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회: 시대의 변화. -->
제갈 사혁은 무림맹에 도착하자마자 무림맹 수뇌부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오걸 장로에게 가장 먼저 보고를 올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에 참석해 비검파와 관련된 일의 보고와 더불어 배교에 대한 것들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검파는 배교에 의해 멸문 당했나?”
무림맹의 군사인 여상망의 질문에 제갈 사혁은 군기가 잡힌 군관처럼 절도 있게 대답했다. 그편이 겉보기에도 신뢰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그렇습니다.”
비검파가 배교에 의해 멸문 당했다면 무림맹 수뇌부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무림 맹주 판가량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정말 배교에 의해 멸문 당한 게 사실인가?”
“!”
“혹시 자네가 비검파를 찾아간 게 혹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방파출신의 장로 중 한명이 미심쩍은 듯 묻자 화산파 출신의 장로인 도오 진인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말이 말이지 달리 무슨 말이라 할 게 있소?”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소?”
순간 제갈 사혁은 오걸 장로를 쳐다봤고 동시에 여망상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에서 상황을 대충 판단할 수 있었다. 제갈 사혁에게 내려진 비검파 멸문 명령은 모든 무림맹 장로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숙인 도오 진인조차 말이다.
(그런 건가? 하긴 임무 보고를 하고 나서 나 혼자만 이 자리에 불린 게 이상하긴 해.)
무림맹 장로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는 건 제갈 사혁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만하십시오. 두 분 봉황 대주의 앞에서 보기 좋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고 내용을 듣고 있던 무림 맹주 판가량은 중재에 나섰고 주제가 주제인 만큼 맹주의 중재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네.”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임무를 맡고 무림맹에서 비검파 그리고 귀환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 이상한 점은 없었나?”
“이상한 점이라면 그들의 실력차이였습니다.”
“실력차이?”
“네. 분명 같은 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실력차이가 크게 났습니다. 처음 비검파에서 만났던 배교의 암살자들과 숲에서 만난 자들 그리고 숙소에서 만난 자들. 모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실력차이는 월등했습니다.”
“배교의 암살자들에게서 가져왔다던 물건들은 어디에 있나?”
증거품의 행방에 대해 묻자 군사인 여망상이 나섰다.
“맹주님. 현재 조사 중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갑자기 회의실로 누군가가 들어오더니 여망상의 귀에다 대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알겠네.”
보고를 들은 여망상은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보고 드립니다. 봉황 대주가 가지고 온 것을 조사하던 중 추적충의 출처를 알아냈습니다.”
추적충의 출처를 알아냈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조사할 필요도 없이 배교의 것이었다. 그런데 출처를 알아냈다는 말은 그 벌레가 굳이 출처라고까지 할 수 있는 곳. 즉 논란이 될 만한 곳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출처가 어디인가?”
“..........”
여망상은 말하기를 망설였고 이는 곧 그가 말하게 될 진실이 생각보다 무거운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었다.
“사천당가(四川唐家)입니다.”
사천당가라는 말에 무림맹 수뇌부들의 일제히 사천당가의 장로인 당정치(唐正治)를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무림맹 내에서 오대세가의 위치가 제갈세가의 무림맹 참여거부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다른 오대세가 출신의 장로들은 누구보다 먼저 당정치에게 따지고 나섰다.
“본인도 모르는 일이오. 추적충이라니 그런 걸 키워서 어디에 쓴단 말이오?”
“만들어놓으면 쓸 일이야 많이 있지 어디다 쓰긴 어디다 쓴다는 말이오?”
“말 다했소!”
청성파 장로가 따지고 들자 당정치는 자신의 탁자를 주먹으로 쳐 박살을 내버렸다.
회의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혼란의 중심은 제갈 사혁에서 출처가 드러난 사천당가로 옮겨졌다.
“맹주님. 저는 무림맹의 군사로서 사천당가에 이번 일에 대한 무림맹의 비공식적인 조사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일단 추적충의 출처가 사천당가라고 알려진 이상 무림맹은 공식적으로 이를 조사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워낙 문제가 커서 일단은 사천당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비공식적으로 조사를 해야 했다.
“허락하겠소. 사천당가도 다른 말이 없기를 바라오.”
“우리 당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당정치의 동의가 이뤄지자 무림 맹주 판가량은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온 봉황 대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번 일에 대한 조사는 봉황 대주에게 맡기겠네.”
어찌되었든 이번 일을 물고 온 건 제갈 사혁이기 때문에 규정대로라면 이 일은 당사자가 조사하는 게 맞았다.
