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78화 (178/262)

<-- 178 회: 배교의 사술 -->

옆방 벽을 계속 부수며 도망을 치자 사내들의 음흉한 눈초리와 기녀들의 가식적인 눈웃음이 가득한 기루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소협. 왜 도망치시는 거예요?”

왜 도망치는 거냐는 말에 순간 제갈 사혁은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도망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호랑이에게 쫓기는 것 마냥 도망치는 꼴이라니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걸음을 멈추자 배교의 암살자는 제갈 사혁과 기녀 예향을 향해 장도(長刀)를 휘둘렀고 제갈 사혁은 예향의 허리를 감으며 상체를 숙여 장도를 피했다.

“꺄아~”

무림인들의 싸움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적이 없는 예향은 비명을 질렀고 제갈 사혁은 예향을 낀 채 배교의 무사를 상대했다.

“발로 차!”

“네?”

발로 차라는 말에 예향은 유연하게 발을 뻗었고 제갈 사혁이 아닌 예향의 공격에 당황한 암살자는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잠깐 실례.”

예향을 안으며 머리에 꽂은 장식용 비녀를 뽑아 암살자의 허벅지를 찔렀다. 그리고 한 바퀴를 빙 돌며 예향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으로 그의 뺨을 때렸다.

자신이 놀림감이 되었다고 생각한 암살자는 예향의 머리채를 붙잡았고 제갈 사혁은 그 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버릇이 나쁘네. 이렇게 남중일색(男中一色)의 미녀에게 말이야.”

“소협. 그건 소협 같은 사내에게 어울리는 말이에요.”

자신 같은 남자에게 어울린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어. 사실 그 말을 해주길 원했거든.”

“어머~ 별꼴이야!”

이대로 목을 비틀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목욕을 한지 얼마 안됐고 게다가 미인을 앞에 두고 피를 뒤집어쓰긴 더더욱 싫었다.

“날 잘도 찾아오네. 만리충? 그 벌레 때문이지? 근데 이름이 정말 만리충이던가?”

벌레에서 나는 특이한 향 때문에 찾아 오냐고 묻자 그 순간 반대편 창문에서 또 다른 암살자가 나타났고 제갈 사혁은 예향을 어깨에 메고 천장을 부수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도대체 절 왜 데리고 다니시는 거예요?”

“위험할까봐.”

“저 사람들이 노리는 건 소협이거든요!”

“그럼 내가 너무 외로워서라고 해둘게.”

“그게 본심인 거잖아요. 꺄아~ 소협 저기..... 저기 좀 봐요!”

제갈 사혁이 지붕 위로 올라오자 검은 천을 뒤집어 쓴 인영이 먹구름처럼 지붕 위로 날아와 하늘을 가득 수놓았다. 정말이지 토나 올 정도로 빽빽했다.

“뭐해요? 빨리 도망쳐야죠!”

“언제는 또 왜 도망치냐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빨리 가요. 빨리!”

달릴 때마다 기와가 박살이 날 정도로 거친 경공을 펼치며 이 지붕 저 지붕을 사이 사이를 넘어 다니며 암살자들을 피해 다녔지만 예향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경공 속도는 쫓아오는 자들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일정한 사정거리에 닿자 그자들은 일제히 제갈 사혁을 향해 갖가지 암기를 던졌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공기가 형태와 무게 그리고 질량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공기를 밟고 공중에서 갈 지(之)자를 그리며 암기를 모조리 피해냈다.

이기어검의 깨달음.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아니었으면 허공에서의 방향전환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황만 놓고 보면 기녀를 허리에 끼고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깨달음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했다.

“소협! 꺄~”

좌우 위 아래 가릴 것 없이 거침없이 공격은 들어오는데 정작 공격해야 할 제갈 사혁을 노리는 게 아니라 전부 예향을 노렸다.

“인기 좋은데?”

“꺄아~ 꺄아~ 꺄아~”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공격은 점점 빨라졌고 더 이상 재미 삼아 여유 있게 예향을 보호할 수 없었다.

“꽉 잡아.”

점점 피하기가 힘들어지자 지붕을 발로 차 그 밑으로 떨어졌다.

“지붕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당신들 도대체 뭐야?”

제갈 사혁이 지붕을 부수고 내려 온 곳은 다름 아닌 술집이었다.

“소협!”

예향의 외침과 동시에 암살자들은 제갈 사혁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들어왔고 제갈 사혁은 탁자 위에 있는 술을 집어 들어 암살자들을 향해 던졌다.

“뭐해? 같이 던져.”

“네?”

그 많은 술병을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던지자 뒤따라오던 암살자들은 때 아닌 물세례 아니 술사례를 맞으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갈 사혁은 그 틈을 타 또 다시 지붕 위로 도망쳤고 이 모습을 본 암살자들은 서둘러 제갈 사혁을 뒤따라갔다. 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붕 위로 올라간 제갈 사혁은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았다.

“어서와. 불장난은 처음이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예향은 방금 전 술집에서 가져온 촛불을 던졌다.

“아악!”

“아아아아!”

“살려줘!”

몸에 불이 붙자 암살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기 오네.”

마침 처음 기루에서 제갈 사혁을 습격했던 배교의 암살자가 뒤늦게 나타나자 손뼉을 쳐서 장도를 막아냈다.

