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회: 배교의 사술 -->
오대주들 역시 다른 지휘권을 가진 자들과 동일하게 조사를 받았고 새벽이 돼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하오문이 박살났는데 이런 때에 내부조사라니 미친 거 아니야?”
“투덜 거려서 뭐하겠나. 우리는 그저 방침에 따를 뿐이네.”
황룡 대주는 윗선의 방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파와 사파가 하오문을 함께 습격한 정황이 포착된 관계로 일단 무림맹 내에 부하를 한명이라도 거느리고 있는 자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조사에 임해야 했다.
“봉황 대주님이십니까.”
“응?”
조사를 끝마치고 돌아가려는 그때 살기가 대단히 짙은 사내가 제갈 사혁을 불렀다 아니 불렀다기보다는 말과 동시에 앞을 가로막았다.
“건방진 놈. 네놈의 이름부터 밝혀라. 내가 누구인줄 알고 나와 눈을 마주하는 거냐?”
일순간 제갈 사혁의 몸에서 기척이 사라지며 동시에 귀신처럼 오른손이 뻗어 나와 상대의 목을 죄였다. 그러자 짙은 살기를 내뿜던 사내는 검을 뽑아 자신의 목을 죄여오는 제갈 사혁의 팔을 베었지만 팔에는 상처하나 생기지 않았다.
도검불침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한쪽 팔이 잘려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예리한 검격이기에 제갈 사혁은 중지에 힘을 줘 혈을 압박했다.
“봉황 대주!”
“화산망종!”
“자네 뭐하는 건가?”
서둘러 오대주들이 제갈 사혁을 제지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단이 났을 상황이었다.
“자중하시게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해!”
“너 여기서 일 치루면 화산파라해도 죄를 피하기 힘들다.”
제갈 사혁 입장에서는 오랜 조사로 피곤해진 상태인데 어디서 기어 나온 지도 모르는 놈이 살기를 풀풀 풍기며 앞을 가로막자 갑자기 신경질이 났다.
“일단 자중하게 젊은 사람이 성격도 급하고만.”
“젊었을 땐 다 급하죠. 먹는 것도 노는 것도 사랑도~”
제갈 사혁은 시답잖은 농담으로 여유 있는 척을 했고 그런 제갈 사혁을 보며 백사 대주는 불연 듯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자네도 소속을 밝히게 무림맹의 병권을 쥔 우리들 앞에서 이름도 밝히지 않을 정도로 대단해 보이진 않네만.”
백사 대주가 나서서 의문의 사내와 제갈 사혁간의 문제에 끼어들자 사내는 검을 집어넣고 백사 대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개방의 오걸(旿傑) 장로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오걸 장로라면 전임 무림 맹주 강서가 물러난 후 공석이 된 개방 측 무림맹 장로를 뜻했다.
(구월상과 함께 탈주 무림인을 쫓았던 일 때문인가?)
개방은 구월상의 출신 문파고 개방 측 무림맹 장로와 만나야 할 일이 있다면 지난 번 탈주 무림인 사건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 않아도 어차피 구월상과 만나야 했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순순히 오걸 장로의 수족을 따라갔다.
“혜성.”
“뭐냐?”
“잠시 자리 좀 비어야하니까. 봉황대에 내 말 좀 전해줘.”
“?”
“내가 없는 동안 봉황대 지휘는 사공신에게 맡긴다.”
부관인 초영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장 입대기간이 길었던 동경도 아닌 신입인 사공신에게 지휘권을 맡긴다는 말에 혜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갈 사혁은 봉황대 인원을 새로 뽑는 과정에서 흑사련에서 탈단한 무림인을 봉황대에 받아들였다. 아마 무림맹 지휘자들의 조사가 끝나면 그 밑에 있는 부하들까지 개별 조사가 들어갈 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흑사련 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흑사련 출신이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고문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자신이 가진 지휘권을 이용해 사공신을 포함한 나머지 전부를 지키고자 했다.
(그 녀석들은 낭인의 몸으로 정사대전에서 이름을 날렸던 보물들이야. 이런 일로 고초를 겪게 할 수 없지.)
뒷일은 혜성에게 맡기고 의문의 사내를 따라 오걸 장로의 접객실에 도착하자 구월상을 비롯해 남궁 미려. 지곤 등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만나서 반갑다.”
구월상이 워낙 개방사람 티를 안내서 개방사람답지 않았지만 오걸 장로는 확실히 옷차림새부터가 전형적인 거지 아니 개방사람이었다.
“탈주 무림인 사건을 함께 해결했다 들었다.”
아무리 연장자라지만 다짜고짜 아랫것 취급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방만장이라는 놈을 아느냐?”
방만장의 이름이 나오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놈이 어제 운남에 나타났다.”
“운남에 말입니까?”
“그 자리에 수 십 명의 정파인들과 사파인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의 세력이 탄생했다.”
수 십 명이 모였다고 한 것치고 하나의 세력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이미 무림맹. 흑사련. 마교. 무림 3대 세력과 비슷한 수준을 자랑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배교라 칭했다.”
“배교 말입니까? 마교가 멸문 시켰다던 바로 그.”
