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회: 배교의 사술 -->
그리고 그 결과 배교 아니 살막이 노리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 새끼들 정사대전을 터트릴 생각이야.)
이제야 모든 게 확실해졌다.
모든 일의 원인이자 자신의 죽음 그 이유였던 ‘종방영’을 ‘무형독’으로 암살하려 했던 흑사련. 하지만 무형독은 살막의 물건이니 결국에 종방영을 죽이려 했던 건 ‘살막’이 된다.
종방영은 정사대전에서 흑사련을 빼내려 했고 그렇게 되면 정사대전은 정파와 마교의 싸움이 되기 때문에 정사대전 그 자체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끝이 난다.
(지난생애에서 살막은 정파와 사파를 오고가며 암살의뢰를 맡았어.)
살막이 암살집단으로서 의뢰를 맡았던 건 정파와 사파간의 갈등을 더욱 더 고조시켜 정사대전을 심화시키고 그로인해 마교에게 피해를 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정사대전의 시작은 분명 무당파의 제자 청하가 마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은 변함없다. 그리고 살막은 무림맹과 흑사련의 아귀싸움을 심화시켜 정사대전을 크게 벌리고 두 단체를 이용해 마교를 무너트리려 했다.
“이 정도면 가능성 있겠어.”
“소협?”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럼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배교와 귀하의 관계는.....”
뒷말을 흐리며 요상한 몸짓을 보이자 만공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실 만공과 갑과 을의 관계라 하더라도 일단 만나가 된 경위가 경위인 만큼 껄끄러운 무언가가 있었다. 만약 만공이 문파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 배교로 간다고 한다면 서로 좋게 끝날 수 없었다.
“손자 놈이 안휘에 단필 가게를 열면 우리 집안은 그때부터 장사꾼 집안이 되는 것이오. 배교라니 나는 그런 사람들 모르오. 앞으로도 모를 것이오.”
만공의 손자가 만공의 뒤를 잇지 않기로 한 이상 만공은 문파 최후의 전승자로서 화산파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뜻하지 않게 문제는 무림맹도 흑사련도 마교도 아닌 하오문에서 일어나게 된다.
“문주! 피하십시오.”
하오문의 문주인 흑운 공주는 호위무사 두 명과 시녀를 대동한 채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흑운 공주를 멀리서 보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하오문의 장로인 흉조였다.
“어떻게 할까요?”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냥 지나가는 거죠.”
흉조의 옆에 있는 이들은 마교의 무사기 때문에 오직 흉조의 보호만을 목적으로 했다.
“그나저나 저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군요. 어떻게 하오문의 문주가 있는 이곳을 알아낸 겁니까?”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좌호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지요. 시간은 넉넉하니까.”
도망치는 흑운 공주를 바라보며 흉조는 고개를 저었다.
“불쌍한 공주. 그대를 지킬 수 있는 이가 과연 이 강호에 있을 런지.....”
마교라는 단단한 방패가 있는 이상 흉조는 하오문을 집어삼킨 정체불명의 불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놈들!”
하오문의 손님으로 있는 산시성(山西省)의 고수 백마훈(伯魔勛)이 하오문을 위해 싸우자 하오문을 급습한 정체불명의 침입자들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죽고 싶은 놈은 덤벼라! 이 어르신이 목을 비틀어주마.”
백마훈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외치자 그 순간 그의 가슴에서 날카로운 칼이 튀어나왔다.
“윽!”
“산시성에서 제법 알아주는 고수라는 백마훈도 별거 아니네.”
“너... 넌 누구냐?”
백마훈은 재빨리 몸을 튕기듯 빠져나왔지만 칼이 몸을 꿰뚫고 지나간 자리가 너무 커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야 말로 무림인은 살기 위한 것이 아닌 승리하기 위한 각오를 해야 했다. 설사 그 대가가 죽음이라 하더라도.
낙천섬(落天閃).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며 강맹한 초식을 펼치자 백도훈을 벤 사내는 가볍게 몸을 피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백도훈의 결의(決意)를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 손쉽게 그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
“시시하군.”
백도훈을 죽인 사내는 시신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 앞에는 하오문 사병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천주. 하오문 문주를 놓쳤습니다.”
그의 부하되는 자가 나타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자 그는 부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놓쳐?”
그 목소리가 마치 인세(人世)의 것이 아닌 귀신의 목소리 같아서 부하는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비...... 비밀 통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하오문을 멸문시키려 온 게 아니다. 하오문 문주가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것으로 되었겠지. 막주께서도 이만하면 기뻐하실 거야. 그보다 그 녀석은?”
“천주께서는 계속 하고 계십니다.”
“같은 천주인데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병신 같은 년이 누구보고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쓰레기가 건방지게.”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응한 순간 그...... 아니 그녀를 향해 검이 날아왔고 그녀의 부하가 재빨리 그것을 막았지만 날아온 검은 그대로 살가죽을 뚫고 들어와 목숨을 앗아갔다.
“무공실력은 형편없는 주제에 천주 자리에 앉아 놓고 쓰레기 년이 뭐라는 거야?”
“적당히 해라. 네가 아무리 막주의 귀여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이상은 나도 못 참는다. 가울.”
문제를 일으킨 사내는 다름 아닌 살막의 가울이었다.
제갈 사혁에게 패배한 후 가울은 놀라울 만큼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현재는 살막의 천주들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되었다.
“못 참으면 어쩔 건데? 솔직히 말해서 네가 흑호 그 영감의 제자만 아니었으면 천주자리가 가당키나 해? 주공(蛛跫).”