코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제갈 사혁을 어떻게든 제압하기 위해 달려온 모습은 그야말로 암살자의 귀감이라 할 수 있었다.

“결혼은 했지?”

뜬금없이 결혼했냐고 묻자 순간 예향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가랑이 사이를 발로 힘껏 차버렸다.

“!”

그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 서늘함 고통으로 바뀌는 순간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렸고 기절하는 순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오우~”

아무리 적이라지만 같은 남자로서 도저히 볼 수 없는 잔인한 광경이었기에 제갈 사혁은 한쪽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서 어쩌나......”

남자의 자존심이 처참하게 박살이 난 암살자의 품을 뒤진 제갈 사혁은 신분을 나타내는 명패와 작은 나무상자 안에서 메뚜기 비슷한 곤충을 꺼냈다. 명패에서 나는 냄새는 분명 이 메뚜기 비슷한 만리충에서 나는 냄새와 동일했다.

“이거 큰일 났네.”

딱히 명패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배교 암살자들의 머리나 신체일부를 가지고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고민을 했다. 일단은 비검파가 배교에 의해 멸문했다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지.”

다시 기루로 돌아온 제갈 사혁은 짐을 챙기고 제갈세가 쪽에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서찰을 하나 써주는 것으로 기루 측에 물질적인 보상을 했다.

“소협. 가시는 건가요?”

그 난리를 겪고 나서인지 예향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다.

“추적향. 때문에 쉴 수가 없거든.”

“향이 문제시라면 다른 곳에서 주무실 수도 있는데?”

“다른 곳?”

제갈 사혁도 사람인지라 피곤한건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또 이런 일이 일어날텐데?”

“추적향 걱정은 안하셔도 되요.”

추적향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흔쾌히 승낙을 했다. 추적향만 감출 수 있으면 측간 옆이라도 잘 수 있었다.

“저기 말이야.”

“네.”

“이런 곳에서 자도 되는 걸까?”

“괜찮아요. 여인의 분향은 세상 그 어떠한 것보다 진한 법이니까. 뭣하시면 저랑 밤새 이야기라도 나누실래요?”

“아니 그냥.”

제갈 사혁이 하룻밤 묵는 곳은 다름 아닌 기녀들의 처소였다.

약 서른 명이 넘는 기녀들 틈에서 잠을 자는 건 그야말로 남자들의 꿈이며 평생소망이나 다름없었지만 제갈 사혁은 기쁘면서도 그리 편하게 즐길 수만은 없었다.

“예향이 마음에 안 드시면 제가?”

다른 기녀가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 저고리를 풀자 제갈 사혁은 최대한 여유로운 척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여인의 가슴을 보고도 거절하자 순간 처소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소협 설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남자 좋아하세요?”

급기야 별 해괴한 소리까지 나오자 제갈 사혁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때렸다.

“이래봬도 동정지진(童貞持身)이라서 말이야.”

“세상에..... 그런 건 빨리 버려버리는 게 나아요. 어떠세요. 오늘밤 소녀와?”

“그래 나도 그 말에는 동감을 하지만 그러기는 좀 멀리 왔지.....”

제갈 사혁이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서른 명의 기녀들을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짓자 가슴을 훤히 드러낸 기녀는 제갈 사혁을 놀리려는 듯이 일부러 과장된 표정과 손짓을 하며 말했다.

“설마 여기 있는 모두와?”

그 기대에 보답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불가능했다.

“나는 뭐랄까?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름도 모르는 여자가 옆에 있으면 기분 별로 거든.”

괜히 여유 있는 척하며 말했지만 제갈 사혁도 건강한 사내인 이상 편안한(?) 속옷을 입고 잠을 자는 서른 명의 미녀들 틈에서 맨 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

그녀들과 하룻밤 보내는 게 엄청 힘들었지만 청하를 생각하며 순결을 지켰다.

다음날이 되자 이상한 시선들이 오고 갔고 그 중에 몇 명은 제갈 사혁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사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제갈 사혁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시선을 즐겼다.

가지고 가야 할 무공서도 있었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기루에서 마차를 빌려 무림맹까지 갔다. 제갈 사혁이 진짜 제갈세가의 사람이라는 게 확인되자마자 기루 측에서 제갈 사혁과 연줄을 잇기 위해 나름 신경을 쓴 것이지만 제갈 사혁도 딱히 그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제갈 사혁이 돌아간 후 중원 전역에는 하룻밤 사이 서른 명의 기녀와 잠을 잔 전설적인 사내의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중국식으로 비녀는 잠(簪)이라고 하는데 편의를 위해 비녀라고 썼습니다.

이번편의 내용은 상당히 가볍습니다. 애초에 평소처럼 잔인하게 가려 했는데 그냥 산뜻발랄하게 그리고 사내놈들만 있는 땀내나는 이야기가 되면 안되니까. 기루에서 만난 기녀도 끼고.

만리추종향. 천리향 감사드립니다. 네. 그런 이름이었죠. 무협의 흔한 설정인데 이름을 까먹어서 그냥 그 비슷하게 했습니다.

일명 추적향 설정에 관해서인데 검색해보니까. 원래는 암컷 벌레의 향을 수컷이 찾아간다라는 게 기본 설정이라고 합니다만 이것도 딱히 정해진 게 없다고합니다.

현재 시간 4:30 이제 저는 한숨 자겠습니다. 연재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