“맡겨주십시오.”
“이것으로 회의는 마무리하겠소. 배교. 사천당가. 회의가 다시 소집되기 전까지 모두들 함구하시오.”
회의가 끝나자 도오 진인은 제갈 사혁의 어깨에 손을 한번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 사혁은 쉴 틈도 없이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봉황대 대원들과 무림맹의 병사들이 대치중이었다.
“무림맹의 모든 사람들은 조사에 임할 의무가 있소.”
“임시 대주님은 조사를 받을 이유가 없다. 물러가라!”
초영이 평소와 다르게 언성을 높이자 제갈 사혁은 입 꼬리가 올라갔다.
“무슨 일이야.”
제갈 사혁의 등장에 봉황대 대원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무림맹 병사들은 긴장했다.
“대주님. 병사들이 사공신 이하 3인의 신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대충 감이 왔다. 애초에 그걸 방지하려고 초영도 동경도 아닌 사공신에게 임시 대주자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물러가라. 봉황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소속 대원을 내놓지 않는다.”
“이는 무림맹의 누구라도......”
“건방진 놈.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제갈 사혁은 봉황대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쥐어뜯었다. 그러자 단단한 기둥은 모래처럼 부서지며 박살이 났다.
“봉황 대주님이라 하셔도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이는 법도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무슨?”
“이해를 못하는 모양이군. 네놈은 무엇인데 감히 지금 내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드는 것이냐?”
“!”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병사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전시가 아니라면 오대주는 자신의 부대만을 이끌지만 전시상황에서는 무림맹의 모든 병사들을 지휘할 권한을 얻기 때문에 지금처럼 정사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강한 위계질서가 요구된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네놈들의 가장 큰 의무가 무엇인지 아느냐? 무림맹 경비? 죄인압송? 전투? 아니다. 고개를 숙이는 일이다. 그게 너희의 의무다. 의무를 다하지 않은 네놈들 따위에게 내어줄 내 부하는 없다. 가서 너에게 명령을 내린 자에게 말하라. 할 일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그 말을 들은 봉황대 대원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명령을 내린 자. 누가 생각해도 제갈 사혁보다 높은 자일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러가라!”
제갈 사혁의 외침에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길로 떠났다.
“봉황대 전원은 지금 당장 사천당가로 향한다.”
“사천당가 말입니까?”
오랜 시간 봉황 대주의 부관으로 일해 온 초영은 지금 이 시기에 봉황대가 같은 정파인 사천당가를 찾아간다는 사실에 커다란 불안을 느꼈다.
“대주님. 설마?”
“그래. 그 설마다.”
봉황대는 곧바로 사천당가로 향했고 사천당가에 도착하자마자 당가의 사병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당가의 가주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물러가시게. 가주께서는 이 일에 대해 할 말이 없으시네.”
“당정치 장로의 협조의사가 있었습니다.”
“물러가라 하지 않았는가!”
당가의 사병들을 이끄는 노인인 당강위(唐姜位)는 사적으로 당가 가주의 형이 되기 때문에 상대하기 여간 껄끄러운 자였다. 이래서는 제갈 사혁이 무림맹 병사들에게 호통을 쳤던 방금 전 그 상황과 다를 게 없었다.
“정치 그 놈이 무슨 말을 했건 우리 당가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죄가 없고 무림맹으로부터 이러한 대접을 받을 이유도 없다.”
“아버지. 그만 두세요.”
그때였다.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당가의 대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여인을 본 순간 제갈 사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였다.
“오랜만이야. 사혁.”
“소진.”
지난 날 사천에서 흡정마공을 쓰는 괴인을 함께 잡은 당소진의 등장 그리고 할아버지뻘의 당강위에게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가주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이제 그만하세요. 아버지.”
“알겠다.”
집안일이기 때문인지 당소진은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말하는 것은 물론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에도 소녀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당소진의 등장에 무력충돌은 피했지만 안내를 받고 들어가는 당가의 분위기는 상당히 묘했다.
(뭐지?)
이곳에서 제갈 사혁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묘하게도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봉황대가 찾아와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열혈강호를 읽었는데 한숨이 나왔습니다.
열혈강호처럼 좀 더 자유로운 무협을 쓰고 싶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아닌데 정말 처음에는 무림을 여행하는 느낌으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뭐 임무를 빙자해서 여행을 하고 있지만 이게 결국 그래도 임무니까요.
역시 봉명공 때가 이 소설의 절정기였어..........