“가울. 실력 좀 늘었다고 뻐기는 것도 어지간히 해라. 다섯 살 먹은 애새끼 같아서 못 봐주겠으니까.”
가울의 오만방자함은 그가 백년 하수오를 복용한 과거보다 최근 실력이 급속도로 발전한 현재 더욱 더 가관이었다.
“천주 두 분께서는 지금 싸우실 때가 아닙니다. 하오문의 눈을 가리는 일이 끝나지 않았음을 모르시는 겁니까?”
중년의 사내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자 가울과 주공은 이를 갈았다. 같은 천주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살막 내부에서도 막주 다음의 권력을 지닌 자이기 때문이다.
“일을 서둘러야 합니다.”
“막주께서는 무슨 생각이십니까? 하오문을 공격했다간 오히려 강호의 눈을 살막에 고정시키는 꼴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어디선가 수많은 무림인들이 나타냈다.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가울은..... 특히 흑사련의 무림인으로서 위장임무를 맡을 뻔했던 그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소동의 중심에 나타낸 무림인들은 모두 흑사련 출신의 무림인들이었다.
“저건 분명......”
그리고 흑사련의 무림인들 중 절반은 무림맹 출신의 무림인들었다.
흑사련과 무림맹 출신의 무림인들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살막의 부하들을 대신해 하오문의 잔당들을 베기 시작했다. 분명 정파와 사파의 인물들이지만 그들은 서로 적대시하기보다 하오문을 함께 치고 있었다.
“설명해주십시오. 이게 어찌된 일입니다.”
주공이 침착하게 설명을 요구하자 중년의 남자는 쓰고 있던 방립을 벗었다.
“강호의 눈이라 하셨소? 보시오. 이게 진실이오.”
불과 일각도 안 되는 시간에 마교를 제외한 정파와 사파의 무사들이 남아 있는 하오문의 사병들을 죽이면서 그게 ‘진실’이 되었다.
“처음에 우리가 하오문을 쳤을 땐 그 누구도 우리의 정체를 몰랐을 것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하오? 아니 묻겠소. 지금 하오문을 공격한 게 누구요?”
처음 시작은 살막이 했을지 모르지만 마무리는 정파와 사파의 무사들이 하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사건을 정리한다면 이번 일은 정파와 사파의 공작(工作)이 된다. 그렇게 되면 전 무림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왜 우리는 몰랐죠?”
“그래. 말을 해봐. 이 잘난 양반아.”
오만방자한 가울조차 그 앞에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계획이 바뀌었소.”
계획이 바뀌었다는 말에 주공은 인상을 구겼다. 계획이 바뀌었는데 천주인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
“언제부터?”
“오래전부터요. 가울 천주의 흑사련 잠입이 백지화된 순간부터.”
(그렇게나 오래 계획이 바뀌었는데 알리지 않았다니......)
“이유가 뭐죠?”
“더 이상 우리는 살막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오.”
“언제부터?”
언제부터냐는 중년의 사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반면 주공과 가울은 상황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살막과 함께했고 그들이 복종할 곳은 오직 살막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살막일 필요가 없다니. 그리고 그날 밤 강호는 발칵 뒤집혔다.
무림맹과 흑사련이 하오문을 공격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겨우 몸을 빼낸 하오문의 수뇌부는 무림맹과 흑사련을 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무림맹은 주방숙수까지 포함한 무림맹 내의 전 책임자 긴급소집이 이뤄졌고 내부감사가 진행됐다.
“이게 무슨 일이야?”
급하게 사천으로 돌아온 제갈 사혁은 미칠 노릇이었다. 긴급소집이라기에 무슨 일인가 했는데 주방의 책임자인 숙수까지 소집된 것을 보고 내부감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무림맹 내에서 부하를 거느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였다.
“너 이 놈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무림맹의 병관을 관리하는 자다! 감히 그런 내게! 이번 일이 끝나고 네놈 목이 붙어 있을 성 싶으냐?”
곳곳에서 자신의 지위에 흠을 내는 조사가 이뤄지자 급기야 자신의 지위를 언급하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무림맹의 사병들이 그들을 연행해가는 일도 일어났다. 그렇다보니 혜성은 물론이고 다른 대주들은 제갈 사혁의 손을 꼭 잡았다.
“이게 무슨 뜻이야?”
“아니 뭐 그냥.....”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게.”
“화산망종. 좀 조용히 하고 있어.”
조사가 길어지자 점점 사람들은 지쳐갔고 그렇게 무림맹은 진통을 앓았다.
(살막의 수작질이 분명한데 말이야.)
그렇다고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알고 있는 것과 알게 된 것만으로 살막이라는 단체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흑운 공주를 만나는 게 우선이었지만 이렇게 무림맹에 붙잡혀있어서야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도 없었다.
(일단 방만장이라는 놈부터 찾아야 하는데.)
살막과 관계된 탈주 무림인 사건과 이번 일의 연관성은 굉장히 높았다.
탈주 무림인 사건을 조사하고 난 후 생긴 무림맹과 흑사련의 하오문 습격.
한시가 급했다. 같이 이번 일을 조사했던 후기지수 중 한명을 만나던가. 정 안되면 시장바닥에서 좀 도둑 흉내를 내고 있는 흑호라도 만나야 할 판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석에 쉰만큼 생각해둔 내용들이 있어서 글을 계속 썼습니다.
진짜 오랜만에 약참(약하게 연참)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