 서류를 드리겠습니다.”

“초영은 개인적인 일로 자리를 비웠으니 동경 대원에게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황룡대를 대신해 봉황대가 임무를 맡게 되고 그날 저녁 봉황대 대원인 동경을 통해 임무가 하달됐다.

“시용문이 뭐하는 데야?”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는 동경의 말에 제갈 사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몰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초영이 아닙니다.”

“맞는 말이네.”

확실히 부관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때마침 초영이 와서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대주님.”

“어서와. 언니들과는 이야기 잘 나눴고?”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대주님. 저는 가보겠습니다.”

초영이 오자 대기하고 있던 동경은 숙소로 돌아갔다.

“시용문이 어디야?”

제갈 사혁은 초영이 오자마자 시용문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초영은 책장에서 책을 꺼내더니 시용문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문파가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지역 특산품으로 이익을 얻어 그 돈으로 무림맹에 기부를 많이 했습니다.”

“어어~ 대충 뭐하는 곳인지 알겠네.”

한마디로 그쪽은 정파 그 자체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무림맹에 자금을 대 무림의 명성을 얻으려는 곳이었다.

“수뇌부 경호라는데 이런 경우가 흔하나?”

“네. 아무래도 힘없고 돈 많은 문파일수록 뒤가 좀......”

“그런 건 어느 문파든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내 말은.”

“아니요. 이런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한 문파의 지도부를 보호하는 임무는 흔하지 않죠.”

그 후 제갈 사혁은 보고서를 수십 번 읽기 시작했다. 일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인원을 차출하기 위해서다.

“이번 일은 자원을 받는다.”

“자원 말입니까?”

“많아서 좋을 것 없어. 가고 싶은 사람 딱 두 명만 뽑아.”

“네. 알겠습니다.”

초영이 물러나자 제갈 사혁은 다시 한 번 보고서를 관찰했다. 달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보고서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돈이나 납부하는 주제에 무림맹에 호위를 의뢰했단 말이지.”

무림맹도 받아먹은 게 있으니 앞으로 더 많이 받아먹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부탁을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갈 사혁이 다른 대주들과 다른 점이라면 본인 스스로가 정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제갈 사혁은 늦은 밤 무림맹의 장로이자 사숙인 도오 진인의 방을 방문했다.

“장로님 안에 계신가?”

“기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경비병의 안내에 따라 사숙인 도오 진인을 만난 제갈 사혁은 이번에 양도 받은 임무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이게 무엇이냐?”

“시용문에 대해 알 수 있습니까.”

“시용문?”

“네. 무림맹이 시용문에 대해 조사한 모든 걸 알고 싶습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자료실로 가야 한다. 내 따로 기별을 넣을 테니 내일 아침에 가보거라.”

“아니요. 지금 당장 필요합니다.”

“급하냐?”

“급합니다.”

“알았다.”

도오 진인의 권한을 대행해 자료실 문을 연 제갈 사혁은 사서를 대동한 채 시용문에 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나으리 관련 서류는 이게 전부입니다.”

무림맹의 중요 문파가 아니기 때문에 시용문에 관한 서류는 두루마리 하나도 끝이었다.

보통의 무림인이라면 시용문과 무림맹의 관계만 알아보는데 그치지만 제갈 사혁은 시용문의 연혁이나 관련 인물들의 인간관계까지 조사했다.

개인으로 활동하는 출사와 달리 무림맹의 무력 단체인 봉황대로서 임무를 맡는 이상 이 정도는 필수였다.

“그 지역 특산품인 황옥(黃玉)을 독점하고 있군.”

그렇게 밤새 한숨도 안자고 시용문에 관해 조사를 한 제갈 사혁은 청하와 함께 늦은 아침을 했다.

“신이는요?”

“그때 장난 친 게 아직도 충격이었나 봐요.”

“그러기에 왜 그런 장난을 쳐요.”

“처음에는 그냥 혜아만 놀리려 했는데 그 녀석도 휘말릴 줄 몰랐죠.”

혜아가 왜 무림맹을 방문했고 왜 제갈 사혁이 그런 장난을 쳤는지 전해들은 청하는 제갈 사혁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결혼 독촉 받는다면서요?”

“네. 나이가 나이니까요.”

스물 하나 이제 스물 둘. 화산파니 무림인이니 하면서 잘 막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나라도.....”

“네?”

“나라도 데려가지 그랬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먼저 그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무림인이잖아요.”

“?”

“여자보다 무림인이 우선이잖아요. 나도 령령이 아니라 청하가 좋아요. 사내로서 당신의 얼굴과 목소리에 반했지만 마지막엔 당신의 마음가짐에 빠져들어 버렸어요.”

청하는 제갈 사혁이 좋아? 라고 묻는다면 싫어! 라고 대답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점이 좋았다. 그날 자신을 질투하고 질시하며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눴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부인으로 적합한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지 모른다. 순종적이고 절대 자신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하지만 자신의 옆에 아니 장차 화산파 장문인이 될 자신의 옆에 그런 여자는 필요 없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하고 대립하지 못하는 그런 동반자는 필요 없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눌 수 있는 이 여자야 말로 제갈 사혁이 앞으로 이뤄낼 목적 없는 욕망과 끝없는 야욕을 함께할 자격이 있었다.

청하는 자기도 모르게 제갈 사혁의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안아 봐도 돼요?”

“안돼요. 사람들 많아서. 부끄러우니까.”

============================ 작품 후기 ============================

지난 편에 쉬어가는 에피소드가 끝나고 이제 진지하게 잡아야 하는 만큼 기합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제갈 사혁이라는 인물이 조금 흩트러진 것 같아서 인물 정의를 확실히 했습니다.

마지막 줄은 이제 히로인이 왜 꼭 청하여야 하는 가에 대한 답입니다.

청하는 제갈 사혁을 질투해서 칼을 겨누기도 했고 지금도 제갈 사혁의 의견에 싫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제갈 사혁은 초기 설정대로 보통의 무협소설에 나오는 기존 기득세력이 그 바탕인 만큼 히로인 역시 순종적인 여주인공이면 안됐습니다.

제갈 사혁과 청하가 진심으로 마음을 한곳으로 모은 이번편에서 청하의 대한 정의는 끝났습니다. 꽤나 오래걸렸네요.

초반 의도한대로 청하와의 접전을 피하다가 공기화 되버렸고 잘 정리하다가 무림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표현하기 위해 제갈 사혁의 재능을 질투하고 그 과정에서 저 스스로 어쩔 수 없이 청하의 성격을 바꾸고 아무튼 청하에 대해서 정말 오래걸렸네요.

이게 기존 무협팬분들에게 먹히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한번쯤 삐딱선 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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