배교가 사라진지도 꽤 됐지만 가장 최근에 사라진 거대 문파기 때문에 구월상도 배교라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사라진 배교의 후예임을 주장하고 있다.”
과거 이맘때 정사대전이 터졌기 때문에 살막은 그 당시에도 여전히 살막이었다. 하지만 정사대전이 발발하지 않은 현재 제갈 사혁이 알던 과거와 현재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무림맹은 현재 배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사대전이 터지는 겁니까? 사숙.”
구월상의 질문에 오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만큼 감히 세력을 이뤄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그들과 싸워야 한다.”
제갈 사혁이 아는 한 살막은 한 단체를 이룰 정도로 몸집이 크지 못했다. 하지만 살막의 전신이 배교였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몰랐기 때문에 과거의 기준을 잣대로 섣불리 지금의 크기를 판단해서도 아니 됐다.
“운남에 자리를 잡았답니까? 그 배교라는 놈들.”
제갈 사혁의 말투가 다소 건방지지만 오걸 장로는 제갈 사혁의 태도를 가지고 꼬투리 잡지 않았다.
“그렇다.”
“거긴 위치가 좋지 않은데 위로는 마교가 있는 신강과 그 옆으로 우리 무림맹의 사천 그리고 흑사련의 귀주 지역이 닿아 있는 고립된 장소. 강호 3대 세력의 화살이 모두 향하는 곳이란 말이지.....”
위치가 어쨌건 운남은 제갈 사혁에게 패한 칠객 송수겸 때문에 하오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강호의 눈을 속이기에는 가장 알맞은 장소.
“그럼 사숙. 지금 무림맹에서 실시하고 있는 취조조사는 뭡니까? 하오문 사태는 어제 터졌고 배교라는 단체가 강호에 드러난 건 그보다 훨씬 전의 일 같은데 무림맹은 어째서 배교가 아닌 하오문 일에 신경 쓰고 있는 겁니까?”
처음 시작된 방만장 이야기와 거기에서 이어지는 배교의 등장 그리고 현재 무림맹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하오문 사태. 구월상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현재 하오문 사태에 가담한 정파인들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현재 무림맹 내부의 배신자들을 찾고 있다. 물론 겉보기에는 명문정파나 중소방파 낭인 가릴 것 없이 엄중히 조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무림맹은 생각보다 결속력이 단단하지 못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즉 명문정파로 불리는 그들이 중심이 아니라면 설사 중소방파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하더라도 무림맹이라는 단체를 이끌어갈 수는 없다. 그만큼 명문정파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고 그런 만큼 무림맹 내부에서 지배계층으로서 특권을 행사하고 있다.
명문정파의 자리가 확실히 보장된 만큼 보장되지 않은 중소 방파의 자리는 좁을 수밖에 없고 이곳에서 출세하기 힘들다 여기면 그들은 탈단을 선택한다.
(무림맹의 정보를 팔아 배교 내에서 입지를 다지려 하겠지.)
“이번 조사는 중소방파를 표적으로 한 배신자 수사를 숨기기 위한 연극이었습니까?”
“역시 네 녀석은 제갈세가 그리고 화산파의 후계자인만큼 이야기가 되는군.”
무림맹은 아니 명문정파는 처음부터 배교의 협조자가 중소방파 측에 있다고 마음먹고 이번 하오문 사태를 이용해 배신자 색출과 중소방파를 탄압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희에게 임무를 내리겠다.”
그 후 제갈 사혁을 포함한 후기지수들에게는 임무가 내려졌다. 그것도 무림 맹주 판가량이 직접 내리는 명령이었다.
“구월상은 쇄건방 출신의 손림을 없애고 남궁 미려는 남해검문의 대사형인 윤석. 지곤은 만화곡 장로 우곡이다. 나가보도록.”
구월상과 지곤 그리고 남궁 미려가 제갈 사혁을 쳐다보자 제갈 사혁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일하게 제갈 사혁에게만 따로 명령이 내려지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곧 방안에 오걸 장로와 둘만 남게 되자 오걸 장로는 품에서 초상화를 한 장 꺼냈다. 그리고 그 초상화의 주인공은 비검파(緋劍派)의 문주 다름 아닌 무림 맹주 판가량이었다.
“무슨 의미입니다.”
정말 무림맹 맹주를 죽이라는 명령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맹주께서 내리신 명령이네. 비검파를 없애라 하셨네.”
“개인에게 내려진 명령치고 멸문은 너무 과하잖습니까?”
“이번 일. 자네에게만 특별히 내려진 명령이네.”
자신의 문파를 없애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명령을 받은 이상 수행할 뿐이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스물아홉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번편은 다소 설명이 필요한 내용들이 많아서 쓰면서 간간히 수정도 많이 했습니다.
설 명절을 보내는 내내 생각해뒀던 내용이라 잘 쓰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네요.
Brilliant 님: 장면 전환이 부드럽지 않은 건 저의 글 솜씨가 부족해서입니다.
항상 의욕만 앞서서 이젠 이거 해야지 그거 해야지.... 실력이 의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매끄러운 글을 보여주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